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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III): 가난한 지혜자” 전도서 9:13-18 (09/15/24)

올해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특히 양궁은 금메달을 휩쓸었고 사격에서는 3개의 금메달과 함께 김예지 선수가 은메달을 따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김예지 선수와 함께 양궁 선수들이 나왔었는데, 시력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거의 2.0/2.0이라고 답할 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김예지 선수는 0.3/0.5, 양궁의 김우진 선수는 0.3/0.4, 임시현 선수는 0.4/0.4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이들은 그 좋지 않은 눈으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었을까?”

실은 어떤 선수는 솔직히 말하길, 과녁은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무엇을 보고 쏘길래 그렇게 거의 백발백중을 할수 있을까요?

 

감사하게도 최근에 이런 글을 접해 보았습니다.

“Art is the proper task of life.” – Friedrich Nietzsche

그저 뭉뚱그려 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예술적으로 살 때 참 인생을 누린다.”

 

그들은 시력은 완전하지 않아도 사격과 양궁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지혜 있는 자들이 인생을 예술로 가꾸어가지 않을까요?

 

오늘도 이어서 전도서 강해 설교를 계속합니다. 특별히 제직안수식이 있는 관계로 훌쩍 뛰어서 9장에 있는 말씀을 본문으로 정했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한 지혜를 보고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이를 한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성읍에 한 큰 부대를 소유한 왕이 와서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큰 왕이 패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15절 상반절,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작은 성읍이 이긴 이유는 가난한 지혜자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지혜자가 어떤 지혜를 소유했었는지는 궁금합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어떤 지혜였는지는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추측해 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전혀 근거 없는 추측을 하기 보다는 전도서의 전체 흐름에 맞는 추측이 더 좋을 줄 압니다.

우리는 전도서의 주제를 이렇게 잡고 시작했습니다.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자는 은연 중 이 가난한 지혜자의 특징을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로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같은 지혜서인 잠언 9:10 상반절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그러면 이런 지혜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나라를 구했으니 크게 표창을 받았을까요? 15절 하반절,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한 공원의 관리인이 있었습니다. 관리인 덕분인지 그 공원은 어느 공원보다 말끔이 청소되어 있었고 호수도 아주 청명한 빛을 반사하곤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공원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늘 낮에 와 보면 관리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점점 주민들은 의구심이 생깁니다. ‘관리인 없이도 깨끗한 공원이 아닌가? 괜히 관리인에게 월급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관리인을 해고합니다.

한 달이 지났는데 계속 공원은 깨끗합니다. 주민들은 생각합니다. “해고하기 잘했네….” 그런데 두 달이 지나면서 호수는 청명한 빛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공원 여기 저기서 쓰레기로 인해 쥐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쩔수 없이 관리인을 다시 고용키로 하였습니다.

관리인은 남들이 안 보는 시간에 호수에 떨어진 낙엽을 주어 모았고 버려진 쓰레기들을 청소하곤 했던 것입니다.

 

제직안수식이 거행되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나라를 구하고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일에는 늘 이처럼 보이지 않는 가난한 지혜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국가나 교회에는 이러한 가난한 지혜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들로 인해 오늘까지 국가와 교회가 세워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구한 이들을 가난한 지혜자라고 전도자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16절,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이는 무슨 뜻입니까? 잠시 동안은 고용하지만 또다시 해고하는 우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곧 지혜가 힘보다 낫지만 힘을 못 이긴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지혜자는 부자들에게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해 놓고는 힘센 자들로부터 도리어 멸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한 자는 바로 힘센 자기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잘 아는 전도자는 다시 자신의 소신을 밝힙니다. 17절,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전도자는 고백합니다. 지혜자들의 말들이 나라를 구하고 있음을…, 반대로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은 도리어 역효과만 있음을….

 

그런데 여기서 전도자는 기가 막힌 지혜의 말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얼뜻 들으면 지혜자들의 말들과 다스리는 자의 호령을 비교하는 듯 보입니다. 곧 지혜자의 반대가 다스리는 자라고 들립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지혜자의 반대로 우매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다스리는 자의 호령이 무서워지는 이유는 바로 우매자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Misunderstandings and lethargy produce more wrong in the world than deceit and malice do.”

“오해와 무력함이 사기와 악함보다 세상에 더 큰 해를 끼친다.”

 

우매한 자들은 어쩌면 쉽게 오해하고 스스로 포기를 잘 하는 자들이라고 괴테는 말하고 있는듯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기꾼과 악한보다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우매로 인해서 사기꾼과 악한들이 세상에서 판을 치기 때문이 아닐까요?

 

곧 세상은 가난한 지혜자들과 가난한 우매자들의 다툼인 것입니다. 이 다툼은 가난한 지혜자들과 우매한 자들을 우롱하는 죄인들의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죠? 전도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8절,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어느 활 잘 쏘기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활을 쏜 곳에 가 보았더니 정말로 백발백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백발백중입니까?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활을 쏜 후 활 주위에 과녁을 그립니다.”

우매한 자들이 힘센 자가 쏜 활 주위에 과녁을 그려 넣고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이 쌓은 많은 선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때 어떻게 해야죠? 우리도 함께 무력감에 빠져야 하나요? 그러면 또다시 힘센 자들의 우롱을 받게 될 터인데….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지혜롭게 행한 후 어떤 결과가 올지라도, ‘창조주를 기억하라.’

 

오늘 임직과 안수를 받으시는 제직 여러분,

창조주를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섬기는 곳마다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물론 힘 센 자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럴 때 또 다시 창조주를 기억하십시다. 최고로 힘 세신 분을 기억하십시다.

 

그러면 이 때 어떤 일이 일어나죠? 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매자들도 창조하셨습니다. 우매자들도 사랑하십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들은 우매자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곧 이 세상에서 가난한 지혜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힘 센 자들에게는 우롱을 받을지라도 늘 창조주를 기억합니다. 주님을 바라 봅니다. 결국 우매자들도 사랑합니다. 우매자들 뒤에 숨어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고 우매자들을 창조주께 인도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보다 우매자들의 이름을 주님께 올립니다. 그래서 힘센 자들에게 더 핍박을 받습니다. 그들에게 우매자들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쉬울까요? 그래서 이들의 두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미 전도서 4:9, 10절에서 다음과 같은 지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가난한 지혜자들은 홀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잘 압니다. 모든 지혜의 시작은 ‘함께’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도 가난한 지혜자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지혜자들이 있는 곳에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아름답게 가꿔 가십니다.

 

감사하게도 오늘 여러 분이 함께 임직을 받으십니다. 함께 가난한 지혜자의 길을 가시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시길 바랍니다. 우매자들을 사랑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Mary Oliver라는 시인이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Tell me, what is it you plan to do with your one wild and precious life?”

“말씀해 보세요. 하나뿐인 와일드하고 소중한 인생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

 

오늘 임직받으시는 분들께 묻습니다.

“하나뿐인 와일드하고 소중한 제직으로서의 섬김을 어떻게 계획하고 계신지…?

 

가난한 지혜자로 사십시다. 창조주를 바라보며 가장 멋진 예술 작품을 만들어 보십시다. 우리가 쏜 인생의 화살은 멋진 곡선을 그리며 날아 갈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화살을 날릴 때 그 화살은 주님이 쏜 화살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화살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지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승전고를 들으며 가난한 지혜자의 삶을 사십시다. 전도자는 말씀합니다.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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