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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4-21 (07/07/2024)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 14-21)

이영길 목사

‘겨울 떡갈나무’라는 소설 이야기입니다. 어떤 한 마을에 안나라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부임한 지 이 년밖에 안 되었지만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겐 골칫덩어리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지각 단골생 서브시킨이라는 학생이었습니다. 참다못한 그녀는 어느 날 서브시킨을 교무실로 불러 지각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매일 1시간 전에 집에서 나오거든요.”

그녀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서브시킨의 등교 길을 함께 나섰습니다. 서브시킨은 학교 뒷문에서 시작되는 오솔길로 선생님을 안내했습니다. 그 오솔길은 주위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숲속이었습니다. 사람들 손길이 닿지 않는 그곳엔 새들이 재잘거리면서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들판엔 토끼와 사슴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서브시킨과 함께 그 모든 것을 바라보던 안나 선생님은 숲의 고요 속에 이루어지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놀라움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학교에서 출발한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그제서야 그녀는 서브시킨에게 말했습니다.

“멋진 산책을 시켜 줘서 고맙구나. 앞으로 계속 이 길을 통해 학교를 다녀도 좋아.”

 

서브시킨 학생은 늘 일찍 집을 떠났지만 오솔길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골 지각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학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는 문제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문제아가 되었던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 말씀의 저자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사회적 문제아였기 때문에 여러번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풀려 나오면 또 붙잡히고 풀려나오면 또 붙잡히곤 합니다. 한편 이렇게 사도바울을 사회적 문제아로 만든 것이 무엇일까요? 로마서1: 16, 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한 마디로 사도바울은 복음의 숲에 매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는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종종 세상 권세자들에게 붙잡힐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의 내용은 크게 둘로 나눌수 있습니다. 11장까지는 이론이고 12장부터는 실천부분입니다. 곧 11장까지는 사도바울이 깨달은 복음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고 매력적인지를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회적으로 문제아가 될수 밖에 없었음을 은연중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12장부터는 사회적 문제아들의 삶이 어떤지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곧 복음을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중 15절 말씀이 눈에 띄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말씀은 이번 단기 선교단 주제 성경 귀절입니다.

지난주 초에는 이 지역 목회자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마지막 끝 마무리 시간에는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사모님의 건강 이야기를 먼저 나누었고 이어서 사모님이 자신의 현재 상태를 나누셨습니다. 5년 안에 주님의 품에 안길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모두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저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어느 사모님은 눈시울이 벌개지는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저는 금방 느낄수 있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시는 매력의 사모님이시구나….’ 그 사모님은 분명 즐거워 하는 자와도 더불어 즐거워 하시는 분일줄 압니다.

복음의 매력에 심취된 분들은 그들의 삶 자체가 놀라운 매력을 발휘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붙잡힌 자들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사도바울은 지금 성도들의 교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를 넘어 세상 공동체를 향한 삶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장의 문장 구조를 보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본문 전 귀절인 13절까지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매력이 넘치는 자들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오늘 본문 말씀은 14-21절 말씀인데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매력이 넘치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표적으로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사도바울은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이 넘치는 자들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곧 사도바울은 참 복음의 증언자가 되기 위하여 교회의 담을 넘어 세상 공동체 사람들을 찾아 가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복음의 매력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주석가는 실제로 즐거워 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 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이유는 세상적으로 잘 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시기 질투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잘 될 때 즐겁게 박수 치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박수 칠 때 놀라운 역사가 펼쳐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때 복음의 매력이 온 세상을 진동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오래 전에 왔는데 처음에는 워싱톤 DC근처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저는 달라스 카우보이 football팀을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워싱톤 Redskins와 라이벌이었는데 달라스 팀을 응원했습니다. 이유는 Tom Landry라는 헤드코치가 신실한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잘 될 때만 즐거워하고 비기독교인들이 잘 될 때는 시기하는 것이 복음적 삶일까요? 반대가 아닐까요?

사실 요즘 보면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인이라지만 제대로 신앙 생활 안하는 사람이 잘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 때 이들 옆에서 함께 즐거워한다면 그 때 우리는 복음의 매력으로 가득찬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금주 말씀 준비를 하면서 깊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왜 세상에는 불의한 사람들에게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에게 생기는 좋은 일로 인해 즐거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사람들에게 생기는 좋은 일로 인해 즐거워 할 때 복음의 매력은 더욱 확산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즘 전도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는데 이것이 마지막 방법인 것 같습니다. 함께 즐거워 하십시다. 특히 안 믿는 자들과 함께….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이 과정을 지난 분들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할줄 압니다. 이 때 놀라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얼마전 유튜브로 미원주민들에 대한 자료를 보았습니다. 어느 Lakota 원주민에게 한 제작자가 묻습니다.

“Are you an American?”

“No, I am a Lakotan.”

저에게는 하나의 eye opening moment였습니다. 얼마전 호주에서 오신 교수님께 들은 것을 교우님들과도 나누지 않았습니까? 호주에서는 원주민들은 First Australian으로 부른다고 하면서 호주가 더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라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미원주민들을 First American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들은 American이라는 말도 원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당연합니다. 사실 ‘아메리카’라는 말은 이태리 탐험가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고 첫번째 사용된 것은 1507년에 발행된 지도였다고 합니다. 반면 원주민들은 기원전 수만년 전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Lakotan이지 American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American들은 그들의 땅을 빼앗은 자들인 것입니다. 아메리칸들로 인해 그들의 역사는 눈물의 역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 저희 단기 선교팀이 섬기는 나바호 족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해 드리면, 우리가 뉴멕시코 단기 선교팀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원래 아리조나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50년에 미국 정부가 9000 명의 나바호부족 인디언을 300마일 너머에 있는 뉴멕시코 지역으로 강제로 쫓아 냈습니다. 이를 역사적으로 ‘긴 도보여정 (Long Walk)’으로 불리워진다고 합니다.

이들은 뉴멕시코 수용소에 갇혀서 4년간 감금생활을 합니다. 물론 다행히 다른 부족에 비해서는 고난은 덜한 편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체로키 부족의 길은 Trail of Tears라고 불리우고 있음을 잘 아실줄 압니다. 죠지아 주에서 오클라호마까지 긴 여정을 걸어 갔어야 했습니다.

지난주에 설교 말씀을 해 주신 이상혁 목사님께서는 아리조나 호피족을 선교하셨는데 가족 중 한 분이 하는 말씀이 이렇게 한인 선교사들이 미원주민들을 선교할수 있는 이유는 원주민들은 백인들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 역사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올해 저희 교회가 다시 뉴멕시코 단기 선교를 시작할수 있음은 너무도 감사한 일입니다. 한국인을 통해서 복음의 매력을 맛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기 선교단을 파송하는 것은 우리가 Lakotan도 아니고 American도 아니고 우리는 Christian으로 복음을 들고 찾아 갑니다. 이들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복음의 매력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십시다. 사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늘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셨습니다. 특히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즐거워 하셨습니다. 최고의 매력이 넘치는 삶을 사셨습니다.

나바호 주민들이 우리의 모습을 통해 매력을 느낀다면 이들도 언젠가 이웃을 향하여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도 함께 즐거워하지 않을까요?

한국인들과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백인들과도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지 않을까요? 백인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파워인 것입니다. 복음에 매료된 사람들은 사회적 문제아가 되는 것입니다. 백인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 하는 자들은 미원주민 사회에서는 문제아들이 아닐까요?

이들을 사회 문제아들이 되게 하십시다. 주님도 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사회문제아였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작년도 7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심포지움을 열었는데 첫번째 강사로 총회장을 역임하셨던 미원주민이신  Elona장로님이 오셔서 좋은 강의를 하셨습니다.

그 때 프로그램 중 하나가 Plymouth에 있는 민속촌을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곳에 가면 청교도들의 삶도 보게 되지만 원주민들의 모습도 볼수 있습니다.

저희가 마지막 대화 시간에 여쭤 보았습니다. 이런 민속촌에 자주 방문하셨냐고…? 대답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아파서 그동안 한번도 방문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여쭤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가셨냐고…?”

“Since you are good people.”

Elona 장로님은 느꼈던 것입니다. 저희 교회 교인들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임을….

복음의 매력을 안고 떠나는 단기 선교단원들과 이들을 보내는 신앙 공동체에 속한 모든 분들에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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