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 나는 선한 목자라” 요한복음 10:7-12 (05/19/2024)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지만 중고등부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니 그동안 해오던 요한복음 강해 곧 ‘I am’씨리즈를 계속하겠습니다. ‘I am’씨리즈가 끝난 후에 성령강림 설교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국 영락교회 담임목사님이셨고 현재 모새골을 이끄시고 계시는 임영수 목사님이 계십니다. 어릴 때 곧 우리 중고등부 자녀들 나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한국이 무척 가난할 때였습니다.

부모님은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워낙 나라가 가난하다 보니 두 분이 선생님으로 수고하셔도 수입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립학교가 아니고 공립학교 선생님이다 보니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친구도 못 사귀고 학교 다니기도 싫어지고 해서 공부를 더 잘 안했다고 합니다.

한편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10등 안에 드는 학생 10등 밖에 학생으로 나누어서 심한 편견을 가지고 대하였다고 합니다. 임 목사님은 공부를 열심히 안해서 10등 밖에 학생으로 취급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임 목사님의 자존감을 어머니가 세워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마치 거울 중에 더 커 보이는 특별한 거울과 같은 분이셨다고 합니다. 어머니 앞에 서면 자존감이 세워질수 밖에 없는 그런 거울과 같은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특별한 말을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앞에 서면 마치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는듯 하였다고 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사랑해, 너는 미래에 좋은 사람이 될거야.”

목회자가 된 후 이런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나도 어머니와 같은 거울이 되고 싶다.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의 거울이 되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모새골을 통해서 80이 넘어서도 귀한 사역 긍정의 사역을 펼치시고 계십니다.

물론 오늘 중고등부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어르신들은 어르신대로 함께 긍정의 거울이 되어 가자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임영수 목사님의 어머니가 긍정의 거울이 될수 있었던 이유가 오늘 본문 말씀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주님은 당신은 문이라고 소개합니다. 어떤 문이라고요? 9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주님은 스스로 놀라운 문이라고 소개합니다. 어떻게 보면 매직 문입니다. 구원도 받고 들어가며 나올 때마다 꼴을 얻습니다.

이 당시는 지금과 같은 거울은 없었는데 만일 지금과 같은 거울이 있었다고 하면 어쩌면 주님도 신비한 문 대신 신비한 거울로 묘사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거울 앞에 서면 잘 생기게 보일뿐 아니라 이 거울 속으로 들락날락 할 수 있고 들락날락 할 때마다 더 자존감이 생기는 거울, 더 잘 생겨지는 거울….

그런데 우리가 이런 멋진 거울을 들락날락 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10절 상반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도둑은 우리가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가 이런 멋진 거울 앞에 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도둑과 강도가 보여주는 거울은 더 작게 보여주는 거울일줄 압니다. 부정적 거울. 그래서 그 앞에 서면 더 주눅이 듭니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임영수 목사님의 선생님이 바로 이런 분이셨습니다. 선생님 앞에 서면 주눅이 듭니다. 그래서 임영수 목사님 안에 있는 귀중한 것들을 뽑아 가 버립니다. 형편 없는 모습만을 보여 줍니다. 정말로 무서운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결국 생명을 빼앗으려 합니다.

사실 저는 임영수 목사님을 잘 압니다. 영락교회를 통해서도 알게 되었지만 먼 친척이기도 합니다. 저는 임 목사님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비슷한 점은 임 목사님의 아버님도 저희 아버님도 교육자였습니다. 한편 임 목사님 부모님은 공립학교 선생님으로 자주 전근을 하셔야 했고 저의 아버님은 사립학교 선생님이라서 평생 한 학교를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와 임 목사님의 차잇점 하나는 저는 10등 안에 드는 학생이었고 임 목사님은 10등 밖에 드는 학생이었습니다. 10등 안에 드는 저는 대학교도 원하는데 잘 들어갔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것도 제 생애 기뻐했던 순간 중 하나로 기억에 남아 있긴 합니다.

그런데 후에 임 목사님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원하는 학교에 들어간 것은 좋은데 계속 또 새로운 문들이 나타나더라고요…. 나타나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이 문 앞에 설 때마다 더 작아진 내 모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문 앞에 서면 이런 소리가 들리는듯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잘 왔어 그러나 이 문은 통과 못하지 너는 너무도 초라해 이 문을 통과하기에는….” 그것까지도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닫히더라구요. 이 문만 들어가면 다 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세상 문은 이렇습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 문이 아닙니다. 계속 새로운 문을 들어가야만 합니다. 새로운 문 앞에 설 때마다 전 보다 더 작아진 내 모습을 느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닫힙니다.

그런데 이런 문들이 우리가 세상에서 들어가야 할 문들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들어가야 할 문입니다.

오늘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학생들 앞에 놓여 있는 문들입니다. 이 문들을 피할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를 능히 감당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0절 하반절,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과 강도들이 들끓는 것을 아시고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오셔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도둑과 강도는 우리의 생명을 빼앗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십니다. 도둑과 강도가 하나를 빼앗으려고 한다면 주님은 도둑이 포기할수 밖에 없을 정도로 수없는 생명의 삶을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영어로 표현하면 greatness와 excellence가 아닐까요?

오늘 중고등부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니 게임 이야기를 안 할수가 없네요. 물론 저는 게임을 안하고 못합니다. 흔한 샤핑몰 아케이드에서 하는 게임도 돈이 아까와서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한 것이 하나 있는데, 글쎄 아시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40년전에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조카가 하는 게임이 있었는데, pacman 이었습니다. 지금 기억에는 계속 pacman이 돌아다니면서 무엇인가를 잡아 먹는 게임이었는데, 한번 손을 잡으니 못 놓겠더라구요. 다음 번에는 잘 할 것 만 같은 유혹에 하고 또 하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만 낭비한다고 생각하고는 손을 놓았습니다.

요즘은 어린 아이나 어른들까지 게임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임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을 보았는데 이 분은 게임 애찬자입니다. 부모님들은 등골이 오싹하실줄 압니다. 저도 ‘게임은 이래서 안 된다’라는 내용일줄 알고 구입했는데 정반대였습니다.

이 분이 주는 멧세지는 게임 세계는 도리어 최고의 excellence로 향하는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말을 인용합니다.

“The world offers you comfort, but you were not made for comfort. You were made for greatness!”

(세상은 편안함을 여러분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편안함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위대함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세상의 도둑과 강도들은 우리로 하여금 greatness를 포기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중간으로 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임의 세계에는 중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간을 향해가는 순간 이미 도둑과 강도에게 먹히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게임을 통해 이런 도전을 받고 자제할수 있으면 제일 좋겠죠. 저자는 본인은 자제를 잘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자제도 하면서 게임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받을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일석이죠? 10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게임을 하더라도 선한 목자와 함께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한 목자와 함께 하면 당연히 선한 목자가 이끄는 공동체에 합류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선한 목자를 고백하는 공동체로 인해 가능합니다.

많은 분들이 카톡을 하시고 몇 개의 카톡방들을 갖고 계실줄 압니다. 이 시간 제일 많이 오고가는 저의 세 개의 카톡방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는 고등학교 동창 카톡방입니다. 또 하나는 대학교 동창 카톡방, 그리고 영락교회 청년회 친구들 카톡방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동창 카톡방은 최근에 만들어졌는데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카톡방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 많은 문 앞에서 좌절도 하고 즐거워도 하였는데, 이제 60이 넘고 나니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생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자는 뜻으로 만들어진 카톡방입니다.

그러니 세 카톡방 중에서 두 카톡방은 주님을 선한 목자로 믿는 친구들의 카톡방입니다. 하나는 대학교 카톡방으로 의사들의 카톡방이고요. 그 카톡방은 종종 다투기도 해서 갈라지기도 합니다. 도둑과 강도가 접근하기 쉬운 곳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다투다 보니 카톡방이 세 개로 나뉘어졌습니다. 저는 하나만 필요한데 목사로서 빠져 나올수가 없어서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결국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선한 목자를 만나려면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카톡방은 예수믿는 친구들의 카톡방이니 또다른 형태의 교회이기도 합니다. 실은 한달에 한번씩 예배도 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자녀들이 이제 곧 대학문을 두드리게 되고 계속해서 새로운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 때마다 작게 보이는 거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자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선한 목자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디를 가던 선한 목자를 모시고 살게 기도드리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이십시다. 주님을 선한 목자로 고백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다. 함께 고백하는 공동체가 되십시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입니다.”

이 때 우리는 놀라운 거울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이 줄수 없는 greatness와 excellence를 누릴수 밖에 없는 거울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을 선한 목자로 모신 자들은 위대함을 느끼게 될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크게 보이게 하는 거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울이 되시려고 주님께서는 몸소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곧 주님은 이미 비천한 경지에 다다르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위대함을 보실수 있습니다. 스스로 작아지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 분 앞에서는 모두 위대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모든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마저도 스스로 위대함을 느낄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강도마저도 위대함을 느끼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서면 자존감이 넘치게 될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greatness와 excellence를 느낄수 밖에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일은 지금도 주님을 선한 목자로 모시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납니다.

선한 목자로 인하여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는 자들의 공동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이 위대한 공동체가 오늘 세 학생의 신앙고백을 들었고 이들은 주님을 오늘의 고백을 통해서 선한 목자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러니 이 학생들은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모두 선한 목자되신 주님께서 이끄시는 위대한 신앙 공동체를 통하여 최고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This entry was posted in 설교 원고.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365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II)” 다니엘 3:19-30 (08/04/2024) webmaster 2024.08.05
364 ”견고하게 하소서” 시편 90:10-17 (07/21/2024) webmaster 2024.07.22
363 “늦게 온 오순절” 사도행전 2:1-13 (07/14/2024) webmaster 2024.07.16
362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4-21 (07/07/2024) webmaster 2024.07.08
361 ”나는 참포도나무니…” 요한복음 15:1-8 (06/23/2024) webmaster 2024.06.24
360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1-7 (06/16/2024) webmaster 2024.06.17
359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17-27 (05/26/2024) webmaster 2024.05.28
358 ” 나는 선한 목자라” 요한복음 10:7-12 (05/19/2024) webmaster 2024.05.20
357 “예수의 어머니” 요한복음 2:1-12 (05/12/2024) webmaster 2024.05.13
356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1-9 (04/28/2024) webmaster 2024.04.29
< Prev ... 1 2 3 4 5 6 7 8 9 10 38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