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 32-38
제가 종종 크리스챤 인터넷 서점을 통해 책을 주문합니다. 얼마 전에도 좋은 책 두 권이 눈에 띄어서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습니다. 며칠후 두 권이 도착했습니다. 두 권 중 한 권은 얼마큼 읽어 놓았고 다른 책은 후에 읽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3일후 문 앞에 또다른 책을 포장한 우편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언젠가 주문한 다른 책이 도착했겠지 생각하며 포장을 뜯어 보았습니다. 똑 같은 책 두 권이 또 배달된 것입니다.
순간 귀찮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이니 아니 목사가 아니라도 인간의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면 솔직히 알려줄수밖에 없습니다. 알려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귀찮은 심부름을 하게 될 것이 예상되었습니다. 다시 포장해서 우체국에 가서 부쳐달라는 부탁을 받을 것이 뻔했습니다.
어쩔수 없이 ‘누가 보고 계신데’ 생각하며 이멜을 보냈습니다. 책이 두번 왔다고…. 신기하게도 다른 이멜들은 한참만에 답신이 오던가 아니면 안 오던가 하는데, 몇 시간만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서점 관계자였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으로 두 번 책이 보내어졌다고 사과의 말을 먼저 하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책을 다시 포장해서 집문 앞에만 놓아두면 Fed Ex운전수가 픽업을 할 것이라고 하면서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시름을 놓았습니다. 저의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저는 사실 우체국에 가서 부쳐줄 것을 각오하고 이멜을 보냈었는데 그냥 포장해서 문밖에만 내 놓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포장지는 찢지 않았기에 마스킹 테이프로 싸서 집문 앞에 두었습니다.
요즘 사순절이니 어느날 사순절 묵상을 하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포장해서 문밖에 놓아두면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가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실까? 그리고 또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고생은 다른 분이 하시는구나….
이어서 Fed Ex운전수는 그냥 운전만 하면 되는데 우리 주님은 어떤 고생을 하셨을까 다시금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오늘은 종려 고난 주일예배로 드립니다. 이번 주는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픽업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찾아 오셨는데 그 일을 완성시키시는 주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주간입니다.
주님께서는 Fed Ex운전수처럼 편하게 와서 우리들의 죄를 픽업하셨을까요, 아니면…? 32절 말씀입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예수님은 결코 특별 대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죄수와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수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세상 감옥에는 그 안에도 구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치범들을 위한 감옥이 있고 또 특별한 죄수들을 대하는 감옥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반 죄수와 같이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Fed Ex운전수처럼 죄만 픽업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바로 죄인들과 같이 되신 분이십니다. 죄인들의 자리에 서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죄인들과 어디까지 함께 하셨을까요? 33절 말씀입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이 당시 십자가는 특별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주는 평범한 사형틀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예수님은 특별 대우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뭇 죄인들처럼 십자가 형틀에서 이슬로 사라지는 평범한 죄수의 길을 가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 형은 페르시야 시대에서부터 유래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이스 사람들도 사용을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Alexander대왕은 수천명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로마인들이 십자가형을 채택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십자가 형을 반역하는 노예와 살인한 노예를 죽이는 형틀로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 설치를 하여서 더 이상 감히 반역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바로 반역하는 노예 아니면 살인한 노예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면 반역한 노예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셨어야 하지 않나요? 34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은 도리어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들은 가까이는 로마군병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빌라도, 끝으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쳤던 군중들일줄 압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칠까요? 그후로 오고 가는 모든 인류를 향한 말씀이 아닐까요? 오늘날은 바로 우리들을 향한 외침이 아닐까요?
그 당시 장면으로 돌아간다면, 로마군병들은 로마를 위해서 반역자를 처신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종교인들은 유대교를 위해서 아니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배도자를 처신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된 진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안에 깊이 내재한 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 있는 죄를 아셨습니다. 그들의 죄가 예수님을 반역자로 배도자로 몰아가게 하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그들 안에 있는 죄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고백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도리어 변호사가 되셨습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하게 하고 있다고….
예수님은 바로 이 고백을 온 인류를 위하여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말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30세에 광야 40일을 보내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3년간 공생애를 마무리 지으시기 위하여 오늘 겸손히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십자가상에서 외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들은 전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지 못할 짓을 계속합니다. 34후반절부터 38절까지 말씀을 보면, 그들은 주님의 옷을 나눠 제비 뽑고 관리들은 비웃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군인들도 희롱합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십자가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를 붙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아니 우리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간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한국인을 위한 첫 외국인 순교자는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입니다.
주문모 신부는 1752년 중국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랍니다. 20세 때 결혼을 했으나 그의 아내는 결혼한 지 3년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천주교에 입교하고 신부가 됩니다.
주 신부는 이 당시 북경 교구 교구장이었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에서 선교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북경에서 장장 20일을 걸려 압록강 근처 만주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미 압록강이 녹기 시작하여서 건널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만주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겨울이 다시 오기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겨울이 와 노동자로 가장하고 압록강을 건넙니다. 관문을 지키고 있던 군인이 신부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하는 자냐?”
“노동자입니다.”
“어서 가라. 날씨가 춥다.”
이렇게 해서 조선에 들어 온 주 신부는 조선말을 배우면서 복음 전파에 힘씁니다. 그런데 배교자의 밀고로 주 신부는 도망을 다니게 되고 함께 있던 조선인 신도들은 체포되어 순교를 당합니다. 이때는 이미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해를 받게 된 이유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1800년도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정조가 죽자 순조가 11세에 왕이 됩니다. 이 때를 타서 순조의 할머니격인 정순왕후가 정권을 장악합니다. 정순왕후는 집안의 원수들인 남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천주교가 남인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습니다.
곧 정치적인 이유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정치적인 반역죄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많은 경우 정치적인 권력다툼의 희생으로 기독교가 박해를 받게 됩니다. 조선의 천주교의 박해도 같은 케이스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주 신부는 계속해서 잡히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한편 정치인들과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특히 외국 신부가 조선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주 신부는 더 이상 전도 활동을 할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6년간 전도를 하던 조선을 떠나기 위해 압록강을 향해 걸음을 재촉합니다.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고 비참했습니다. 특히 목자로서 고난 받는 조선 교인들을 버리고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깊은 슬픔이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이 자신을 따랐던가. 얼마나 많은 교인이 수십리 밖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와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들으려고 애를 썼던가. 그러나 정작 자신은 조선의 교인들을 버리고 떠나고 있었습니다.
압록강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습니다. 수많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걷고 또 걸어야 했습니다. 비가 올 때도 있었고 바람이 세차게 불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2월이었기 때문에 북쪽으로 올라 갈수록 더욱더 추워졌습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주 신부는 마침내 압록강에 도착하였습니다.
‘강을 건너면 중국이구나.’
주 신부는 압록강을 보자 비감했습니다.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멀리 조선 땅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박해받는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이 아니다.”
그 때 그는 갑자기 강한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습니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내가 피를 흘려야 이 박해가 끝이 난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이다.”
주 신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의 눈앞으로 그가 만난 수많은 교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기쁨에 충만하여 구름 위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주 신부는 그들과 함께 예수님의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주 신부는 다시 한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으나 조금도 피로하지 않았습니다.
주 신부는 1801년 3월 12일 의금부로 찾아가 자수합니다. 주 신부는 새남터에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새남터에는 이미 수많은 군사와 구경꾼이 도열해 있었습니다. 군졸들은 신부의 사형 판결문을 낭독한 후 말합니다.
“남길 말이 있는가?”
주 신부는 형장에 늘어선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입을 엽니다.
“우리 주께 기도하겠소.”
주 신부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합니다. 기도 후 큰 바람이 불며 회오리 바람이 일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날립니다. 순간 상관이 영을 내립니다.
“집행하라.”
그가 조선을 위한 최초의 외국 순교자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801년 4월 19일 오후 4시 였습니다.
그런데 주 신부는 마지막으로 무슨 기도를 하였을까요? 아마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말씀을 거둡니다.
언젠가 소개해 드린적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가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이라는 시입니다. 첫 부분만 다시 소개해드립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사순절 때면 가끔 말씀드립니다만, 사순절은 Lent라고 하는데 Lent의 어원은 ‘lengthening’ 곧 길어진다는 뜻입니다. 사순절 기간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있음을 모두 느끼실줄 압니다. 그러면 사순절은 영적인 봄을 기다리는 절기인 것일까요?
물론 영적인 봄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봄을 오게하는 봄길이 되는 절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해가 길어지기에 봄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봄은 언제 도래할까요? 아니 영적인 봄을 오게 하는 봄길은 과연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고난주간 우리 모두 봄길이 되십니다. 해를 길게 만드십시다. 부활의 꽃이 활짝 피는 봄이 찾아 올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이웃을 향하여 용서의 고백을 한다면 우리도 봄길이 되지 않을까요?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봄길이 되셨습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한국인들을 위한 봄길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봄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향하여 용서의 고백을 할 때 주님은 Fed Ex 운전수가 되어서 봄길을 타고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이웃의 죄를 거두어 가시지 않으실까요? 세상은 우리들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통하여 보스톤에 봄이 찾아올 것입니다. 봄길이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