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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II):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1-11 (09/01/24)

‘풀꽃’ 시인으로 잘 알려진 나태주 시인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로 43년간 봉직하시면서 풀꽃과 같은 평범한 어린이들에게 풀꽃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셨던 분이십니다. 이 분은 당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잘 표현하십니다.

“한 여자로 버림받는 순간 나는 시인이 되었고,

한 여자로 선택받는 순간 나는 남편이 되었다.”

젊어서 사랑하던 여인에게 차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시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릴적부터 시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인으로 태어난 순간은 여인에게 차임을 당한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후에 한 여자와의 사랑은 그 여자의 선택으로 잘 이루어져서 드디어 남편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나태주 시인도 전도서를 쓰기에 아주 적합했던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일 나 시인이 부유하게 사셨다면 말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가난한 초등학교 교사로서 워낙 가진 것이 없어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던 분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저자와는 정 반대 삶을 사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잃고 그의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시인이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딱 하나 여인의 사랑만 갖고 있었는데 이를 잃으니 허무함 가운데 시인이 된 것 같습니다.

반면 전도서의 저자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수많은 여인도 거느렸습니다. 평생 잃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누린 후 도리어 정반대의 고백을 합니다. 허무함 가운데 허무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가난 가운데 남은 하나를 잃은 사람은 시인이 되었고 모든 것을 누린 자는 도리어 허무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1, 2절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허무주의자 중의 허무주의자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최고 부자였던 전도자는 왜 이런 허무주의자가 되었을까요? 전도자는 본인이 허무주의자가 된 이유를 크게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3절,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9절 이하 말씀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9, 10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사실 솔로몬 당시에만 해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을줄 압니다. 최신이라고 만들었는데 알고 보면 오래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미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아마 솔로몬은 자기가 당대의 최고의 부자라고 자부하고 있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언젠가 알게 됩니다. 자기 같은 부자는 세상에 많고 또 많이 있었음을….

이뿐 아닙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고백도 함께 합니다. 4절 초반절과 11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솔로몬은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자기도 사라지고 자기가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후대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을….

사람의 수고도 물거품 처럼 사라지지만 인간의 모든 자취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인생의 수고뿐 아니라 정말로 새롭게 생긴 신기한 것도 모두 언젠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의 흔적과 함께….

여기서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의 유명한 말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은 갈대와 같이 언젠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임을 전도자는 알았고 이것이 전도자가 허무주의자가 된 첫번째 이유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물론이지만 인간 자체도 갈대처럼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한국의 모새골 임영수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손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손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부모님께 무엇인가 사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도 졸업했으니 축하하는 의미에서 원하는 것을 사 줬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손자가 하는 말, “원하는 걸 다 가졌더니 허무하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가운데 전도자가 되어 같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5-7절을 통해 자연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계속 반복만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사가 반복되듯이…. 그리고 강물은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곧 인생도 자연도 허무함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솔로몬도 여행을 좋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안 가 본데 없이 다 다녀 보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가 볼 때가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뒤돌아 보니 이도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8절 말씀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그런데 여기에 전도자의 지혜와 통찰력이 엿보입니다. 전도자는 은연중에 왜 온 세상의 최고의 경치를 보고도 허무할수 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슬쩍 흘리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자연을 보면서 허무주의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전도자는 은연중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서 허무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온 세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인 것을….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자연을 욕심 많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허무감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말을 빌리면 실은 ‘인간은 자기만 생각하는 갈대’라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자연을 볼 때 남는 것은 허무라는 것입니다.

저의 친한 친구가 있는데 하늘나라에 갔습니다만, 이 친구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면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항상 반대로 이끌어 갑니다. 전도자처럼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참가자들로 부터는 제대로 된 생각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참가자들은 허무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게 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성경공부를 인도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실 전도자의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생각하는 갈대만 잘 하면 자연은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허무함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전도자는 왜 인생이 허무한지를 뒤집어 생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요즘 climate change등 운운하는데 생각하는 갈대가 잘 하면 자연도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곧 자연에 대해서 희망의 틈새를 남겨 둔 것입니다.

이상으로 전도자는 두 가지 허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 그리고 자연의 허무…. 그런데 결국 모든 것은 생각하는 갈대에 달려 있습니다. 이들이 잘 하면 일석이조. 두 가지 허무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자연의 허무는 인생들에게 달려 있으니 생각하는 갈대의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하게 될줄 압니다.

한편 저는 4절 말씀에서 인생을 위한 희망의 틈새를 찾아 보았습니다. 특히 하반절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모든 열쇠는 생각하는 갈대에 달려 있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희망의 틈새를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땅의 영원성을 읽을수 있다면 말입니다.

실은 헛됨으로 가득찬 인생살이 가운데서 전도자는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놀라운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영원을 볼줄 아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땅의 영원성을 보는 눈을 가진 것입니다.

사실 허무로 가득찬 세상에서 땅의 영원성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눈은 보았던 것만 보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운데 허무만 늘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이 허무로 보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원성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께 질문드립니다. 여러분은 땅을 보면 무엇을 느끼십니까? 영원성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땅값이 얼마인가…?

오늘 현대인들은 집을 봐도 차를 봐도 땅을 봐도 값이 얼마인가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두 친구가 땅을 샀습니다. 한 사람은 A라는 곳에 다른 친구는 B라는 곳에, A에 땅값은 배가 올랐습니다. B는 그대로 있고 그러면 B에 땅을 산 친구는 심한 허무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한 가지 미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립니다. 두 원주민이 땅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까지가 내 땅이다” 서로 끝없이 다투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그 부족 선견자에게 찾아 갔습니다. 선견자가 알겠다고 하고는 엎드려 귀를 땅에 댑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서 말합니다.

“이 땅은 그 누구 땅도 아니래…!”

땅의 주인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바로 미 원주민들의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한 것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자는 세상의 허무함을 많이 보았지만 그는 놀랍게도 영원성도 보는 특별한 눈의 소유자였습니다. 전도자는 남다른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땅은 영원한 것임을…. 땅은 잠시 왔다 가는 인생들이 값으로 매길수 없는 것임을….

생각하는 갈대는 모든 것을 잃을 때 시인이 됩니다. 나태주 시인이 그랬습니다. 반면 허무함 가운데 땅의 영원함을 보기 시작할 때 지혜자가 됩니다. 전도자가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전도자는 허무함 가운데서 땅의 영원함을 볼수 있었을까요?

전도서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지난주에 나눴습니다.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들에게는 땅은 영원함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자손의 축복 하나는 땅의 축복. 곧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요즘도 이스라엘 지역은 늘 전쟁이 끝없는 이유는 이스라엘인들의 신앙 때문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큰 돈을 줘도 팔수 없는 땅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여호수아 24: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여호수아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러 허무한 일들을 만나게 될 것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수 많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을….

한편 여호수아는 그 땅은 약속의 땅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대표하는 돌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곧 영원성을 상징하는 돌을 세운 것입니다. 이 돌이 증거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임을….

이 돌을 생각하며 땅을 값으로 매기지 말고 땅의 영원성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한편 약속의 땅의 영원성은 말씀의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말씀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는 영원한 땅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땅이 되셨습니다. 이 약속을 이루시려고 주님께서는 땅위에 박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영원한 땅 위에 박힌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허무로 가득찬 세상에서 창조주를 기억하십시다.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인 약속의 땅을 보여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자들에게는 세상에 되어지는 모든 일도 영원한 축복임을 느끼게 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Honduras에 Choluteca 다리가 있습니다. 원래 1930년에 지었는데 1996년도에 새롭게 지었습니다. 워낙 태풍이 자주 오는 곳이라 어떤 태풍에도 끄덕하지 않게 지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새로 지은지 2년후 Hurricane Mitch가 혼두라스를 강타했습니다. 다리는 너무 든든하게 지어서 끄덕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반면 심한 태풍으로 인해 강줄기가 변했습니다. 더이상 다리 밑으로 강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땅에 굳세게 박혀진 다리는 끄덕도 안 했습니다. 약속의 땅에 굳게 세워진 것은 무너지지 않음을 보여 주는 다리입니다.

그런데 저 다리도 아무리 잘 지었더라도 폭탄 하나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땅을 약속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보여 주십니다. 그 약속의 땅은 영원한 땅입니다. 이 세상 어떤 풍파도 무너뜨릴수 없는 영원한 땅입니다.

그러니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들은 땅을 볼 때 결코 값을 매기지 않습니다. 영원한 약속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면서 삽니다. 이 땅에서 부터 천국을 누립니다.

전도자는 말씀합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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