“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디모데후서 1: 1-8,
1994년 11월 여든세 살의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알고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친애하는 미국민 여러분, 저는 최근에 제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수백만 미국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낸시와 나는 이를 우리의 비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에게 알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일할 수 있었던 큰 영광을 준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언제일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으로 나를 부를 때, 나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조국의 장래에 대한 영원한 희망을 지니고 떠날 겁니다. 이제 나는 황혼기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후 10년간을 이 땅에서 지내다가 93세에 영원한 세상으로 떠납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삶을 어느 작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83세까지 살다가 93세에 죽었다.’
병 진단을 받은 후 10년간은 생명을 유지한 것이지 산 것이 아니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는 것과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곧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사는 것 같지만 죽은 것과 다름 없음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작가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마지막 십년에 대한 그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작가는 너무 쉽게 속단을 하는 것 같습니다.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그저 생명만을 유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결론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이 주는 귀한 멧세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나는 과연 살고 있는지 생명만 유지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게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과연 신앙적으로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되돌아 보게 합니다.
지난 3년반의 긴 코로나라는 터널을 지나 왔습니다. 그 누구도 코로나는 끝났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분들이 포스트 팬데믹의 시간을 즐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긴 터널 끝자락에서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 보면서 신앙적으로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살펴 봐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팬데믹 기간 여러가지 씨리즈로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 씨리즈인 주기도문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 8복, 계시록의 일곱 교회, 시편, 주님의 비유, 그리고 얼마전에는 저희 교회 비전선언문을 나눴습니다.
오늘부터는 디모데후서의 말씀을 통해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은 어떤 것인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글짜 그대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2절,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그렇다면 금방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이 편지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인데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오늘 제가 참고한 책이 있는데 저자는 맨 앞에 이렇게 적습니다.
“이 책을 빅토리아와 마르셀과 조지아에게 바친다.”
그러면 책 세권을 만들어서 세 자녀에게만 주면 되지 왜 책으로 출판하였을까요? 또 이렇게 적었습니다.
“너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삶을 그리고 너희를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 자녀를 생각하면서 ‘자신감’이라는 책을 펴 낸 것입니다. 곧 세 자녀를 주목하면서 자신의 신뢰감을 더하려고 책을 펴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이유도 이와같습니다. 디모데를 바라보면서 사도바울은 늘 힘을 얻었고 또한 디모데를 권면하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동시에 이 편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것입니다. 곧 사도바울은 당신과 디모데 사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참 신앙인의 삶은 어떤 삶인지를 일깨워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알면 편지를 읽는데 큰 도움이 될줄 압니다. 사도바울은 세 차례 세계 선교 여행을 떠났는데 디모데를 만난 것은 1차 세계 선교 여행일줄 압니다. 그리고 2차 선교 여행 중에 사도바울은 제자인 디모데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리고는 디모데와 함께 이미 시작한 2차 선교여행을 계속합니다. 그후 디모데가 3차 선교여행에 함께 했는지는 확실치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디모데는 사도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개척한 교회를 목회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 한 교회를 목회하는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한편 디모데는 감옥에서 온 편지를 읽으면서 큰 힘을 받지 않았을까요? 물론 사도바울도 이 편지를 쓰면서 비록 감옥에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편지 내용으로 돌아가서 사도바울은 인삿말 내지 축복의 말을 마치고는…, 3절,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 자신과 조상들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자기의 모습은 밤낮 디모데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감옥에서도 디모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들의 모습은 모두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임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자신과 디모데의 조상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4, 5절,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도바울은 디모데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눈물은 삼세대 신앙을 이어받은 자가 소유한 살아있는 믿음의 상징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디모데를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눈물의 제자, 디모데, 그리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공통점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살아 있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신앙인의 특징을 6, 7절 말씀을 통해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참 신앙생활의 시작은 어떻게 보면 아주 쉽습니다. 그것은 생각에 있습니다. 이 한 가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선물을 잘 활용하는 것이 바로 참 신앙생활입니다. 이 때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이 선물을 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선물은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하늘나라에 가신 뉴욕의 팀 켈러 목사님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아울러 종종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소개해 드리곤 합니다. 두 분 모두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지만 두 분이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목회자로서 또한 신학자로서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분 모두 요나서에 대한 책을 펴냈습니다. ‘요나’하면 도망친 선교사가 생각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도리어 다시스로 도망치고 그래서 폭풍을 만나고 끝내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낸후 회개하고 복음을 전한 요나 이야기 잘 아실줄 압니다.
한편 두 분 모두 요나서를 선교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실천신학 곧 목회적 관점에서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책은 교회 공동체적 관점이 더 강하다고 한다면 팀 켈러는 개인적 소명에 더 관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두 분의 공통적인 관점이 있는데,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 내지 개인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무서운 곳입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켈러 목사님은 니느웨가 옛 앗수리아의 수도인데 그 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앗수리아는 고대 국가 중 가장 잔악하고 포악한 왕국이었다. … 적군을 잡으면 그들의 시체를 넓은 초원에 벌려 놓았고 도시는 완전히 불태웠다. 한편 포로들의 두 다리와 함께 한 팔을 자르고 한 팔만 남기게 했는데 이는 죽어가는 군인의 남은 한 팔을 흔들면서 조롱하기 위해서….”
켈러 목사님은 앗수리아는 요즘 식으로 하면 ‘terror 국가’였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을 갔다는 것입니다.
한편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다시스는 이 당시 하나의 파라다이스였다고 밝혀 줍니다. 사실 열왕기상 10:22절에 보면 솔로몬 당시 다시스가 어떤 곳이었는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 년에 한 번씩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 왔음이더라.”
요나는 공포의 나라를 피해서 환락의 나라로 도망친 것입니다. 그런데 두 훌륭한 목회자 모두 요나의 이야기로 오늘날 목회 현장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늘도 요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자신의 목회 과정을 요나 이야기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세번씩이나 니느웨를 피하려고 애썼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입니다. 때로는 태풍으로 때로는 물고기로….
그러나 크게는 교회 공동체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니느웨로 가는 사명을 주십니다. 한편 종종 교회 공동체는 다시스로 가려고 합니다. 교회 모음은 때로는 니느웨로 가는 결정을 내리고, 때로는 다시스로 가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도 선지자였는데 다시스로 도망쳤는데 디모데도 그럴수 있음을 내다 본 것입니다. 아니 디모데는 안 그럴지라도 디모데가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는 다시스로 향하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리고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여 주면서 권면합니다.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스로 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갑니다. 니느웨일지라도…. 비록 감옥에 갇힐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실은 이 최고의 선물을 우리들에게 주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모든 고통을 참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당신의 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십시다.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십시다.
에티 힐레슘이라는 네델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 있습니다. 어릴 때 좋은 스승을 만나 하나님을 믿으며 아울러 삶에서 모든 것에 신뢰가 가득찬 삶을 살게 됩니다. 불행히도 유대인인지라 부모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들이 수용소로 끌려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행히 본인은 붙잡히지 않았지만 그들 곁에 있기를 원해서 유대인 구호대의 일원이 되어서 수용소로 자진해서 들어 갑니다. 결국 스스로 포로가 된 셈입니다.
포로로서 이웃들을 극진히 보살핍니다. 특히 아이를 품에 안고 지내는 여인들 옆에서 대신 아이를 안아줍니다. 후에 생존자들은 그녀에게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는 커다란 신뢰가 있다. 삶이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아닌, 최악의 순간에도 변함없이 삶을 받아들이고 좋아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한편 이런 고백도 합니다.
“사람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사람과 인류를 모두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백은 사도바울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람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사는 길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
이 마음을 가지고 사람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사십시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신경을 쓰지않습니다. 스스로 단 한 사람이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곧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 갑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신앙인들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 마음으로 살아 있는 신앙인으로 살았던 에티 헬레슘은 어느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하늘에는 새들이 가득하고, 보랏빛 루핀 꽃들은 평화롭게 흐드러지고, 할머니 두 분이 궤짝에 걸터앉아 수다를 떨고, 햇빛은 얼굴 위로 부서지고 있는데, 우리의 눈앞에서는 학살이 일어나고 있네요. 모든 일은 이토록 이해할 수 없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사랑을 담아, 에티로부터.”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로 가득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집에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 하늘이 펼쳐진 모든 곳이 집이고, 이 땅 위의 모든 장소가 집이 된다.”
헬레슘은 다시스로 피할수 있었지만 니느웨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매일 매일 누리며 살아 있는 삶을 산 것입니다. 니느웨에서 최고의 집을 찾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니느웨의 집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