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Beyond Utopia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 영화에 깊은 관련이 있는 분을 만났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탈북자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미국 영화관에서 상영되었고, 여러 대학교에서 시사회를 가졌는데 보스턴에 있는 몇 대학교에서도 가졌다고 합니다. 시사회를 위해서 보스톤에 오셨을 때 이 지역 목회자 연구모임에서 초청해서 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주일 설교를 탈북자들 이야기로 시작해서 의아해하실텐데, 그 분께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깊게 남아 있는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선교사들을 만나고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시 부모님께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돌아가는 탈북자들에게 선교사들이 주의를 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되 딱 한 사람에게만 전하라고 합니다. 누구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죄송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북한에서는 가족의 일도 당에 보고해야만 합니다. 가족보다는 당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은 멍청해서인지 얌체여서인지 순진해서인지 많은 경우 당에 보고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탈북 후 예수쟁이가 되었다고…. 그런데 딱 한 분 보고 안 하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바꿨다고 들었는데, 정말 멍청한 사람들이 그렇게 바꾼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요? 아니 요즘 요한복음 강해를 하고 있는데 주님의 제자 요한은 어떤 관점을 갖고 있을까요?
그동안 ‘I am’ 시리즈로 말씀을 나누어 왔는데 오늘은 어머니 주일인 만큼 어머니와 관계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I am’의 주인공의 어머니 이야기라고 할까요? 1절,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세 단어 내지 귀절이 눈에 띄입니다. ‘사흘째’, ‘가나의 혼례’, ‘예수의 어머니.’
곧 사흘째 되던 날에 가나의 혼인잔치가 열렸는데 거기에 예수의 어머니가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 단어 내지 귀절이 오늘 말씀을 해석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셋을 분석하기 전에 개괄적인 설명을 먼저 드려야 할줄 압니다.
본문 전 1장에는 세 그룹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을 소개하고 세례요한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제자들 몇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과 제자들이 인류 구원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자들이라고 여기기에 마치 영화에서 등장인물을 소개하듯이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 제일 마지막으로는 제자 중에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등장인물이 소개되어졌습니다. 이제 영화는 시작됩니다. 도입부입니다. 그런데 도입부로 소개되어지고 있는 장면이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인 것입니다. 이 도입부가 영화의 전체 흐름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유튜브로 무료 영화를 볼수 있는데 잠시 쉴 때 유튜브를 뒤적입니다. 그리고는 도입부를 보고는 계속 볼 것인지 그만 볼 것인지 결정을 합니다. 이처럼 도입부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요한은 도입부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사흘째 되던 날’로 시작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바로 전 귀절에 주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날로부터 사흘째다’라고 생각하면 무난합니다.
그런데 성경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요소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이 그냥 무심코 ‘사흘째’라고 넣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흘째’라는 표현을 넣음으로 요한은 부활의 사건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주님의 사역의 시작은 이미 부활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이어지는 사역을 보여주는 사건이 곧 가나의 혼인 잔치라는 것입니다. 계속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일을 나누겠지만, 가나의 혼인 잔치의 특징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 아닙니까?
한편 세번째로는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 곧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이야기에 중요한 조연으로 어머니가 등장을 하고 있음을 1절이 알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1절 말씀을 봉독해 드립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죄에 빠진 인류 역사를 부활의 화려한 역사로 이끄시려는 주님의 위대한 사역의 시작을 사도 요한은 가나의 혼인잔치를 배경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조연으로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아마 마리아가 혼인잔치를 돕기 위해 함께 가셨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아들의 반응은 썰렁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좀 표현이 어색해 보이지만 이 당시에는 흔한 표현이고 어떤 영어 번역은 ‘여자여’를 ‘어머니’로 바꾼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랑곳없이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왜 마리아는 자신있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얼마전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이젠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떠나달라고…. 요즘 cloning으로부터 시작해서 컴퓨터, AI, ChatGPT등 못 만드는 것이 없으니 우리가 다 알아서 병도 고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도 만들어갈 수 있으니 ‘영생’ 따위로 우리를 현혹하지 말고 그만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러시겠다 하시고는 한 가지 조건을 내십니다.
“내가 만든 진흙은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
사실 컴퓨터도 흙이 없으면 만들지 못하지 않습니까?
사람도 흙으로 만들어졌고 컴퓨터도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인류 역사상 딱 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몸소 첫 번째 증인입니다. 두 번째가 요셉이고….
마리아는 예수가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성령으로 잉태한 하나님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감히 말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 고백을 통해서 마리아는 당신의 구세주인 아들 예수께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진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곧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인해 잉태되지 않은 하나님이자 구세주임을 압니다. 그러니 못 하실 일이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때가 곧 올 것을 알리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7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그리고는 연회장, 곧 결혼식 코디에게 갖다 줍니다. 코디는 먼저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을 맛 봅니다. 물론 코디는 어떻게 이 포도주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 하인들만 압니다.
예수는 이 첫 기적의 사건의 조연으로 여자인 어머니 마리아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고백을 통해 물과 같은 세상에 포도주와 같은 세상이 도래하실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구속사역에 여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미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머니의 역할이….
한편 코디는 새 포도주를 하객들에게 나눕니다. 신랑에게 말합니다. 10절,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이 코디 곧 연회장의 말을 통해 첫번째 표적이 발표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위대한 역사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인류 역사는 부활의 사건으로 향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일에 누가 가장 크게 관여합니까?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시작은 마리아를 통해 진흙으로 빚어지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한 역사가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사실을 은연중 하인들에게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진흙으로 시작한 인류 역사는 상상할수 없는 놀라운 미래의 역사로 이어질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그러면 이 일 후에 어떻게 되죠? 예수의 어머님은 계속 어떤 역할을 하실까요? 12절,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잠시 가버나움까지는 가시지만 곧 예수님은 어머님과 헤어집니다. 어머니는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표적 사건의 조연을 맡으신 후….
한편 공관복음, 곧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공생애 기간 마리아와 동생들이 들려오는 나쁜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 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며 만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3: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한 마디로 거절당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조연도 아니였던 것 같습니다. 엑스트라였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복음에는 마리아가 아들에게 거절당한 이야기 조차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정말 엑스트라였을까요? 성령으로 잉태하는 과정에 사용된 도구였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알리는 기적의 사건에서 한 마디 하고 사라지는 역할뿐이었을까요?
다행히도 요한복음에는 공생애를 마치면서 마리아가 예수를 직접 만나는 장면을 소개해 줍니다. 요한복음 19: 26절,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의역:어머니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예수는 처음 가나의 혼례에서 어머니를 불렀던 바로 똑 같은 단어로 부릅니다. “여자여.” 그러나 이는 “어머니여”라고 의역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로서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가 결코 엑스트라가 아님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머니가 자기의 공생애 기간 중에도 큰 도우미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머니 없이는 위대한 인류 구속사를 이룰 수 없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간 마리아는 어떻게 기여하였을까요? 실은 요한은 마지막으로 이 만남의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그동안 마리아는 어떤 삶을 살았을지를 상상하게 만든다고 봅니다.
가나의 잔치 후 가버나움에 잠시 함께 있다가 헤어진 후 당분간은 잘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좋지 않은 소문이 들입니다. 한편 예수는 집에는 한번도 들리지 않습니다.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합니다. 아들이 붙잡혔다고, 십자가 형을 받았다고…. 그리고 마리아는 3년만에 처음 아들을 만나는데 아들은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듣습니다. 전에는 ‘자기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다’라고 말함으로 큰 상처를 주더니 이제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 어머니를 직접 만나지 않았지만 항상 마음에 두고 지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상에서 어머니를 알아 보고 어머니를 부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셨습니다. 지난 3년간 어머니가 어떤 고통 가운데 사셨던 것을…. 매일 아침 어머니는 아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곤 하였던 것을…. 그리고 그 모습이 당신으로 하여금 끝까지 십자가로 향하는 길에 큰 힘이 되었던 것을…. 연약한 어머니는 당신과 함께 인류 구원을 위해 함께 하신 것을….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이를 확증합니다. 27절,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제자는 요한입니다.
제가 오래전 안식년에 터키를 방문했었는데 에베소를 들렸습니다. 에베소에는 마리아의 집이 있습니다. 요한이 에베소에서 사역하였는데 요한이 마리아를 모셨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마리아의 집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그리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귀한 교훈이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소중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좁게는 가정을 위해서, 넓게는 인류 역사를 위해서….
이와 같은 맥락에서 Timothy Leary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omen who seek to be equal with men lack ambition.” – Timothy Leary
“남자들과 동등해 지려는 여자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잊은 자들이다.”(의역)
아버지들은 자녀를 배반하지만 어머니들은 자녀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매일 자녀들의 아픔을 안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자녀가 지는 십자가의 길을 먼저 가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신의 인류 구원의 첫 사역을 어머니와 함께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더불어 마치셨습니다. 어머니께 고백하심으로….
“어머니, 아들이니이다.”
이런 결론을 내려 봅니다. 3년간 남몰래 흘리셨던 아픔의 눈물로 인해서 주님은 공생애 기간 큰 위로를 받았고, 이제 당신의 사역을 마치면서 그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곧 마리아는 아들의 때가 이를 때까지 매일 아침 해산의 고통을 안고 하루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아들의 때가 되었을 때 십자가 상에서 아들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이신 예수님도 당신의 위대한 사역을 이루기 위해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 필요하셨었는데 하물며 진흙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어떨까요?
오래전 제가 설교집 ‘어머니 교회’를 낸적이 있습니다. 책을 발간 후 얼마 안되서 저희 아버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어느 교우댁이 아버님을 식사 대접하셨는데, 헤어지면서 어머니 교회 책을 보여 주시더니 “앞으로 ‘아버지 교회’ 설교집도 나올겁니다.” 유머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도 농담으로 들으시면서 만족해하시는 표정이셨습니다. 물론 당연히 아버님은 기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교회’라는 설교집을….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오지 않을 겁니다. 교회의 위대함과 견줄수 있는 분은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용혜원 시인의 시를 나눕니다.
‘엄마의 눈물과 웃음’
엄마의 눈물은
우리를 잘 자라게 하는
단비였고
엄마의 웃음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시를 좋아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