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본인 외과의사가 죽음을 앞둔 1000명의 환자의 임종을 경험한 후에 ‘죽을 때 후회하는 것 25 가지’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일본인들을 조사한 것이긴 해도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체험을 하니 우리들에게도 많은 참고가 될줄 압니다. 먼저 첫 다섯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1.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지 않았던 것.
2.유산을 어떻게 할까 결정하지 않았던 것.
3.꿈을 실현할 수 없었던 것.
4.맛있는 것을 먹지 않았던 것.
5.마음에 남는 연애를 하지 않았던 것.
그 다음으로는 제 눈에 띄는 몇 가지만 더 소개해 드립니다.
9.감정에 좌지우지돼 일생을 보내 버린 것
10.자신을 제일이라고 믿고 살아 온 것.
22.자신이 산 증거를 남기지 않았던 것
23.종교를 몰랐던 것
24.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
재미 있는 것은 제 눈에 띈 것은 도리어 마지막에 있는 것들이네요. 사실 일본인들 중 기독교인들은 1%에 불과하니 25가지는 모두 비기독교인들의 고백이라고 생각해도 좋을줄 압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라면 어떤 후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 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며 당당히 죽음을 맞이 할수 있을까요?
오늘도 계속해서 디모데후서 강해를 이어 갑니다. 사도 바울의 유서라고 생각되는 디모데후서 중 마지막 부분인 오늘 말씀을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을 다 쏟아 놓은 듯 합니다.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편지는 여기서 끝낼만 한데…,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갑자기 톤이 바뀝니다.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고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남들에게 할수 없는 말 그 중 개인적으로 후회되는 일 같은 것을 나누고 싶은 듯 하는 느낌이 듭니다. 아니면 못 다한 일을 디모데에게 맡기려는 듯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추측컨데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에 있는데 현재는 튀르키에 곧 터키에 위치합니다. 로마까지 가려면 지금 처럼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마차를 타던가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디모데는 이 서신을 받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무리한 부탁을 하시는 분이 아닌데 지금 이 멀리서 목회하고 있는 자기를 어서 속히 오라고 하니 말입니다.
오래 전 읽었던 글인데 늘 저의 마음에 깊게 남아 있는 글이 있습니다.
“당신이 필요할 때 자신의 스케줄을 보지 않고 달려 올 사람이 몇 명인가? 그들이 진정한 친구이다.”
저는 종종 생각해 봅니다.
“누가 달려 올수 있을까?”
물론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는 디모데를 무작정 오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12절에 보면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곧 디모데를 보고 싶어서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내서 임시 목회를 하게끔 미리 준비를 시킨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임시 목회자로 두기고를 보냈어도 그렇지 그 먼 거리에서 목회하는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말할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두 분은 요즘식으로 하면 전화를 걸면 스케줄을 보지도 않고 달려가는 관계였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디모데를 왜 속히 오라고 할까요? 그 다음 절을 보면 약간의 추측은 가능합니다. 10절과 11절 상반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누가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사실이 바울에게는 큰 실망을 남긴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면 다른 사역지로 떠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사 누가는 의사로서 바울 곁을 지키기 위해 남은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실제로 다 떠났습니다. 특히 데마의 떠남은 보통 큰 충격이 아니었을줄 압니다.
실은 데마에 대한 언급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 두 차례나 나옵니다. 골로새서 4:14절만 봉독해 드리면,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수십년 못해도 20년 내지 30년의 사역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이 큰 충격을 이길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마도 디모데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멀리서 목회하는 디모데를 부를수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과 디모데는 어떻게 이런 관계가 되었나요? 얼마전 말씀드린대로 요즘 토요 아침 기도회에서는 사도행전을 나눕니다. 특별히 디모데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떠나는 장면을 최근에 나누고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드리면 사도바울은 1차 선교여행시 이고니온에서 디모데를 만났고 그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2차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이고니온에 들렸을 때 디모데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동안 신앙적으로 많이 성숙해졌음을 보고는 함께 선교에 동참케 합니다. 한편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 어머니는 유대인입니다. 이로서 전세계 설교를 위한 초석을 다져 놓게 됩니다. 이 당시는 헬라 문화권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걸 떠나자 마자 성령의 인도하심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제 네 사람이 되었는데 하루도 아깝지 않게 선교를 하고 싶은데 성령의 인도하심이 보이질 않습니다. 젊은 디모데 앞에서 바울은 체면도 많이 상했을줄 압니다. 여기 저기 험한 소아시아를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도착한 곳이 드로아입니다.
이곳에서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봅니다. 비로서 하나님께서 유럽으로 자기들을 부르시는구나 확신하고는 유럽으로 건너 갑니다. 그런데 이고니온에서 드로아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는 우리가 알수는 없습니다. 이고니온과 드로아까지는 보스톤에서 필라델피아까지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마차 아니면 도보입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드로아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이른 곳이 드로아입니다.
제 보기에는 못해도 6개월은 걸렸으리라 봅니다. 이 때 함께 나누는 고난을 통해서 그야말로 삼세대 선교단이 되어 간 것입니다. 이 삼세대 선교단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과 실라 누가 그리고 디모데는 험한 훈련을 함께 받았어야 합니다. 본격적으로 전 세계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둘이는 함께 심한 훈련을 거쳤을뿐 아니라 본격적으로 세계 선교를 함께 시작하였던 팀이었던 것입니다. 세대를 뛰어 넘는…. 이렇게 다져진 관계이기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그러니 사도바울은 이제 하나님 나라에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것도 그토록 믿었던 데마가 세상을 향해 떠난 것을 보고는 마지막으로 디모데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디모데와의 만남을 통해서 두 가지를 원했을 것입니다. 데마는 자기를 버렸지만 그래도 디모데를 통해 데마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를 버려도 디모데로 인해서 그 모든 아픔을 이기고도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를 신뢰하고 또 신뢰한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도착했을 때 사도바울은 어떤 확신이 들었을까요? 다시금 디모데와 함께 수 개월간 헤메었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은 시간이었음을 되새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눈 앞에 서 있는 디모데가 자기가 했던 일을 이어갈 것이라는 기쁨과 확신에 가득차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사역이 계속 잘 이어갈 것을 내다 보면서 하나님 품에 안긴다면 최고의 삶을 산 사람이 되고도 남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나는 이미 늦었어….”
감사한 것은 이제 백세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난주 강사 목사님이 시편에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우리의 연수가 80이요 강건하면 10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아직도 대부분 교우님들이 20년 이상 남았습니다. 아직 시간은 넉넉합니다.
그래도 20년 이상 자신이 없으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분들을 위해서 또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11절 하반절,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조금 전 말씀드린대로 사도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기다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난 바나바가 있는데 이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그런데 1차 선교 여행 시 마가도 함께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한편 어떠한 일인지 마가는 도중 하차를 합니다. 그 후로 바울은 마가를 동역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고인지 바울은 후에 마가와의 관계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골로새서 4: 10절을 보면,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곧 바울은 마가와 화해한 것입니다. 아니 화해를 넘어 자기의 일에 유익한 자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을줄 압니다. 마가를 보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을줄 압니다. 또 하나는 마가에게도 남은 일을 맡기고 싶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있기 전에 바울은 마가와 화해한 것입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후회하는 25가지 중에 화해는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후회 없는 삶을 산 이유는 바로 후세들과의 아름다운 교제 그리고 화해의 축복을 누렸기 때문일줄 압니다. 바울은 헤어질 때는 가차 없이 헤어지지만 언제나 화해의 문을 열어 놓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화해를 못한 후회는 없는 사람입니다. 14-16절 말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알렉산더를 조심하라고 합니다. 아울러 자기를 버린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헤어지긴 해도 늘 화해의 문을 열어 놓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까지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화해의 문을 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가능한 축복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공기를 숨쉬면서 사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또 한 가지를 보여줍니다.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 오라.”
요즘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많은 분들이 책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물론 e-book도 있지만 짧은 동영상이나 SNS가 우리들의 독서를 대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예견했는지 오래 전 챨스 스펄젼 목사님은 독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으나
그는 적어도 30년간을 설교했으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지만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리어 올라가 누구도 못 들은 하늘의 말을 들었지만
그가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했음에도
책을 원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4:6절에 떠날 시각이 가까왔다고 하면서 왜 책을 가져 오라고 할까요? 왜 책을 그토록 사랑했을까요?
책을 통해 삼세대는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책을 통해 인류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소크라테스를 한나절 만날수 있다면 애플사의 기술을 다 내 주겠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를 우리는 간접적으로 만날수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삼세대를 강조하는 목회자로서 저는 역사를 이렇게 정의내리고 싶습니다.
“역사는 삼세대가 다음 삼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한 삼세대의 이어짐이 오늘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이어지는 삼세대 그리고 또 삼세대 또 삼세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인류 역사입니다.
삼세대가 이어지는 기본은 바로 책으로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도 책을 통해 믿음의 선배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책을 통해서 그의 legacy는 지금까지 전해 내려 오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책을 사랑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삶을 살펴 보면서 기독교인들이 후회할 삶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꼽을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세대와의 깊은 만남, 화해, 책.
이 세가지가 있다면 우리는 당당히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줄 압니다. 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작년에 고든-콘웰 신학원 총장님을 모셔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통역하기 위해 오신 집사님과 함께 제 방에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총장님은 역사학자인데 앞으로 쓸 책 중에 하나가 아시아 교회사 제 3 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총장님의 스승이 한국 선교사로 유명하신 마펫 선교사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아드님은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이셨는데 바로 이 분의 제자이셨고, 아드님 마펫 교수님은 아시아 교회사 1, 2권을 쓰신 분이십니다. 스승님에 이어서 3권을 쓸 계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그 두 책을 갖고 있는데 권당 600, 700 페이지에 달하는 거작입니다. 아마 제3권도 그에 못지 않은 책을 구상중일줄 압니다.
이 말씀을 듣고 집사님이 “요즘 사람들은 짧은 책이나 짧은 동영상만 봅니다”하고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총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본인도 아신다고 하시면서 “언젠가 다시 거작이 필요함을 아는 시대가 올 것을 믿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지금 당대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미래 세대를 위해서 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총장님은 지금 디모데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한편 미래의 디모데를 염두에 두시고 책을 집필하시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사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후회 없는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세대의 교제, 화해, 책. 이 축복을 누리십시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의 고백에 동참하게 될줄 압니다. 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견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