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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4:1-4 (03/03/2024)

어느 중고등부 전도사님이 사순절을 맞아 ‘절제’에 대해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한 학생이 다가와서 이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전도사님, 저도 이번에 절제할 것이 생겼어요. 저는 공부를 좀 절제하려구요.”

 

당연히 미주 한인교회 어느 중고등부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저희 교단에서 출간한 사순절 묵상집에 실린 이야기인데, 짧고 재밌지만 많은 것이 담겨져 있음을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새삼 느껴 보았습니다.

 

학생은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장난 삼아 말하고 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모습을 밝히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들 안에 있는 깊은 죄성은 신앙 생활 아니 종교생활이라는 가면을 쓰게 하고 자기가 원하는 그 무엇을 추구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이 우리들의 숨겨진 모습을 찾아 내기 위해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 절제의 덕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절제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계속해서 요나의 이야기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싫어하고 성냈다’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주석가는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 원어는 이 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신적 질환의 증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쉬운 표현으로는 ‘히스테리’라고 해도 좋겠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히스테리처럼 보이는 정신적 발광 상태라고 번역해도 좋을줄 압니다.

 

왜 그랬을까요? 잘 아시다시피 요나는 성의 없이 니느웨 성을 다니며 하룻 길 외친 것 뿐인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를 하는데 재를 뒤집어 쓰고 또 베옷을 모두 입었습니다. 심지어 왕까지… 아니 모든 짐승도 금식을 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은 택한 민족 이스라엘에서도 상상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를 본 요나는 거의 광기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광기 가운데서도 늘 몸에 배어 있는 그 무엇을 하게 됩니다. 요나의 몸에 배어 있는 것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습관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스테리 내지 광기 가운데서도 기도를 드릴수 있었던 것은 기도는 그의 습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에 큰 물고기 뱃속에서도 기도 특히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기도를 드릴까요? 2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이런 광기를 부리고 있는 것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는 구해달라고 애걸 복걸해서 살려 주었더니 그 때 일은 다 잊어 버리고 자기가 다시스로 갈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뻔뻔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이유입니다.

자기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면 그들은 회개할 것이고 또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분이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시사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사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사용하셔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케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왜 기도의 사람 요나가 그렇게 큰 일을 하고도 여기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고 있을까요? 아니 하나님께 광기를 부리고 있을까요?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요나는 절제가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쏟아 놓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쏟아 놓은 말의 내용을 보면 평상시도 절제가 부족했고 또 말의 절제가 필요한 사람이었음은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자세히 나열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콕콕 찌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 표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시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는 표현입니다.

겉으로는 그럴싸 하지만 자신의 칼 위에 이 표현을 담아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콕콕 찌르는 것입니다.

 

하여튼 절제를 잃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속성까지도 자신의 칼에 덧 입히면서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것 처럼 보일수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요나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 절에서 요나의 진면목을 볼수 있습니다. 3절,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물고기 뱃속에 갇혔을 때는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더니 이제 자기 발로 걸어서 니느웨까지 오게 해 주었더니 이제는 자기의 목숨을 거두어 가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목숨을 거둘수 있는 칼의 소유자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칼을 니느웨에 사용하시지 않으셨는데 그 칼로 자기의 목을 잘라 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죠? 4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광기를 부리는 것이 옳으냐?”

조금 의역하면,

“네가 나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이 옳으냐?”

 

이제 요나의 진면목을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 자기의 칼을 장식한 나쁜 선지자입니다. 그 칼로 기도 중에 하나님을 콕콕 찌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 지을수 밖에 없습니다. 요나는 아직 삶속에 절제의 덕은 쌓여 있지 못했습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절제가 금방 우리들의 삶속에 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 회개, 절제, 구제의 덕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한편 괴테는 말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나온다.”

 

그런데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절제는 성령의 은사입니까? 열매입니까? 은사는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반면 열매는 시간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8, 9절만,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이러한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뜻대로 각 사람에게 거져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열매는 하루 아침에 맺혀지는 것이 아니죠?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도 열매를 맺히게 하시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순절 40일간 절제의 훈련을 하는 이유는 40일간의 시간을 통해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나는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절제의 열매는 삶에서 맺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아마도 동방정교회 신부가 미국을 오래 전에 방문한 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고 합니다.

“내가 서구 사회에 살 때 한 골상학자(얼굴의 뼈대를 보고 사람의 특징을 분석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가 방문을 해서 타운의 목회자들의 얼굴을 분석했습니다. 결론은 모두 종교적 경외감이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더 놀라운 것은 우리 모두가 이를 인정했습니다.”

이 글의 요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종교적 경외감은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뼈구조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뼈구조에는 없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경외감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절제가 아닐까요?

 

한편 골상학자가 주님의 얼굴을 보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실은 우리 주님은 절제의 주님임을 다음의 비유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무화과나무 열매를 구하였는데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3: 7,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이 때 포도원지기가 답합니다. 8절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삼년을 기다렸지만 열매를 못 맺혔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찍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포도원지기- 곧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하나님께는 칼의 속성이 있습니다. 아울러 기다림의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처럼 우리들 보기에는 모순된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죄로 인해 자르셔야 하고 또 사랑으로 기다리셔야 하고….

그런데 주님은 그냥 기다리시지 않으십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십니다. 거름을 주실 때 분명 거름과 함께 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물을 주시지 않으실까요?

바로 이 두 가지 속성으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지난달 성경 암송 귀절입니다.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여기서 요나와 주님의 모습의 큰 차이를 보게 됩니다. 주님과 요나의 공통점이 있고 차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공통점은 두 분 모두 3일간 죽음을 맛 보았습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예수님은 무덤을 통해서 지옥에서…. 그러나 모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공통점입니다.

차이는 요나는 자르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니느웨에 내리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길 원하였습니다.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자 그 칼로 자기의 목숨을 잘라 달라고 합니다.

반면 주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눈물을 흘리시며 한 해 더 시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절제의 덕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도 열매 맺게 되길 기다리셨습니다. 죄인들도 성령의 열매 곧 절제의 축복을 받게 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참 행복을 누리게 되길 원하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칼은 하나님께 맡기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도리어 십자가에서 눈물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눅 23: 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눈물의 기도가 칼 보다 강한 것을 소설가 김훈은 이순신 장군의 삶을 소재로 쓴 ‘칼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합니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묵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죽음을 벨 수 있는 것은 눈물이 아닐까요? 눈물은 절제하는 삶에서 매일 태어나지 않을까요? 지금도 온 세상은 칼로 목숨을 베는 뉴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칼은 죽음을 벨 수는 없습니다. 오직 눈물만이 죽음을 벨수 있습니다.

 

주님의 칼은 목숨을 베는 칼이 아닙니다. 죽음을 베는 칼입니다. 그 칼은 눈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6:17하반절,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음을 베라는 뜻일줄 압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냥 검이 아니라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아홉번째가 무엇이죠?

절제입니다. 절제는 곧 눈물입니다.

 

사도바울은 말씀과 눈물이 만났을 때 죽음이 베임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은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기 바로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 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이 주님의 눈물을 만났을 때 나사로는 다시 살아 난 것입니다. 죽음이 베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물의 기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어두움이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남은 사순절 절제의 삶을 통해 눈물을 회복하십시다. 이웃과 나의 목숨을 베지 말고 죽음을 베십시다. 말씀과 눈물이 만날 때 죽음을 베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과 눈물이 만나는 남은 사순절의 축복을 누리십시다.

 

하늘나라에 가면 다 기록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마신 물이 얼마나 되었었는지…. 그리고 그중 얼마가 눈물로 땅에 흘려졌는지…?

 

말씀을 거둡니다.

이해인 수녀의 ‘사순절의 기도’ 중에서,

 

예수여 나에게는 당신의 굳셈보다는 약함이

무한한 약함이 필요합니다

저주를 당해도 비난치 않고

넘어뜨림을 당해도 항거치 않고

죽임을 당해도 원망치 않는

사랑에 찬 약함이

이웃에게 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고

늘 머리를 쳐드는 나의 오만을

당신의 약함으로 부끄럽게 해 주십시오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에 가득찬 남은 사순절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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