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프란시스 교황이 미국을 방문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백악관과 UN 그리고 미국 국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국회 방문시 재미있는 일화가 생겼습니다.
밥 브래디(펜실베이니아) 하원의원이 교황이 연설하는 동안 물을 서너 차례 마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 순간 물컵이 교황을 기억할 만한 어떤 중요한 물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황의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이 끝난 직후 장내가 어수선한 틈을 타 재빠르게 연단으로 올라갔습니다. 브래디 의원은 물컵을 몰래 들고 자신의 방으로 간 뒤, 아내와 참모 등과 함께 남은 물을 조금씩 나눠 마셨습니다.당시 방 안에는 밥 케이시(펜실베이니아) 상원의원 부부 등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물은 마시지 않은 채 손가락만 담갔습니다. 이후 브래디 의원은 자신이 물을 마시는 사진과 아내 등에게 직접 물을 먹여주는 사진 등을 직접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자에게 말하기를 “교황이 만진 물건은 모두 축복받은 것”이라면서 “교황의 물컵을 펜실베이니아 자택에 잘 보관해 가보로 삼고 이를 손자들에게 대대손손 물려줄 것”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한편 이 기사를 읽고 교황이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벌떼 처럼 몰려 들어 교황이 만든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상원의원 하원의원 할 것없이 말입니다. 만일 밥 브래디 하원의원이 교황이 만든 것을 차지했을 때 그는 또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교황이 만든 것은 성스러운 것.”
교황이 만든 것이 성스러운 것이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어떨까요? 오늘 시인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성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산 사람인 것 같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궁창을 만드셨고 그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담겨져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시인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2-4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오래 전에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었는데 늘 밤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생각이 납니다. ‘우주는 감상하는 자의 것.’
그 생각을 하면서 밤 하늘을 바라 보면 정말로 시가 떠오를듯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조 세계를 감상하고 있습니다. 감상하다 보니 시상이 떠 올랐습니다. 그리고 써 내려갑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최근에 NASA에서 획기적인 사실을 밝혔습니다. 화성에 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 냈습니다.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사진으로 포착했습니다. 이제 NASA는 더 열기를 띄고 화성 연구 내지 탐색을 계속할줄 압니다. 물론 화성탐색이 인류사회에 여러모로 공헌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식으로 공헌하게 될지는 저는 알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만일 제가 NASA책임자라면 앞으로 화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뽑을 때 이것을 먼저 보고 뽑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별을 연구하기 전에 별을 감상할줄 아는가?’
감상할줄 모르는 자들이 별을 연구할 때 도리어 인류 사회에 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요즘 테러리스트들의 공통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지 못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테러리스트들이 되어 가는게 아닙니까? 인간의 아름다움을 안다면 그런 테러를 범행할리가 있겠습니까?
자연도 매한 가지가 아닐까요? 자연을 감상하지 못하는 자들이 연구한다면 그 결과는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지 않을까요?
오늘의 시인은 자연을 우주를 감상할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자신의 감상을 시로 표현합니다. 4절 하반절 이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하나님께서 해를 만드시고 해를 위하여 집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연구하는 자는 이런 표현을 할수 없습니다. 우주를 감상하는 자이기에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시인과 더불어 우주를 감상해 볼까요? 5절 말씀입니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어떤 장면이 연상됩니까? 결혼식의 한 장면입니다. 아침이 시작됨과 더불어 하나님이 외치십니다. “신랑 입장.”
이에 하나님의 명령에 맞추어서 신랑은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 기뻐서 뛰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장사와 같습니다. 그런데 신부를 향하여 뛰는 모습에서 무진장한 에너지가 창출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결혼식은 매일 아침 반복됩니다. 매일 아침 신랑되는 태양은 뛰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오늘 과학을 좀 아는 사람들에게는 코 웃음밖에 나올수가 없는 표현입니다. 아마 요즘은 유치원생도 더 어린 아이들도 다 알줄 압니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을….
이는 모두 우주를 연구하는 자들로 세상은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인 사고 좋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우주를 감상하는 모습은 잃게 되었습니다.
연구만 하고 감상하지 못할 때 어떻게 된다구요? 테러리스트가 되어 갑니다. 우주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입니다. 우주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주에 테러를 한만큼 우주가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않을까요? 그래서 요즘 환경보호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구요. 그러면 최고의 환경보호운동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주를 감상도 하고 연구도 하는 것일줄 압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하면 우주를 감상도 하고 연구도 할수 있을까? 감상하는 자들만 연구를 하여야 한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이 질문에 시인은 놀라운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7, 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갑자기 생뚱맞게 태양과 우주에 대하여 말하다가 율법으로 주제를 바꿀까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우주를 감상할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자들이 바로 우주를 연구할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Kant와 CS Lewis는 각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먼저 CS Lewis의 말입니다.
“나는 이 시가 시편 중에서 제일 훌륭한 시라고 생각한다. 아니 세상에서 제일 가는 가사이다.” 이를 칸트는 더 정교하게 표현합니다.
“별이 수 놓은 밤하늘과 우리들의 가슴에 담겨진 율법적 규례가 우리들을 놀라움과 경이감으로 가득 차게 한다.”
우주를 감상함으로만이 우리들의 가슴에 경이감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있을 때 경이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이감을 갖고 연구를 할 때 더욱 놀라운 경이감이 우리를 압도하지 않을까요?
다시 시인의 표현을 생각하면 정말로 놀랍습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신랑의 모습으로 본다는 것은 너무도 놀라운 상상력입니다. 그리고 그 해는 하루 종일 최선을 다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이런 상상력이 생겼을리 없습니다. 말씀 가운데서 이런 멋진 시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Eugene Peterson이라는 유명한 저술가요 목회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유대교의 전통을 통해서 깨달은 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유대교에서 하루의 시작은 저녁인 것을 잘 아실줄 압니다. 창세기 1장에 창조이야기에 보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가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왜 저녁이 되는 것을 강조할까요? 저녁에 인간은 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새 날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자 밤새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쉬게 하셨습니다. 아니 태양을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다 준비가 되면 아침마다 태양을 신랑으로 꾸며서 땅 위를 날게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말씀 가운데서 우주를 감상하니 이런 멋진 시를 쓰게 된 것이 아닐까요?
요즘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구의 날도 선포하고 난리를 피웁니다만, 물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지구가 보전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잠기면서 우주를 바라 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자들만이 지구를 보전할수 있습니다. 또한 우주를 바라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꿀 맛이 되어 우리를 찾아 오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시인은 10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우주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경이로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곧 말씀은 경이 그 자체입니다. 이 두 가지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경이롭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시인의 고백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은 이 시인의 모습을 보시면서 어떠실까요? 하나님도 경이로움 가운데 잠겨드시지 않으실까요?
당신이 만드신 자연과 당신의 말씀으로 인해 경이로움 가운데 잠겨 있는 시인을 보시면서 하나님도 경이감에 젖어 들어 가실줄 압니다.
그런데 주님이야말로 자연과 말씀의 경이감에 사로잡히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자주 자주 자연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도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말씀을 거둡니다.
적과 흙의 저자 스땅달이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오의 무덤이 있는 어느 큰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어느 유명한 화가의 그림 앞에 서게 되는 순간 기절을 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체험을 표현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본 후 나는 그들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황홀경에 접어 들어 갔습니다. 거룩한 아름다움 가운데 빠져들어 가면서 나는 최상의 감격을 느꼈습니다. 나의 영혼을 향한 최고의 외침을 느꼈습니다. ”
그 후로 종종 예술작품을 보다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면 이를 스땅달 신드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작품을 통해서 스땅달 신드롬이 종종 생기곤 하는데 하나님의 자연 세계 앞에서는 어떨까요?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주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스땅달 신드롬에 빠져들어 간 것 같습니다. 우리도 모두 시인의 노래에 동참하십시다.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