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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갈라디아서 6:1-5 (01/07/2024)

작년 여름 어느날 큰 폭풍이 보스톤 지역을 몰아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 날 많은 나무들이 쓰러진 줄 압니다. 집 사람과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꽝’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연히 가까운 곳에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정전은 되지 않았기에 집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좀 놓았습니다.

후에 집사람이 창 밖을 내다 보더니 뒷마당 큰 소나무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나무 껍질이 벗겨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큰 비가 지난 후 나가 보니 한쪽 뿌리를 덮고 있는 흙더미가 파헤칠 정도로 큰 전기숔를 받은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높은 나무 꼭대기를 보니 번개를 맞은 자국이 보입니다. 다행히 오래 전에 이미 뿌러진 가지가 나무에 걸려 있었는데 그 가지를 통해서 전기가 다시 나무 아래 둥지로 내려 오면서 한쪽 뿌리까지 흘러 땅을 파헤쳤던 것입니다.

저 나무는 죽을 것이고 그러면 처리를 해야 하는데 나무 자를 값도 만만치 않게 들거라는 생각도 들면서 구글 선생님께 물어 봤습니다. 번개 맞은 나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단 열심히 물을 주라고 써 있었고 아울러 살 확률은 50/50라고 써 있었습니다. 물을 열심히 주었는데 다행히 계속 비가 많이 와서 물 주는 수고를 훨씬 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거의 6개월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푸른 소나무 빛을 잘 띄고 있어서 번개를 견디고 이겼구나 생각하면서 요즘 뒷마당 소나무를 바라 볼때마다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얼마전 조용미 시인의 ‘소나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번개가

소나무를 휘감으면서

내리쳤으나

 

나무는

부러지는 대신

번개를 삼켜 버렸다.”

바로 저희 집 소나무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이 시를 접한 후 전에는 대견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번개를 삼켜버린 위대한 소나무의 모습으로 매일 저에게 닥아 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오늘 신년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갑진년 푸른 용의 해를 맞이해서 번개를 삼켜 버린 소나무처럼 위대한 한 해를 맞이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물론 번개를 맞지 않길 원하시겠지만…. 조금 말을 달리 할까요? 번개를 맞건 안 맞건 번개를 삼켜 버린 위대한 소나무의 위상이 가득찬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위대한 소나무처럼 한 해를 지낼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 2절이 우리들에게 위대한 삶의 길은 어떤 길인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삶 아닙니까? 그런데 그 길을 사도바울은 아주 간단 명료하게 정리를 해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이 말씀을 저는 올해 저희 교회 표어로 세웠고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거의 마지막에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말씀을 갈라디아 교회에 하는 이유가 당연히 있을줄 압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교회에는 새신자분들도 함께 예배를 드리기에 그 분들도 잘 이해할수 있도록 배경 설명을 자세히 말씀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말씀 가운데 잘 성장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유대주의자들이 교회에 들어 왔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되 할례 등 예식은 치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갈라디아’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할례는 결코 구원과는 관계가 없음을 강조하면서 편지를 통해 구원의 교리를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차근 차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리적인 설명으로는 이미 갈라진 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사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갈라지는 것은 쉽습니다. 다시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리적인 설명을 마치고는 실천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번개를 맞은 갈라디아 교회에 가장 필요한 말씀을 이제 서신을 마쳐 가면서 시작합니다.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사도바울은 율법이 말하는 할례는 더이상 필요 없다고 가르치고는 도리어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로 갈라졌지만 이제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려는 사도바울의 깊은 뜻을 읽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편지 말미인 곧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진정 하나 되기 위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놀라운 사도바울의 지혜가 눈에 띄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웃의 잘못을 권면할 때마다 자신의 연약함도 잊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고자 할 때 자기 자신도 돌아 보아 시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 사람은 이웃의 잘못을 권고하는 순간 도리어 시험에 들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할례자들 곧 유대주의자들을 바로 잡으려 할 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게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카톨릭 수녀들과 신앙적 대화를 자주 나누었습니다. 한 번은 주기도문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피터슨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주기도문에서 제일 어려워하는 부분이 무엇인줄 아세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느 부분이 제일 어렵습니까? 많은 분들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생각하실줄 압니다. 수녀는 답합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고….” 피터슨 목사님은 답합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수녀는 대답합니다.

“오, 당신 개신교인들. 여러분은 악에 대해서 너무 순진하죠. 당신들은 죄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악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악이 얼마나 세상에 가득차 있고, 거룩한 곳 수도원에도 항상 있음을 물론 당신들 회중에도. 이처럼 개신 교인들은 악의 신비성을 잘 모릅니다.”

사도바울은 죄에 대해서 물론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악의 신비성에 대해서도…. 남의 죄를 지적하는 순간 악은 바로 문밖에 와 서 있는 것을…. 할례자들의 죄를 지적하는 순간 악은 바로 문밖에서 시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자신을 살펴 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첫 단계를 넘은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2절,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어떤 성경에는 그냥 짐이 아니라 ‘무거운 짐’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너희가 무거운 짐을 서로 지라.”

한편 이 말씀과 대조되는 말씀이 5절 말씀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2절에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에서 나오는 짐과 5절의 “각자의 짐을 지라”에서 나오는 짐이 원어로는 다릅니다. 원어 발음으로는 서로 짐을 질 때는 ‘바레’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각자의 짐은 ‘폴티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글로는 같은 짐인데 다른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을 봐서는 사도바울은 어떤 깊은 뜻을 갖고 이런 단어를 선택한줄 압니다.

곧 신앙인들에게는 ‘바레’ 라는 짐이 있고 ‘폴티온’이라는 짐이 있음을 염두에 두라는 의미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곧 남을 위해 지는 짐이 있고 자기 자신만이 질수 있는 아니 자기를 위해서 져야 하는 자신의 짐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레와 폴티온의 짐을 지는 것이 참 자유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갈라져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폴티온 보다 바레를 먼저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폴티온 보다 바레를 더 강조하는 이유는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할례의 특성을 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할례는 남을 위한 짐입니까? 당연히 자신을 위한 짐입니다.

할례는 폴티온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결코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폴티온은 아닙니다. 할례는 자기를 위한 짐이었기에 폴티온에 가깝다는 뜻으로 말씀드립니다.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로 인해서 갈라디아 교회는 서로의 짐을 나누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짐을 지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겼을 것입니다.

한편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사실 거의 4년간 팬데믹을 지나 왔는데 팬데믹 기간 바레 보다 폴티온을 더 중요시 여기게 되지는 않았습니까?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제가 대광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요즘 한 70명 가량이 서로의 신앙생활을 나누는 카톡방을 개설했습니다. 아직 안 믿는 친구들도 모두 하늘나라에서 만날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카톡방입니다.

최근에는 목사 친구가 송년예배시 마지막 설교를 올렸습니다. 한 가지가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그 교회는 물론 한국의 많은 교회가 그러겠지만 주일 아침 예배가 있고 주일 오후 예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주일 저녁 예배였습니다.

친구가 부탁하기를 주일 예배는 이제 코로나 전처럼 회복되었는데 주일 오후 예배는 많은 분들이 다시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오후 예배도 나와서 후임 목회자가 신나게 목회하도록 협조해 달라는 것을 권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코로나 전에는 오후예배도 많이 나왔는데, 이제는 아침예배만 나오시는 분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주일 오후 예배는 없지만 실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교인들에게는 주일 아침 예배는 폴티온이고 오후 예배는 바레가 아닌가…? 폴티온까지는 잘 하시는데 아직 바레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오해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 주일 아침 1, 2부 예배는 폴티온이니 모두 대면으로 나오시라는 뜻 결코 아닙니다.

사실 저는 의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 코로나로 인해 대면으로 교회 나오지 못하시는 분들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개인 건강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코로나를 대하는 정신적 부담도 다 다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직업 상 많은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도 늘 코로나를 걱정한 것은 제가 갑자기 걸리면 주일 예배는 어떻게 하나 늘 걱정하면서 가급적 조심했습니다. 사람을 늘 만나시는 분들은 계속 코로나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 출석이 아니더라도 코로나를 핑계로 폴티온은 잘 감당했는데 바레는 멀리하지 않았는지….

사실 지난 4년여 동안 전세계는 코로나라는 벼락을 맞았습니다. 모든 교회가 맞았습니다. 물론 저희 교회도….

제가 기도하면서 올해 표어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거의 정상으로 돌아 온 것은 사실입니다. 계속 조심하셔야 하고 건강과 직업을 생각하시면서 지혜롭게 생활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많은 경우 코로나가 우리를 이웃과 많은 경우 갈라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기회가 아닐까요? 포스트 코로나를 맞이 하여 우리가 짐을 서로 질 때 폭발적인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오래 전 제직수련회에서 제가 핵폭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핵폭탄은 핵이 갈라지면서 생기는 힘을 사용하는 폭탄이라고…. 우리 자신을 깨뜨릴 때 놀라운 힘이 생긴다고….

그랬더니 핵을 전공하신 교우분이 저에게 말씀하시길 수소폭탄이 핵폭탄보다 훨씬 강한데 수소 폭탄은 핵이 합쳐지면서 생기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늘 제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수소폭탄이 핵폭탄 보다 훨씬 강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서로 짐을 질 때 수소폭탄의 위력이 발생합니다.

세상 여기 저기서 핵폭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핵폭탄을 이기고도 남는 사랑의 수소폭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폴티온뿐 아니라 바레의 짐을 함께 진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번개를 삼켜버린 나무가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올해는 코로나 기간 멈추었던 단기 선교도 재개됩니다. 국내 및 해외…. 함께 동참하실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직접 참여하시던가 아니면 물질적으로 동참하실수가 있습니다. 바레의 짐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각자 폴티온의 짐을 우선 지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바레의 짐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한 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말씀을 거둡니다.

‘73’은 하늘 숫자라는 어느 분의 생각을 책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73’이 왜 하늘 숫자이겠습니까?

36.5 + 36.5 = 73

36.5는 한 사람의 체온입니다. 두 사람이 모이면 73이 됩니다. 그래서 하늘 숫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헬렌 켈러는 말합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적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많다.”

온 세상에는 악의 신비가 가득차 있습니다. 교회에도…. 악의 세력은 폴티온(각자의 짐)만을 강조합니다. 할례를 강조합니다. 할례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적습니다.

자유한 자들은 폴티온과 함께 바레(서로를 위한 짐)를 감당합니다. 참 자유를 누립니다. 위대한 일을 만들어 갑니다.

위대한 한 해가 밝았습니다. 위대한 갑진년의 주인공들이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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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55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webmaster 2024.04.22
354 “나는 생명의 떡이라” 요한복음 6:22-35 (04/14/2024) webmaster 2024.04.15
353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2-46 (03/31/2024) webmaster 2024.04.01
352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32-28 (03/24/2024) webmaster 2024.03.25
351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 4:5-11 (03/17/2024) webmaster 2024.03.18
350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4:1-4 (03/03/2024) webmaster 202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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