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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세상(마태복음 20:1-16) 10/11/2015

 

지난 주일은 정의 평화 환경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우주를 감상할줄 아는 사람이 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리고자 했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시간상 생략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아들 준석이가 아직 걸음마를 시작하기 전입니다. 그래서 늘 안고 다니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준석이를 안고 집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였습니다. 눈 앞에 예쁜 수선화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몸을 숙여 준석이의 눈 높이에 수선화를 맞추어 주었습니다. 신기한 듯 아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이를 표하게끔 태어났구나를 금방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다음 언젠가 가까운 바닷가에 갔습니다. 처음으로 준석이가 바다를 보는 날이었습니다. 안고 바다를 보여주니 순간 수선화를 보았을 때와 비슷하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역시 자연과 인간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을 또다시 느껴 보았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떨까요? 요즘도 꽃과 바다 등 자연을 보면 어릴 때의 그 환한 웃음을 안고 바라 볼까요?

요즘은 온 가족이 차를 타고 가다가 경치가 좋은 곳에 이르러서 집사람이 경치를 보라고 하면 “알았어”하고는 고개를 쳐들자마자 다시 원래 자세로 재빨리 돌아 갑니다.

 

준석이가 자연세계를 즐기던 안 즐기던 우리 모두는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자연 세계를 경이롭게 만드셨다는 것을….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는 자연 세계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자연이라는 공간적 세계를 만드셨고, 아울러 시간적 세계도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자연세계만 경이롭게 만드셨을까요? 시간적 세계는 경이롭게 만드시지 않으셨나요?

우리도 어느새 시간 안에 경이롭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은채 살고 있지는 않나요? 하나님께서는 시간 안에서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주 설교의 주제 중 하나가 ‘경이’인데 정말로 주님의 비유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예술작품 그 자체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기법이 하나 있는데 역설적(paradoxical) 내용이 짧은 글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독자들을 마음 놓게 하다가 갑자기 허를 찌릅니다. 자 그러면 오늘의 비유에는 어떤 경이로운 내용이 담겨져 있는지 살펴 볼까요? 1절 말씀입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천국은 바로 집 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듣는 청중은 귀가 솔깃해집니다. 보통 집주인이 아닙니다. 몸소 이른 아침에 일꾼을 부르러 직접 나갔으니 말입니다. 아주 특별한 주인으로 여기고 더 열심히 청중은 귀를 기울였을줄 압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집주인이 직접 약속까지 합니다. 한 데나리온씩…. 한 데나리온은 이 당시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더 많이 받는 것은 아니지만 매니저가 아니고 집 주인이 직접 약속을 했으니 마음이 뿌듯했을줄 압니다. 그것보다 더 마음이 놓인 것은 아침 일찍 집 주인이 직접 나왔으니 이런 집주인이라면 얼마든지 기쁨으로 일을 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기쁨으로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비유를 들으면서 청중들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맞어.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집주인은 바로 저런 사람들이야.” 계속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 삼시는 오전 아홉시입니다. 오전 아홉시에 주인은 또 장터에 나가 보았습니다. 아마도 일손이 더 필요해서 나갔을 것입니다. 다행히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또 고용합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진 않습니다. “상당하게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곧 일한만큼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들은 한 데나리온은 안 되더라도 만족한듯 감사한 마음으로 일터로 향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육시는 낮 열두시 제 구시는 오후 세시입니다. 곧 두 번 더 나가 보았는데 그 때도 장터에서 노는 사람들을 보고는 일터로 데리고 옵니다. 여기까지 보면 집주인을 보는 생각이 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집주인은 일손이 부족해서 장터에 나가서 일꾼을 데리고 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불경기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주인 같습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또 나가고 또 나갑니다. 그리고 상당하게 주겠다고 하면서 고용합니다. 얼마나 사려깊은 주인입니까?

청중은 아주 신나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 당시 돈많은 부자들이 고용은 안 하고 자기 배만 불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예수의 말에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청중들은 뒤로 넘어 갑니다. 제 11시는 오후 다섯시입니다. 오후 다섯시이면 이제 모든 일을 파장할 시간입니다. 기껏일을 해도 한 시간이나 할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장터에 나와 놀고 있는 사람들을 고용한다는 것은 정말로 완전히 자기 희생적인 주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아무리 단순한 노동이라고 해도 처음 가면 그곳 상황도 알아야 하고 일도 좀 익숙해 져야 합니다. 한 시간 이상은 지나야 조금 감을 잡고 일손이 잡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 주인은 자기를 위해서 고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놀고 있는 일꾼들을 위함입니다. 일꾼들은 일만 배우기만 하고 돈을 받는 셈이 되었습니다.

청중들 사이에는 술렁일 것입니다. 좋은 뜻으로…. “정말로 이런 주인들이 필요해. 아니 이런 주인들이 있지 않을지라도 이런 말을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한 때이지.” 예수를 최고의 스승으로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을줄 압니다. 청중들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 예수님은 계속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늘 예상을 뒤엎던 집주인은 계속해서 예상을 뒤 엎습니다. 보통 같으면 제일 먼저 온 사람부터 주는데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주라고 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오후 다섯시에 온 사람들은 손에 쥐어진 한 데나리온을 받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눈이 똥그래졌을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에게 약속되어진 것은 일한 것에 대한 상당한 댓가였습니다. 상당한 댓가가 하루 종일 일해야만 받는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어떤 착한 일꾼은 매니저가 잘 못 준 것이 아닌가 하고 주인에게 가져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것이 상당한 액수의 품삯이라고 하니 눈이 동그래진채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차례로 오후 세시에 온 사람들 그리고 12시 그리고 아홉시, 그리고 아침 일찍 아마 6시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들을 부르면서 매니저가 지급을 해줍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은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여기서 먼저 온 자들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오후 5시에 온 사람들보다 먼저 온 사람들을 뜻할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11, 12절 말씀을 보면,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들의 원망을 살피면 분명히 새벽에 온 사람들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들은 눈이 찌푸러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은 불평을 안 했다고 볼수도 없습니다. 9시 12시 3시에 온 사람들은 불만이 있을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습니다. 5시에 와서 자기들 처럼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불만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새벽에 와서 자기들 처럼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넘어 갈만 합니다. 이들은 어떤 이는 눈이 똥그래져있고 또 어떤 이는 찌푸러져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의 결론을 내립니다. 13절 이하 말씀입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청중은 갑자기 쥐죽은 듯 침묵이 흐릅니다. 자기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고 희생적으로 일꾼들을 불러 온 것은 너무도 본받을만하고 존경스러운데 그래도 원칙은 지켜야 하는데 자기들이 생각하는 원칙에서 너무도 벗어 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말이 더 놀랍습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자기의 억지가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원칙에 따르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도저히 이런 사람에게 잠시라도 희망을 걸었던 것을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막 후회하고 있는데 마지막 쐐기를 박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청중은 부자들을 향하여 주먹을 불끈 쥐었던 것은 풀고 이제는 예수에 대해서 주먹을 불끈 쥔채 그 자리를 떠납니다.

 

지난주 소그룹 인도자 교육시 잠시 나눈 것이 있습니다. Richard Rohr라는 유명한 천주교 영성가가 인용한 글을 나눴습니다. 그 분이 당신의 책에 심리학자 콜버그의 도덕 발달 단계를 인용합니다.

콜버그는(Kohlberg’s stages of moral development) 6개 인간의 도덕성 발달 단계가 있다고 말하는데 대개가 사람은 2, 3 단계까지 간다고 말을 합니다. 4단계 5단계까지 가는 사람도 극히 드문 반면 6단계는 예수님의 단계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은 대개 자기가 속한 단계까지만 이해하고 자기보다 한 단계 높아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곧 2단계 사람이 3단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6단계에 속한 예수님의 도덕 단계를 그 누가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비유에서도 예수님과 청중의 단계 차이가 뚜렷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6단계에 계시고 청중은 많은 사람이 2단계 기껏 가야 3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알고 있으니 귀를 기울일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비유를 듣고 많은 청중이 주먹을 불끈 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뿔뿔이 헤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쥔채 집으로 향하지만 어떤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주님의 말씀이 머리에 남아 맴돌기 시작합니다.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예수님의 선함은 때로는 자기들의 잣대로 판단할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자기는 2, 3 단계 정도밖에 안 되기에 6단계에 계신 주님을 이해하지 못할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주님의 말씀이 멀리서 메아리치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금방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나중 된 자들은 모든 것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 봅니다. 동그레진 눈으로 바라봅니다. 제일 늦게 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이 들은 이 놀라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세상 역사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 봅니다.

그는 무릎을 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만 경이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계시는 온 세상역사는 경이로운 세계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세상 역사가 경이롭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기들의 짧은 잣대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눈이 찌푸린채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하기 시작한 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비유의 말씀도 2000년전 유대인을 향한 비유만이 아닙니다. 세상 역사를 보는 눈이 고정되어 있는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들리는 세상 역사가 문제가 아니라 세상 역사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보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임을 밝히는 주님의 눈물 겨운 비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대로 세상 역사를 예측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어느덧 먼저 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눈은 찌푸러져 있습니다. 결국 먼저 되었기에 나중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를 자기의 계산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은 도리어 나중 된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잣대로 세상 역사를 보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진 놀라운 경이로운 역사로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세상 역사에서 먼저 되는 자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제가 대학 시절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그 때 한 경직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설교중 늘 저의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타임지의 기사를 가지고 말씀하셨는데 어느 해를 마치면서 어느 기고가가 쓴 글을 소개합니다. 일년을 마치는 12월달 타임지에 다음해를 예측하는 글을 썼다고 합니다. 일년이 지난 후 기고가의 글을 다시 꺼내 보니 전혀 그가 예측했던대로 일은 펼쳐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경이로운 역사를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우수꽝스러운지를 말씀하셨던 것이 종종 기억이 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작년에 예상한대로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나중될 때가 올 것입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역사에서 먼저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나중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먼저 된 자로서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가 감상하는 자의 것이듯이 세상 역사는 경이로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 역사 한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주를 감상할줄 아는 자만 우주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세상사를 경이감의 눈으로 볼 줄 아는 자들만이 역사학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 역사가 이처럼 경이로움으로 가득차 있는데 주님의 몸된 교회는 어떨까요? 경이 그 자체가 아닐까요?

교회는 연구 대상이 아닙니다. 경이의 대상입니다. 경이롭게 교회를 바라보며 섬기는 자들이 바로 나중 된 자 같으나 먼저 된 자들입니다. 때로는 교회가 세상적으로는 여러모로 뒤쳐지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경이로 가득찬 곳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특별히 은퇴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세 분 모두 교회를 경이감을 가지고 섬기셨던 분들입니다. 세 분을 본받아 경이감을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덧 십자가에 달리신 신비스러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인도의 시성 타골은 아름답게 핀 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 꽃들을 이처럼 끝없는 엑스타시로 몰아 넣고 있는 샘은 과연 어디 숨어 있나?”

자연세계를 경이감을 가지고 대하는 타골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시입니다.

 

세상 역사를 경이감을 가지고 대할 때 비슷한 시가 탄생되지 않을까요?

“세상사를 끝없는 엑스타시로 몰아 넣고 있는 샘은 과연 어디 숨어 있나?”

 

교우 여러분,

매일 매일의 생활속에 이 샘은 숨어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 매일 우리들을 위해 한 데나리온을 준비해 두십니다. 5시에 온 우리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잣대를 버리고 경이감으로 세상을 바라 볼 때 깊은 곳에 숨어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한편 세상 주관자들의 관점에서는 초라하게 보이는 교회이지만 사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지금도 인류 역사의 최고로 경이로운 일들을 펼쳐 가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잣대가 아니라 경이로운 눈으로 교회를 보는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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