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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IX):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9-14 (11/10/24)

남편이 집에서 담배를 피워 불만인 아내는 어떻게 해서든지 금연을 시키고 싶었지만 아무리 부탁을 해도 남편은 들은 체 만 체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배달된 신문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담배를 피우면 암에 걸린다’라는 큰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뛸 듯이 좋아했습니다. 자기 말은 안 들어도 전문가의 말은 들을 것이라고 생각해 남편에게 바로 그 신문을 보여 줬습니다. 남편은 그 신문을 보고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매직 펜 좀 줘요.”

아내는 남편이 안방에 ‘금연’이라고 크게 써 붙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가 준 펜을 받자마자 A4 용지에 크게 ‘신문 사절’이라고 써서 문밖에 붙여 놓았습니다.

 

물론 아내는 마음이 아팠겠지만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신문기사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해결해 줄까요?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소개해 드립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New Yorker라는 유명한 잡지 회사에서 일했던 Bringley씨가 갑작스런 형의 죽음을 대하고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뉴욕의 유명한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에 안내인으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후에 그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재밌는 책을 펴냅니다.

그중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내인으로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입니다. 르네상스가 시작한 무렵의 작품들이 전시된 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불평을 듣게 됩니다.

“Goddammit, I’m in the Jesus pictures again!”

그 방에는 210개의 예수님에 대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박물관에 오는 분들은 그래도 젊잖은 분들이 올 것 같은데 계속되는 예수님 작품 앞에서 참다 못해 터뜨렸던 것입니다. 옆에 안내인이 듣던 말던….

예수님의 작품도 아마 담배를 좋아하는 남편의 마음을 도리어 불편하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곧 예수님의 이야기로 쓰여진 복음서도 어쩌면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동안 오늘까지 9차례 말씀을 나누고 있는 전도서는 어떨지 생각해 볼만하다고 봅니다. 9, 10절 말씀입니다.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구약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모세오경 곧 율법서입니다. 그리고 예언서 대표적으로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책들입니다. 그리고는 지혜서입니다. 시편 잠언 전도서 등입니다.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기록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반면 지혜서에 대해서는 9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9절 하반절을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지혜서는 인간들의 깊은 연구와 고민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서와 예언서도 인간의 고뇌로 가득차 있어 보이지만, 특히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 받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민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반면 지혜서는 인간사를 고민하는 인간들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그러면 지혜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11절 말씀을 보면,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특히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인간의 깊은 고뇌가 담겨져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목자가 주셨다는 것입니다. 곧 궁극적 저자는 목자장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인간들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쓴 지혜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복음서를 비롯 율법서나 예언서보다 더 가깝게 느낄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지혜서로 인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분이 있습니다. 현재 MIT교수이신 Rosalind Picard박사님이십니다.

AI분야에서 연구하고 계시고 Media Arts and Science교수이십니다. 원래는 독실한 무신론자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예수쟁이가 되신 보기 드문 분이십니다.

원래 어릴 때부터 똑똑했고 모든지 잘 풀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특히 종교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을 믿는 비지성적인 사람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늘 무시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가까운 친지들 중에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교회를 같이 가자는 권고를 받곤 했습니다.

어느날 든 생각은 성경을 한번도 읽어 보지 않고 종교인들을 폄하하는 것도 비지성적인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 종교인들이 비지성적이라고 폄하했지만 본인이 비지성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오랜 기간 성경을 읽습니다. 특히 Picard박사를 사로 잡은 것은 지혜서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잠언이었습니다. 잠언을 보니 인간의 깊은 지혜가 가득 담겨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서에서 시작했지만 끝내 복음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는 자기의 지식이 방대한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정말로 보잘 것 없음을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주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사역은 감히 짧은 인간의 두뇌로 다 파악할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고백합니다. 믿음이 모든 것의 시작임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믿음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믿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통해서 여기까지 왔다고요? 크게는 지혜서 그중에서도 잠언…. 물론 제가 본 인터뷰에서는 잠언만을 이야기했지만 아마 교수님은 지혜서를 통틀어 표현하고 싶어 했을줄 압니다. 그리고 지혜서에서 빼 놓을수 없는 것이 오늘까지 9번에 걸쳐 강해 설교 말씀을 드린 전도서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남편과 주님의 그림 앞에서 불평을 터뜨린 분들이 만일 지혜서부터 시작한다면 Picard교수님과 같은 훌륭한 삶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Picard교수님은 지혜서의 말씀으로 놀라운 세계를 접한 후 어떻게 복음서의 주님을 만나는 길을 가게 되었을까요? 전도서의 주제 처럼 보이는 ‘헛되고 헛되도다’를 되뇌이다 보니 복음서의 구원의 주님까지 만나게 되었을까요?

 

지난번 이 지역 목회자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교제를 나누다가 각자의 목회에 대해서 나누게 되었는데, 저는 그동안 전도서 강해를 해 오고 있고 이번 주가 마지막 강해가 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제가 30년 목회한 것을 다 아니 한 목사님이 장난끼 넘치는 말을 하였습니다.

“30년 목회를 하였지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생각으로 하시는군요….”

 

그 말을 월요일 낮에 듣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를 드렸습니다. 30년 동안 무엇이 헛된 시간이었고 무엇이 헛되지 않은 시간이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이번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11절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전도자는 37번씩이나 ‘헛되다’고 고백을 하지만, 이렇게 고백하는 이유는 바로 찌르는 채찍을 피하려는 자들에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혜서가 다섯 권이 있습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이 지혜서를 깊이 만나면 지혜자의 지혜를 만나게 되는데 참 지혜자들은 고난의 분깃을 감당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로 전도서 강해의 대장정을 마치는데 남는 것이 그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고백뿐이라면 정말 헛된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저는 Picard교수님을 두 개의 유튜브 인터뷰로 만나 보았지만 그래서 그 분의 삶을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릴수는 없지만, 무신론자가 많은 대학가에서 자신을 자랑스런 무신론자에서 신실한 예수쟁이가 되었다고 공포하신 것을 보면…. 그 분은 지혜서를 통해서 고난을 깨달았고 드디어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분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학식이 많은 기독교인들은 때로는 많은 경험과 학식으로 기독교를 잘 포장하여 자기 자신은 고난 없는 신앙인이 되려고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 분도 얼마든지 마음 먹을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분은 안 그렇지만 고난 없는 기독교를 찾아 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은 전도자는 이미 알았습니다. 12절,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저는 간단히 이렇게 요약할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참 예수 믿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늘 말만하고 글을 쓰고 책을 펴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절제된 글과 책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적으로 뛰어날 수록 말과 글로서 자신의 본 모습은 숨기고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미 지혜자는 알고 절제 없는 글과 말로만 예수를 믿는 것이 더 피곤한 일이라는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생활하다가 신앙 생활이 지칠 때 한번 생각해 볼만 하다고 봅니다. “내가 말과 글로만 신앙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편 지혜서는 이런 고민을 하는 자들을 위해 이미 간단히 정리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서의 결론은 바로,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제가 월요일 밤에 기도드렸다고 했는데, 마지막 드린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금주에도 제가 받을 고난의 몫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무슨 고난이 그리 많은가 생각하시는 분들 계실줄 알고 예를 들어 하나만 말씀드리면 대표적인 것이 설교 준비입니다.

여러분들 기억에 안 나시겠지만 제가 첫번째 강해 설교시 말씀드렸습니다. 저에게 전도서 주석책이 세 권이 있다고…. 그리고 거의 모든 페이지에 줄이 쳐 있다고…. 그런데 설교 준비를 시작하다 보면 꾀가 생기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고 하는…, 이번에도 세 권 중에 그래도 제일 많이 사용한 주석책이 있습니다. 어떤 꾀가 생기겠습니까?

“이 한 권만 읽고 준비하지….”

월요일 저녁에 기도해서 였는지, 세권의 주석에서 오늘 해당하는 곳을 모두 다 읽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분 듣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겠지만, 지난 8번 설교원고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사실 어쩌면 지혜서는 이런 하찮은 안 해도 될 것 같은 작은 채찍을 감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평신도분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교회에 주어진 일에 그동안에 해 오던 것보다 한 발짝 더 수고하는 것 이것이 전도서가 이야기하는 채찍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전도자는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여 경외하며 그의 명령들을 지킬 것을 전도자는 말씀합니다. 이 때는 이미 모세오경은 존재할 때입니다. 예언서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을 때이고…. 곧 모세 오경의 말씀을 지킬 것을 전도자는 명령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신구약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강조하기를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도서를 마치지 않습니다. 마지막 1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대반전으로 마칩니다. 결코 인생은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심판이 있기 때문에…. 심판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헛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기에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저는 다음에 제 친구 목사를 만나면 말하려고 합니다. 전도서의 주제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가 아니라, ‘심판하시리라’라고….

 

역도 선수 장미란 선수를 잘 아실줄 압니다. 첫번째 메달은 2004년도 아데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땁니다. 물론 그 다음 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쟁취합니다.

첫번째 은메달을 딸 때 중국 선수가 금메달을 받았는데, 많은 역도 전문가들은 중국 선수가 반칙을 했는데 이를 심판이 묵과해 줘서 안타깝게 은메달을 받게 되었다고들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장미란 선수는 그냥 받아 드리고 자기 길을 가는데 결국 다음번에 금메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세상 심판들은 오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오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말씀대로 순종하며 우리의 십자가를 감당하면 최고의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멋지게 우리 모두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수여해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4:8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C.S. Lewis의 영광의 무게라는 설교에서 루이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섯 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합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3. 우리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4. 우리는 잘 먹거나 대접을 받거나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5. 우리는 우주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얻어서 도시들을 다스리고 천사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판을 지나야 합니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우리들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지혜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전도자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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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75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IX):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9-14 (11/10/24) webmaster 2024.11.11
374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VIII):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 11:1-6 (11/03/24) webmaster 2024.11.04
373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VII):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전도서 9:1, 7-10 (10/27/24) webmaster 2024.10.29
372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VI): 산 자의 소명” 전도서 9:2-6 (10/06/24) webmaster 2024.10.07
371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V): 하나님의 선물” 전도서 5:10-20 (09/29/24) webmaster 2024.09.30
370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IV): 범사에 기한이 있고” 전도서 3:1-15 (09/22/24) webmaster 2024.09.26
369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III): 가난한 지혜자” 전도서 9:13-18 (09/15/24) webmaster 2024.09.16
368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II):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1-11 (09/01/24) webmaster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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