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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베푼자니이다(누가복음 10:25-37)09/27/15

 

오늘은 수수께끼를 먼저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다음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피아노의 시인’ 쇼팽,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 한 사람을 더 할까요? Apple Computer의 창설자 스티브 잡스…?

 

이들은 모두 피난민 내지 난민의 자녀입니다. 얼마전 조선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유엔난민기구는 ‘난민들의 잠재력’이라는 문구와 함께 난민 출신 세계적 저명인사 136명을 홈페이지에 소개했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던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히틀러의 집권으로 난민 신세로 전락합니다. ‘유대인의 자식’이라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핍박이 심해지자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대 교수직을 얻어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작곡가 쇼팽 역시 타국에서 평생 조국 폴란드 독립을 바라던 난민이었습니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에 지배받고 있었고 쇼팽은 음악을 통해 조국의 위대함을 알린다는 사명을 갖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갑니다. 하지만 폴란드의 청년들이 조국의 주권을 찾기 위해 러시아를 상대로 기도한 ‘바르샤바 혁명’이 실패하자, 정치적 위협을 받고 프랑스로 망명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합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의 파리’ 등으로 명성을 쌓은 이후인 1851년 나폴레옹 정권에 반대하다 국외로 추방됩니다. 대로를 뛰어다니며 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위고는 정부의 탄압을 피해 벨기에로 갑니다. 하지만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다가 벨기에서도 추방돼 영국의 섬 등을 전전하며 난민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망명 기간 중 써 낸 작품이 바로 ‘레미제라블’입니다. 난민 생활의 산물인 셈입니다.

우리에게 최근 가장 잘 알려진 난민 출신 유명인사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2011년 사망)입니다. 그의 친부인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시리아 출신 미국 이민자입니다. 잔달리가 조국의 폭정을 피해 난민이 되지 않았다면 ‘애플’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인류에 크게 공헌한 사람입니다. 쇼팽은 음악가로서, 위고는 문학가로서 스티브 잡스는 콤퓨터의 귀재로서 크게 인류 역사에 공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들을 받아주는 나라와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아인슈타인과 쇼팽과 위고와 스티브 잡스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 위대한 사람들은 이들을 받아 준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실까요? 이 네명과 같이 위대하게 된 사람 아니면 이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

 

한편 주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시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기위해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는 정말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 질문을 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였습니다. 아마 주님의 약점을 잡아내서 자기의 위대함을 보이려고 했던 것같습니다. 질문자가 율법교사이니 주님은 율법을 사용하여서 답변을 하십니다. 아니 되묻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 주님을 시험하려다가 순간 역습을 당합니다. 교사는 자기가 깊이 깨닫고 있었던 질문을 하시니 역습 당한다는 것도 잊은채 대답합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신명기와 레위기에 숨겨져 있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잘 듣지 못 하고 있었던 귀절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아주 율법을 통달한 사람만이 깨달을수 있는 것인데 이를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율법의 달인인 것을 밝힌 셈입니다. 이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교사는 자신이 역습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말합니다. 29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에 주님의 본격적인 역습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옷을 벗기고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여기까지 듣고 율법교사는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율법교사는 제사장은 아닙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될수 없습니다. 레위지파 중 아론의 자손이어야만 합니다. 아마 평소에 제사장들을 많이 증오하거나 멸시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보다 율법을 너무 모르는 주제에 조상 덕분에 제사장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교사는 신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제사장은 역시 율법을 몰라 이 예수라는 작자 뭔가 아는데….” 주님은 그의 마음을 못 읽은척 하며 계속 말씀하십니다.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예수를 시험하러 왔다가 예수의 팬이 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레위지파 중에 아론의 자손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레위인이 된 것입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제사장을 돕는답시고 으시대는 꼴을 늘 보아 왔던 것입니다.

한편 그는 은근히 기대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아무런 도움을 안 주고 지나갔는데 세번째 사람은 이들과 다른 사람이 나타나겠지…. 그런데 남은 사람은 율법교사뿐일거야….’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입니다. 잠시 후 예수와 악수를 할 마음을 가지고….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율법교사는 자기의 귀를 의심합니다.

“아니 누구? 사마리아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입니다. 이 당시 어떻게 보면 이방인보다 더 outsider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있을수 없는 엉뚱한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행여나 끝까지 들어봅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교사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제가 요즘 자주 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만갑’이라는 프로그램인데 탈북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북의 소식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약자로 ‘이만갑’입니다.

얼마전에 본 프로그램에서는 오빠와 여동생이 함께 나왔습니다. 오빠는 한쪽 손과 발이 의수 의족인 사람이었습니다. 한 발로 중국을 거쳐 라오스에 도착한 후 한국으로 오는 길이 너무도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빠가 손과 발을 잃게 된 경위가 있습니다. 기차에서 떨어져서 손과 발이 짤려 나갔습니다. 이를 동생이 보았는데 동생은 오빠를 붙들고 마구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빠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잠시 후 사마리아인이 나타났는데 군인들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지혈을 시키고는 군인 병원에 데려고 가서 겨우 손과 발의 피를 멈추게 해서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아마 이들 마음 속에는 이북 군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이남에 내려와서도 변하지 않았을줄 압니다. 참으로 훌륭한 군인들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35절 말씀입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수는 율법교사에게는 있을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무시하는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서 주막에 데리고 간 것도 기가 막힌데 그것도 부족해서 끝까지 돕고 있다니 정말로 치가 떨릴 정도였을 것입니다. 율법과는 거리가 가장 멀어 보이는 자가 가장 율법의 핵심을 삶으로 살고 있다는 멧세지인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젊잖게 묻습니다. 36절 말씀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답변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율법을 모르는 것 같이 생각되던 사마리아인이 바로 율법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율법은 모를지언정 두 가지 율법을 이미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하다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율법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이대로 이미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이 말씀은 율법교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들에게 역습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요?

다시 탈북자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도 만일 군인이었더라면 아마 이북군인들처럼 했을줄 압니다. 팔 다리가 짤린 청년을 군인 병원에 데려가서 살리게 했을 것입니다. 곧 우리도 주막까지는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역습을 하는 말씀은 그 다음 말씀입니다. 35절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주막에만 데려다 주면 뭐합니까? 그 다음에는 또다시 길바닥에 나가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이…. 사마리아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강도 만난 자의 육신적 치료만 생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의 인생을 본 사람입니다. 귀한 목적을 안고 태어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냥 길바닥에서 쓰러져 죽는다면 이는 인류를 위한 큰 손해이자 이는 하나님에게도 큰 손해가 끼치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이 분의 인생이 온전히 회복되어야 함을 잘 알았습니다. 아니 회복을 넘어 아직도 그 안에 잠자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이 꽃을 피워야 함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오는 길에 주막에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만일 더 치료비가 들었더라면 자기의 모든 것을 털어서라도 온전케 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자기가 쏟아부은 정성보다는 그 안에 내재해 있는 것들은 돈으로 환산할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강도 만난 자 안에는 인류를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 숨겨져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교수형을 당한 본 회퍼를 잘 아실줄 압니다.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친지에게 보냈습니다.

“감옥의 삶은 대강절과 비교될수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우리는 기다립니다.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 저것을 시도합니다. 아무런 결실도 없습니다. 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은 단지 밖에서만 열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도 감옥에 갇혀 있는 자도 모두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수 없습니다. 단지 기다리고 바랄수밖에…. 그들은 안에서 문을 열수 없습니다. 단지 밖에서만이….

 

사마리아인은 대강절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밖에서…. 진정한 이웃은 밖에서 문을 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위한 대강절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대강절은 두 달 이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도 만난 자들을 위한 대강절의 선물이 될수 있습니다. 바로 크리스마스를 이웃과 함께 누릴수 있습니다. 이웃으로 하여금 최고의 인생을 살도록 밖에서 문을 열어준다면 말입니다. 밖에서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이 바로 자비를 베푼 자들입니다.

 

최근에 전 세계에는 피난민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씨리아를 탈출한 많은 사람들이 유롭을 향하여 무작정 떠나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독일이 80만명의 피난민들을 받겠다는 정책을 세웠습니다.

피난민이 생기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한 나라가 80만명씩이나 받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씨리아 피난민들이 독일 국경까지 가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강절의 희망이 생겼습니다. 어떻게든 독일에 도착하면 된다는 희망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들 주위에 대강절의 기다림 가운데 있는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요? 혼자서는 열수 없는 문 앞에서 언젠가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나이 많은 어르신일수 있습니다. 학생들일수가 있습니다. 나이 어린 아이일수도 있습니다.

주위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사마리아 인으로 우리를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닫힌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결코 열수 없는 문을 밖에서 여셨습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최고의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 최고의 삶 중에 최고의 삶은 바로 우리도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웃을 위한 문의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자비의 열쇠를 마음껏 사용하십시다. 우리로 인해서 아인슈타인, 쇼팽, 위고, 스티브 잡스가 닫힌 문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2001년 9월 11일을 모두 기억하실줄 압니다. 그 날 World Trade Center 104층에서 일하는  Sandler O’Neill & Partners 투자은행 직원 66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회사에서는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순직한 직원의 자녀들의 대학 학자금을 모두 내 주기로 하고 foundation 을 만들었습니다.

14년이 지난 현재 54명의 자녀들이 대학을 마쳤으며 22명의 자녀들이 곧 그 혜택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가장 어린 자녀가 14년 전, 9/11 당시에 출생한지 6주 된 자녀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나이는 정확히14세 하고 두 달입니다. 이 자녀가 8-10년 안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이 foundation은 문을 닫게 됩니다.

그런데 76명의 자녀들의 삶 그리고 또 그들의 자녀들의 삶을 통해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계속 열매를 맺게 될줄 압니다.

이 회사의 책임자 중 한 사람에게 기자가 물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냐고…. 그 분의 대답입니다.

“Because we believed that what we did would echo for a hundred years in the families of our people, their kids and their grandkids. Because how we conducted ourselves in those first few hours and days would define who we really were and what we were about.”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이 앞으로 수백년 간 우리들의 가정에 그리고 순직한 회사원의 자녀와 손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첫 몇 시간 아니 몇 일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자녀들을 위한 대강절의 선물이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오늘 아니 이번 가을을 어떻게 사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진정한 이웃이 되십시다. 이웃의 닫힌 문을 열어주십시다. 우리만이 열수 있는 문들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사마리아인으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의 문을 열어 주신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함께 대답하십시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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