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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17-27 (05/26/2024)

오래전 서부 개척 시대 때의 일입니다. 미국 몬타나 주의 Bannock 마을 주민들이 금광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험한 산과 들을 지나면서 너무 지친 나머지 죽기도 하였고 어느 날은 원주민들이 습격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는 다시 한번 영토를 침범하면 그 때는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풀어 주었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난 그들은 할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이상한 돌이 눈에 띄어 깨뜨려보니 금이었습니다. 그 일대에 엄청난 양의 사금이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의 순간을 맞이한 그들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음식과 장비를 충분히 챙긴 다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비밀은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단단히 약속했음은 물론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이들이 며칠 동안 먹거리와 장비를 준비한 후 약속된 장소에 모였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온 마을의 남자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비밀을 누설했단 말인가?’ 이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눈짓으로 물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난 아냐”하면서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고 따라 나섰던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의 얼굴에 감출수 없는 기쁨과 생기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저 사람들만 따라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우리 크리스챤들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항상 기쁨과 생기가 넘쳐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할수 없는 모습…. 어떤 분들이 이런 축복을 누릴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그동안 요한복음에 나오는 ‘I am’ 씨리즈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11:1-44절이 되어야 하는데 시간 관계상 가운데 부분만 봉독해 드렸습니다. 11장 전체가 본문 말씀으로 생각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절,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회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룹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 당시 여인들은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를 소개하는데 두 자매의 오라버니로 소개되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오라버니이니 당연히 나사로도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단지 이들이 성경에서는 보이는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5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런데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이에 누이들이 예수님께 오셔서 고쳐 달라고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자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자기들을 사랑하시기에 분명히 속히 오셔서 고치실 것이라는…. 6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주님 보시기에는 급하지 않으셨는지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Fast forward해서, 17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마르다가 사람을 예수께 보냈을 때는 아직 나사로가 죽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 보니 벌써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마르다와 마리아는 얼마나 속이 탔을까요. 수학적으로 계산한다면 주님이 이틀 더 머뭇거리지 않으셨더라면 무덤에 있은지 이틀째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틀 더 머무신 것도 별로 큰 상관이 없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미 나사로는 하늘나라에 갔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당시에는 사흘이 지나야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이틀을 미적거리지 않으셨다면 아직 회생할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곧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은지 이틀 아니 사흘 안에만 오시길 바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나흘이 지났습니다. 더 이상 회생할수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이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있습니다. 늘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일도 안 하고 주님 앞에 앉아 있던 마리아는 도리어 화가 난 모양입니다. 반면 늘 섬기기를 좋아 했던 마르다는 그래도 뭔가 멀리서 오신 주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있어서인지 마중 나갑니다. 그렇지만 뼈 있는 한 마디는 합니다.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곧 하루라도 빨리 오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텐데 왜 미적거리셨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병고치는 능력도 못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3절,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마르다가 대꾸합니다. 24절,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에 주님은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네 사람들과 제자들과 마르다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25,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리아가 듣던 말던 주님은 다섯번째로 당신의 이름을 밝히신 것입니다. 첫번째가 ‘I am the bread of the life,’ ‘I am the light of the world,’ ‘I am the door,’ ‘I am the good shepherd,’ 그리고 다섯번째로,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주님은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학벌도 없고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는 자들 앞에서….

“나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부활이며 생명이노라.”

흑인 작가 Ralph Ellison의 소설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나는 에드가 알랜 포우를 겁나게 했던 유령이 아니다. 나는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괴상한 동물도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살과 뼈가 있고 인대와 물로 만들어져 있다. 나도 온전한 정신을 소유한 자로 여겨도 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알겠나? 단지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하지 않을뿐이다.”

작가는 흑인으로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고 있는 아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자들을 보고 계십니다.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으로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는 함께 무덤에 가십니다. 그리고는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십니다. 이에 마르다가 말립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열린 무덤을 향하여 주님이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제 마르다는 주님 앞에서 얼굴 둘바를 모르게 되었을줄 압니다. 그토록 속으로 대들었는데 나사로는 정말로 다시 살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어리둥절 했을줄 압니다. 자기들이 원했던 것은 일단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었는데 주님은 마음의 소원을 기가 막히게 들어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부활케 하심으로….

주님의 음성이 영혼 깊숙히 울림으로 남게 됩니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한편 그들은 결국 나사로가 하루 하루 옆에서 사는 것을 보고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나사로의 걷는 모습이 달라졌을줄 압니다. 그 전에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자의 발걸음으로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발작 한 발작 내디딜 때마다 노래가 들리는듯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팬데믹 기간에 매주 수요일마다 르호봇 이야기 동영상을 방영했습니다. 팬데믹 후기에 오신 분들은 잘 모르실텐데, ‘르호봇’의 뜻은 ‘넓다’입니다. 이삭이 좁은 골짜기에서 ‘넓다’라는 노래를 부른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늘 ‘넓다’ 곧 ‘르호봇’의 노래의 주인공이 되어 살자는 뜻으로 방영을 했습니다.

그 중 어느 편에서는 걸을 때마다 이렇게 외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잘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도 매일 아침 ‘르호봇의 노래’를 다섯번 듣습니다. 물론 교우님들이 손수 부르신 것을 듣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한번은 꼭 외칩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잘 될 것입니다.”

한편 나사로도 부활한 후 이렇게 걷지 않았을까요?
“부활이요, 생명이니,” “부활이요 생명이니.”

물론 이러한 발걸음으로 걷는다고 해도 영원히 이 땅에서 걸은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나사로도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로 가는 그 날까지 나사로의 발걸음은 옛날의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노래를 부르며 걷는 파워풀한 발걸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보는 마르다와 마리아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나사로의 하루 하루가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하루 하루 라면 비록 자기들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자기들 안에도 이미 부활의 능력이 임하고 있고 그래서 자기들도 매일 매일 부활의 노래를 부를수 있게 되었다고….
결국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틀을 미적거리셨던 것입니다. 나사로를 사용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나사로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뿐입니다. 곧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신 그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동안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모두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걸음 걸이도 주눅이 든 걸음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쁨으로 가득찬 특별한 걸음 걸이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걸음걸이 뿐 아니라 표정도 쉽게 눈에 띄는 이제는 세상에 보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곧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주님은 육신의 부활 보다는 영원한 부활에 훨씬 관심이 많으십니다. 생명을 연장시키시는 이유는 기쁨으로 부활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그래서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신 주님은 매일 아침 잠에서 깨는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개야 나오라!”

그리고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쁨 가운데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자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선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비록 언젠가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육신을 입고 믿음으로 행한 삶은 영원히 남아 하늘 나라를 장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얼마전까지 한국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나라를 찾아 온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전라북도 전주에는 미국 장로교단이 세운 전주 예수 병원이 있습니다. 6대 병원장으로 Boggs 선교사님이 섬기셨습니다.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1924년에 한국 땅을 밟고 25년간 섬겼습니다.
부임 초반에 촉박한 시간으로 우리말을 익히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이 안 되어 많은 고충이 있었지만 도리어 친절함으로 환자들을 더욱 사랑하였고 특히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부임한 바로 첫 해에만 600여명의 입원 환자와 6천명의 외래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

한편 우리말이 불편하지만 도리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완전히 외워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들려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가진 별명이 있었는데, ‘요한복음 3장 16절 원장’이라는 별명이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그는 환자치료뿐 아니라 이 말씀을 늘 전함으로 선교사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곤 하였습니다. 한편 주민들 사이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 선교사님만 봐도 병이 낫는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첫 해에 724명이 신앙을 가지는 결실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보그스 원장이야말로 육신의 질병도 고치는 의사였지만 아울러 부활의 증언자로서 귀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는 아침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보그스야 나오라.”
그는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늘 만나는 사람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암송함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대신 전하고 또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 부활의 삶, 영생의 삶이 있음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육신 가운데 부활의 증인으로 행한 모든 행위는 하늘 나라를 장식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의 궁금증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챤으로 늘 기쁨과 생기가 넘치는 삶은 우리들 앞에 열려져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안고 세상에 보이지 않는 자들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들끼리만 모여 즐거워 할 때는 금방 식게 됩니다. 생기마저 잃게 됩니다.

아침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아무개야 나오라.”

우리가 육신 가운데 부활의 증인으로 행한 모든 것은 하늘나라를 아름답게 장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Waynesboro교회에서는 laundromat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52명 회중의 작은 교회입니다. 작은 교회인만큼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자들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혼자서 세탁기를 돌리면 하나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웃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돌리면 즐거움에 가득찬 에너지가 나옵니다.”

부자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도리어 생명의 에너지가 생길수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두달에 한번 제일 마지막 월요일에, 내일이 마지막 월요일입니다만, 마지막 월요일에 음식과 쿼터를 마련해 가서 이웃을 만난다고 합니다. 마지막 월요일에 가는 이유는 정부보조를 받는 사람들이 마지막 주에 가면 이미 주머니가 비게 된다고 합니다.

가까이 사는 곳에 homeless 가정이 쭈구리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전기도 끊겨 있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고 어떤 때는 암에 걸린 혼자 사는 여인도 돕는다고 합니다. 때로는 이 사역을 통해서 가정폭력을 당하는 사람들도 돕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비록 52명의 작은 교회지만 장로교이기에 거의 모두 대학을 나온 교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laundromat 사역을 통해서 교인들이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탁하는 것도 큰 비용이 든다는 것을, 개인의 위생을 위해서도 물품을 구입할수 없다는 것을…. 더 나은 삶을 향해 갈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이것도 바로 부활의 여정임을…. 그들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보그스 선교사님도 Waynesboro장로교회 교우들도 현대의 나사로가 되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의 기쁨을 안고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자들을 찾아가곤 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하루 하루의 삶을 최고로 보람되게 사셨고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침마다 부르십니다.
“아무개야 나오라”
그리고 부활의 기쁨으로 가득찬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하시길 원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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