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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본문: 로마서 8:12-17

고려 공민왕 때 어느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산에서 땔감을 구해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올 즈음에 동생이 숲에서 번쩍이는 물건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가 보았습니다.

“아니, 이건?”

동생은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번쩍이는 그 물건을 보았습니다. 몇번이고 다시 보아도 그것은 분명 황금이었습니다. 그것도 손바닥만한 것이 두 덩이씩이나 됐습니다.

“형님, 이리 와 보세요. 여기 황금이 있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형님도 부리나케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정말 황금이구나.”

“형님, 이건 하늘이 저희를 도운 겁니다. 저희 형제가 가난에 시달리는 게 안쓰러워 하늘에서 내려 주신 거예요.”

그러면서 동생은 황금을 주워 하나는 형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가졌습니다. 형제는 황금을 하나씩 품에 넣고 발길을 재촉하여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남들처럼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강가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우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품에서 황금덩이를 꺼내 냅다 강물에다 던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아우야. 왜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리는 거냐?”

형이 깜짝 놀라 묻자 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형님, 저는 평소에 형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매우 깊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금을 손에 넣고부터 그 마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하면 형님이 가진 황금도 제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고민을 하다가는 형님을 생각하기는 커녕 칼을 들고 대들지도 모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을 버린 것입니다.”

“그렇구나. 과연 네 말이 옳다.”

아우의 말을 다 들은 형도 품속에서 황금덩이를 꺼내 강물 속에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두 형제는 황금으로 인해 형제애가 사라져 감을 느낀 나머지 위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황금을 내 던집니다. 그들은 더 굳건한 형제애를 갖게 됩니다. 무엇 보다도 많은 후손들에게 귀한 사표가 되어 갑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도 그들의 이야기를 읽게 된 것 같습니다.

 

형제애로 인해서 이들은 위대한 삶을 남기게 되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 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이 두 형제가 오늘을 사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이 두 형제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수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오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빚진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위대한 삶을 살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빚진 자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무슨 빚을 졌을까요? 본문 말씀 바로 전인11절 전반부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사도바울은 우리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을 거져 받은 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빚입니다. 값으로 살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을 거져 받은 빚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기 위해 빚을 졌습니다. ‘이는 빚이야’ 하면서 그 돈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빚만 갈수록 늘어가는 것 아닙니까? 도리어 이 빚을 잘 사용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받은 빚을 잘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14절 말씀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곧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참으로 빚진 자의 축복을 잘 누리는 것입니다. 이런 빚이라면 얼마든지 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빚진 자의 삶을 누리는 것이 쉬울까요? 사실 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님을 사도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더 큰 싸움이 시작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육신이 큰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육신이 이기고 언제 영이 이길까요? 우리가 누구의 편을 드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육신의 편을 들면 육신이 이깁니다. 영의 편을 들면 영이 이깁니다. 곧 빚진 자들은 영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1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목요일 오전에 날씨가 좋아서 deck에 나가서 설교준비를 하였습니다. 바로 이 성경귀절을 쓰고 있는데 제 눈 앞에서 뭐가 왔다 갔다하는 것이 눈에 띄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다람쥐였습니다. 저는 다람쥐를 보면 항상 이름을 부르곤 합니다. 어떤 다람쥐이던 이름은 같습니다.

“Kissy.”

Kissy를 보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Kissy가 나에게 “아빠” 하면 어떨까…?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이 새삼들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육신은 죄로 죽어 있습니다. 물론 영으로는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지만…. 이런 징글맞은 죄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아빠, 아버지.”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빚을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빚을 지는 것이 죄송스러워서 “아빠”라고 부르기를 꺼려한다면 사실 성령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6절 말씀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어색하지만, 밀어부치면, 저의 집사람이 저에게 Kissy가 저의 자녀라고 말한다고 가정하십시다. 저는 믿기 싫어도 믿을수 밖에…. 어쩔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남성입니다. 성령은 여성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께서 당신의 자녀라고 하는데 어떡하겠습니까? 하나님도 별수 없죠….

저희 집사람은 결코 Kissy가 저의 자녀라는 말을 할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하시고 계십니다. 죄 가운데 육신적으로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십니다. 원래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높이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증인되십니다.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염치도 없는 것 같애요. 사도바울의 염치 없음이 그 다음 표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7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사도바울은 욕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성령을 통해서 들자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우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속자라고….  

 

다시 Kissy이야기로 들어가서, 그럴리는 없지만 저의 집사람이 Kissy가 저의 자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Dedham에 있는 작은 저의 집을 상속받은 자는 준석이와 더불어 Kissy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되고 염치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그런데 사도바울의 염치 없음은 그 다음 말씀으로 다 무마되고도 남습니다. 17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도바울은 우리가 상속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 덕분인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속자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말씀드린 두 형제가 황금을 내 던지는 것을 보니 정말로 귀한 분들임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보다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도바울은 주님의 고난까지 상속받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식물은 왜 바흐를 좋아할까?”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식물 세계의 신비함 속에 빠져 들게 하는 아주 좋은 책입니다.

2, 3년전 어느 교우님이 이사를 가셨는데 그 교우님의 취미가 식물을 가꾸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 생기면 자주 화초를 사서 즐기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시는 분인데 이 책을 읽고 그 분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느티나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씁니다.

“느티나무 하늘 아래 사람의 마음은 평화와 위안으로 잠긴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최면에라도 걸린 듯 나른해진다. 여름날의 느티나무 하늘은 그래서 여름을 더욱 실감나게 해 준다. 더위에 눌려 지친 사람들로 하여금 느티나무 하늘은 비로서 여름을 마주할 수 있는 여유를 주며, 여름의 정서를 즐길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저의 가슴에 와 닿은 표현이 있습니다.

“느티나무 아래로 들어가 위를 한번 올려다 보라. 나와 하늘 사이의 공간이 얼마나 넓고 깊으며 그 속에 있는 나무의 깊이와 넓이 또한 얼마나 무한한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웅장한 줄기 위에 하늘을 향해 퍼져 있는 가지들, 그 가지를 따라 흩어져 공간을 메우고 있는 이파리들, 도저히 실감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느티나무는 가지고 있다. 하늘은 느티나무로 인해 더욱 높아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제일 마지막 표현이 저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습니다.

“하늘은 느티나무로 인해 더욱 높아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넓어지고 높아지셨습니다. 한편 지금은 작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넓어지고 높아지길 원하시지 않으실까요?

느티나무가 느티나무가 되려면 수많은 풍파를 다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 지금은 하늘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은 나무는 하늘을 향하여 매일 자람을 통하여 하늘의 높고 넓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람 자체는 하나의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늘의 드높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들이 고난을 통해 더 높은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당연히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높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황금을 내 던지는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삶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아빠, 아버지.”

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십니까? 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빚진 자된 우리가 세상에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통하여 보여진 하나님의 위대함으로 인해 많은 이웃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영을 거져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빚을 갚는 길입니다.

 

지난주 이곳 목회자 수련회가 가까운 나사렛 교단 수양관에서 있었습니다. 2년전에 오셨던 허천회 목사님께서 오셔서 이민신학적 관점에서 아주 훌륭한 강의를 하셨습니다. 20년간 매년 진행되어 온 수련회인데 제 보기에는 제가 참석한 수련회 중에 제일 감명을 받았던 수련회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허 목사님이 정말로 멋진 강의를 하셨습니다. 훌륭한 강의를 통해서 허 목사님이 더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 분이 계셨습니다. 회장 목사님이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시간과 순서마다 섬세한 섬김의 손길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강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예수님께 대한 신학적 해석이었습니다.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강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배울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날수는 없었습니다. 작은 섬김의 고난을 감당하신 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볼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만난 것은 섬김으로 일관한 회장 목사님을 통해서 였습니다.

그는 황금을 내던지는 것보다 더 위대한 희생으로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계셨습니다. 강의는 아무나 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축복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세상에 나타내십시다.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 때 많은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탄생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정호승 시인은 다른 관점에서 나무의 고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고백을 합니다. 제목은 ‘부러짐에 대하여’라는 시입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고난 가운데서 높이 높이 자람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부러짐을 통하여 우리는 모퉁이돌 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건축 자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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