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어린 두 동생을 둔 소년 가장이 생계를 위하여 거리에서 호떡을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어려움 속에서 호떡을 팔던 어느 날 노신사 한분이 와서,
“호떡 하나에 얼마니…?” 하고 물었습니다.
“1,000원이에요.”
그러자 노신사는 지갑에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호떡 가져 가셔야죠.” 노신사는 빙그레 웃으며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 날은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구나 하고 그냥 무심코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그 노신사가 또 와서 1,000원을 놓고는 그냥 갔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1,000원을 놓고 그냥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일년이 다 가고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며 함박눈이 소복히 쌓이던 어느 날, 그 날도 노신사는 어김없이 찾아와 빙그레 웃으며 1,000원을 놓고 갔습니다.
그 때 황급히 따라 나오는 소년 가장의 얼굴은 중대한 결심을 한 듯 소년은 노신사 앞에서 수줍은 듯하지만 분명히 말했습니다.
“저… 호떡 값이 올랐거든요.”
우리 인간들의 깊은 죄성을 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제 이야기는 아닌줄 알지만 심리학자들은 이미 이런 인간의 죄성을 깊게 연구를 해왔고 이런 이야기까지 만들어 낸줄 압니다.
사순절의 세 가지 덕목이 있는데, 참회, 절제, 구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과연 구제가 올바른 덕목이 될수 있는가 의구심도 생기게 됩니다.
한편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도 인간의 죄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줄 압니다. 인간의 악함도…. 그래도 구제의 덕목을 사순절에 지키는 것이 우리들의 영성에 덕이 되기에 오늘까지 세 가지 덕목 안에 넣고 지켜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요나서 마지막 강해를 통해서 참 구제는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 동안의 이야기를 짧게 말씀드리면,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무서운 테러리스트 국가인 니느웨에 가서 재앙이 닥칠 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길 원해서인지,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탑니다. 그랬더니 풍랑이 일게 되고 드디어 제비 뽑혀서 풍랑이는 바다에 쓰레기처럼 내던짐을 당합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시켜 놓으셨고 요나는 큰 물고기 안에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육지에 토해 내게 하십니다. 이에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루 동안 재앙이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그랬더니 뜻밖에 왕을 비롯해서 모든 백성이 재를 뒤집어 쓰고 흰 베옷을 입고 회개합니다. 사람뿐이 아닙니다. 가축들까지….
이에 요나는 자기의 선포로 인해 이 놀라운 역사가 펼쳐졌는데 도리어 화를 냅니다. 내리시겠다던 재앙이 내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요나는 화를 폭발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이처럼 화를 내는 요나의 모습 안에 절제의 부족함을 찾아 보았습니다. 하여튼 화가 난 요나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죠?
5절,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재앙은 안 내리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도 뜻을 다시 돌이키시사 재앙을 내릴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면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작심삼일로 다시 죄를 짓게 될 것을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재앙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한편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6절 말씀에 보면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요나를 가리게 하셨습니다. 요나가 급하게 초막을 지었지만 온전히 뜨거운 태양을 가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박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요나를 뜨거운 태양볕에서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6절 하반절,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가 아주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하루를 잘 보냈습니다. 물론 니느웨에 기대했던 큰 재앙은 내리지 않았지만 박넝쿨로 인해서 하루를 잘 보냈으니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고는 내일은 자기가 기대하는 일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면서 단잠을 청했을 줄 압니다. 그런데 밤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었습니다.
8절,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요나의 입버릇이 또 나옵니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니느웨에게 재앙이 내리지 않는 것을 보면서 외쳤던 이 투정섞인 말을, 박넝쿨이 시든 것을 본 후 또 같은 말로 투정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어느덧 스포일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나서를 해석하는데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예비하사’입니다.
제일 먼저 요나가 바다에 내던진 후입니다.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그리고 요나가 초막을 지은 후,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한글 번역으로는 ‘예비하사’로 되어 있어서 ‘prepare’로 들리는데, 원래 원어는 ‘appoint’에 더 가깝습니다. 그냥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지명하여 준비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담겨져 있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지명하여 요나를 죽음에서 구해 주셨고 이제는 박넝쿨을 지명하셔서 뜨거운 햇살에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요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죠? 7절 상반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첫 두 번은 요나를 죽음에서, 뜨거운 태양볕에서 구해 주기 위하여 두 피조물을 지명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벌레를 지명하십니다. 요나의 깊은 죄성을 끄집어 내시기 위해서…. 그런데 이 깊은 뜻을 이해 못하는 요나는 시든 박넝쿨로 인하여 도리어 화를 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참다 참다 못해 말씀하십니다.
10, 11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저는 10절 말씀에 요나의 가장 큰 문제가 잘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박넝쿨은 너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가 수고하여 만든 자기의 땀방울로 자란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냐는 것입니다.
요나의 문제는 자기 손에 잠시 들려져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년이 노신사의 돈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있듯이….
그런데 이런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년에게는 노신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의 돈은 자신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요나에게는 12만 명의 사람 목숨과 가축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 아니 박넝쿨 보다도 못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믿음의 선조들이 사순절 기간 전도 대신에 구제를 지켜야 할 덕목으로 삼았는지 이해가 갑니다. 구제의 덕목을 통해서 각자의 소유물에 매여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 이웃을 향한 전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때 좌우를 분변 못하는 12만 명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소그룹과 구역에서 마가복음을 시작하였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첫번째 사역은 병을 고치시는 구제의 사역이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주님은 주님이고요. 그래도 나의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이웃이 눈에 보이지 않겠어요?”
오늘 여성회 헌신예배를 드리는데, 여성들의 위대한 모습을 이 시간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영양실조에 시달려도 태어나는 아이는 결코 빈혈 증세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어머니는 빈혈로 시달려도 당신의 철분을 아낌없이 아이에게 줍니다. 그래서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납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십니다. 저는 6.25전쟁이 끝나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부산 피난촌에서, 그것도 쌍둥이로…. 그러니 우리 어머니의 영양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제가 지금도 이렇게 서서 설교할 수 있는 모든 힘의 근원은 어디에서 부터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어머니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니의 모습은 바로 인류의 어머니 하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여성을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제 아무리 어려워져도 결코 하나님께서 쉽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이유는 바로 여성들 때문이 아닐까요? 곧 구제의 DNA는 하와로 부터 시작하여 요나의 어머니에 이어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어머니들의 모습이고 우리는 또한 모두 어머니의 구제의 DNA를 받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요? 남자 아이들까지도…. 대표적 인물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한국의 승효상 건축가가 있는데 이 분은 자신의 건축 예술을 ‘빈자의 미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짐보다는 쓰임 더함보다는 나눔 채움보다는 비움을 중시하는 빈자의 미학’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빈자의 뜻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자라고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릴 때는 한 때 성직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장로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분은 건축의 아이디어가 궁해지면 달동네를 가 본다고 합니다. 달동네에는 가난할줄 아는 사람들의 창의성이 꽉 차 있다고 말합니다. 거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승효상 건축가의 빈자의 미학은 실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창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장충동에 위치한 경동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분처럼 보이는 작품을 남기지는 못 할지라도 우리도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우리 것이 아님을 알고 구제의 삶을 실천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구제는 돈의 여유가 있는 분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는 가난할 줄 아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의 덕목입니다. 이들은 창의적 사람이 됩니다. 이들 주위에는 늘 사랑이 창조됩니다. 이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또한 사순절 다섯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다섯번째가 바로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부요케 하시려고 어머니들이 영양 실조 가운데서도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주듯이 주님도 목말라 하시면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남은 옷과 함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해지시다 못해 물 한 방울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가난할 줄 아는 삶을 살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구제 사역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제 사역을 늘 앞장 서서 이끌어 주신 여성회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숨은 구제 사역은 놀랍게 열매 맺힐 때가 올 것입니다. 좌우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병원 채플린으로 섬기시는 어느 목사님 책상에는 메모지와 함께 작은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다고 합니다.
플라스틱 통에는 지난 해 재의 수요일에 사용하고 남은 재가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메모지에는 세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항상 성장하고 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 가기 전에 행복한 삶을 사십시다. 항상 성장하는 삶을 사십시다. 구제하는 자들은 이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는 가난할 줄 아는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새로운 ‘요 나’로 거듭나십시다. 스포일된 ‘요 나’에서 가난할줄 아는 ‘요 나’가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