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인적이 드문 한산한 거리에서 큰 가방을 든 한 부부가 택시를 세웠습니다.
“아저씨, 여기서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가 주세요.”
사십대 초반쯤 돼 보이는 여자의 말에 그 택시 운전사는 백미러로 그들을 쳐다 보았습니다.
“여보, 지금 당장 당신을 집으로 모셔 가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아내는 미안한 듯 곁에 앉은 남편에게 말합니다.
“아냐. 내가 더 미안하지.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 꼭 5년만이군. 그동안 아이들은 많이 자랐겠지?”
남편은 더욱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네 지영이와 성민이가 벌써 중학생이 됐어요. 하지만 여보. 아이들이 좀더 자라서 당신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만 기다려줘요.”
“당연하지. 난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할거야. 뭐든지 말만 해요 여보.”
남편은 미안해 하는 아내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유럽에서 6년 동안 유학을 다녀오신 거예요. 우선 따뜻한 물로 목욕한 뒤 푹 주무세요. 그러는 동안 제가 나가서 당신이 갈아입을 옷을 사 오겠어요. 그런 다음 편하게 식사를 하고 아이들의 선물을 사서 저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면 돼요.”
그러자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고개만 끄덕거렸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택시 운전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호텔로 향하던 중 운전사는 작은 슈퍼 앞에 잠깐 차를 세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시죠.”
영문을 모르는 부부를 남겨두고 그는 슈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두부를 한 모 사 가지고 와서 차 안에 있는 그 부부에게 내밀었습니다.
“잠시 이곳에 차를 세워둘테니. 이것 좀 드시고 가세요.”
갑작스런 운전사의 행동에 두 사람은 놀란 빛을 감추지 못하고 운전사가 전해주는 두부를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숙이면서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라고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두부를 받아든 두 사람을 남겨두고 운전사는 잠시 택시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밖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기도 합니다. 그의 눈에는 이내 눈물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그도 몇 년 전에 교도소 앞에서 두부 한 모를 사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김학중 목사님이 지은 ‘아내의 말 한마디가 남편의 인생을 결정한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6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나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의 눈물 겨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픽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픽션이건 아니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게 보셔서 돕는 배필을 지을 계획을 세웁니다. 얼뜻 보면 혼자 사는 것이 고독해 보여서 돕는 배필을 만드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독한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생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좋지 아니하니’와 ‘고독’은 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렇게만 단정 짓기는 좀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을 허락하셨을까요? 돕는 배필이 주는 의미는 고독을 해소시키는 것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아담에게 주어진 일을 돕기 위해서가 더 강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아담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좋다’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는 ‘토브’인데, ‘좋다’ 하면 생각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6일간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창조하신 후 매일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3, 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것이 첫째날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창조하신 날이 6일째라는 것을 잘 아실줄 압니다. 6일째 사람까지 창조하신 후 어떻게 말씀하셨죠? 창세기 1:3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의 창조는 ‘토브’, good입니다. 한편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는 곧 여섯째 날에는 good이 아니라 best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속성을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 창조를 진행시키신 이유는 바로 창조는 good인데 good에서 best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그런데 언제 완성되었느냐 사람이 창조됨과 아울러 1차적인 완성이 된 것입니다. good에서 best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창조는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본문 말씀이 담긴 2장에서는 사람의 창조 이야기에 대해서 특별히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 말씀은 아직 아담 혼자만 창조되었을 때부터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반면 창세기 1장에는 이미 아담과 하와가 함께 창조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더라’ 생각하신 것은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후입니다. 반면 2장에서는 도리어 ‘좋지 않다’ 생각하십니다. 아직 아담이 혼자이기 때문에… 그러면 왜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후에야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셨을까요?
자 그러면 잠시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시기 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지금 아담은 혼자입니다. 아직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일단 하나님께서는 기왕 만든 아담에게 당신의 창조세계를 맡겨 보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담도 썩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good에서 best로 향하여 가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좀 부족함을 스스로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하나님은 창조자이시자 외과의사가 되셨습니다. 갈비뼈를 빼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갈비뼈로 만든 하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옵니다. 하나님은 큰 결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당신의 창조가 the best로 진행이 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대 수술을 감행하셔야 하셨습니다. 대 수술을 마친후 아담에게 하와를 데리고 갑니다. 하나님은 조마조마하셨을 것입니다. 아담이 어떻게 반응할지 이에 아담이 여자를 보고 말합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은 한 시름을 놓으십니다. 이 아담의 노래는 둘로 나눌수 있는데, 먼저 아담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아담은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자 최고의 외과의사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칭찬을 듣고 하나님은 아주 좋으셨을줄 압니다. 그런데 더 깜짝 놀라는 고백을 합니다.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히브리어로 남자는 ‘잇쉬’입니다. 여자는 ‘잇슈아’입니다. 곧 ‘‘잇쉬’에서 취하였은즉 ‘잇슈아’라 하리라’ 입니다.
여기에 아담의 놀라운 고백이 있습니다. ‘윗시’의 갈비뼈를 빼서 만들었는데 ‘윗슈아’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동등하다는 의미입니다. ‘윗시’나 ‘위슈아’는 자음은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모음만 바뀐 것입니다. 어떤 다른 의미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한자와 비교해 보면 아담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스크린)
남자의 男은 위가 밭 ‘전’이고 아래가 힘 ‘역’, 곧 밭에서 힘을 쓰는 사람이 남자입니다. 반대로 여자의 女는 계집 여 아닙니까?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느낌이 확 들지 않습니까? 한자가 좋은 것도 많이 있지만 여기에는 히브리어를 따라 오지 못합니다. 아니 아담의 지혜를 따라 오지 못합니다. 아담은 자기와 하와를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요. 만일 아담이 자기 갈비뼈에서 하와가 나왔다고 자기보다 낮게 보거나 깔보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수술이 잘 못 된거죠. 그냥 아담 혼자서 온 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백배 좋았겠죠.
그런데 아담이 고백합니다. “잇쉬에서 나왔은즉 잇슈아라 하리라.” 자기와 하와는 동격이고 파트너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신 후 하나님은 심히 좋으셨을줄 압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최고의 선물을 하십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한 몸이 되게 하는 축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고독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하셨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고독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사실 아담은 이 엄청난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good에서 best로 향하는 기가 막힌 창조세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서는 이 멋진 일을 하는데 뭔가 부족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갈비뼈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분신인 하와를 보자 함께 이 멋진 세계를 최고의 작품으로 만드는 자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이 하와는 다름 아닌 돕는 배필임을 금방 알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한 것입니다.
“잇쉬에서 나왔은즉 잇슈아라 하리라.” 이제 둘이 한 몸이 되어서 good을 best로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동등하지 못하면 어떻게 한 몸이 될수 있겠습니까? 동등한 자가 되어 한 몸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수 있겠습니까?
이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반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과 하와에게 큰 기대를 겁니다. 둘이 하나가 되어 창조세계를 good에서 best로 멋지게 가꿀 것을 기대하면서 노래하신 것입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아담과 하와를 향한 응원의 노래인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온 세계가 신비롭게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세계를 꿈꾸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대 성공입니다. 아담은 하나 되기를 원하는 깊은 마음을 소유한 최고의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 되기를 사모하는 아담이기에 하와를 향하여 최고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과 하와에게 당신의 창조세계를 맡기는 도장을 찍으시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물론 아담과 하와는 이에 실패합니다.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먼 훗날 제2의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노래는 완성됩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후회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것을 그리고 지금은 우리들을 만드신 것을….
지금도 우리를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사실 오늘 부부청년부 헌신예배로 드리는데 마치 부부가 되어야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제 하나님 보시기에 누구나 다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혼자서 그 위대한 역사에 공헌자로 부르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부가 되어 그 위대한 사역의 동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한편 오늘은 후자들을 위한 헌신예배로 드리는 것입니다.
부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부부가 하나가 되어 날마다 good에서 best가 되어가고 삶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먼저 두 부부의 관계가 good에서 best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첫날에서 시작하여 여섯째날까지 가면서 best가 되어 간 것처럼 부부의 관계도 good에서 best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고 best가 되어가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일을 맡기셨듯이 각 가정에게 하나님께서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특별히 자연을 관리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 우리는 good에서 best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 세계가 best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로 인해서 이 세상에는 좋은 일들이 마구 쏟아져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덧 하나님께서는 심히 좋았더라 표정을 짓는 것을 느끼시게 될줄 압니다.
부부청년부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씀을 거둡니다.
중국의 세설신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안이 말합니다. “자네 장인 어른 말인데, 모친 돌아가셨을 때는 제문(죽은 사람에 대하여 애도의 뜻을 나타낸 글)을 손수 짓더니 부친 돌아가셨을 때는 안 짓던데, 무슨 까닭인가?
육퇴가 말합니다. “남자야 평생 하는 일을 통하여 그 업적이 드러나지만 여자의 미덕은 제문 아니면 드러나지 못하니까 손수 그리하신 것일 테지요.”
제가 한자로는 남자와 여자가 공평한 뜻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무리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육퇴의 장인과 같은 사람처럼만 산다면 말입니다. 육퇴의 장인은 어머니의 위대함을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위대함은 생전에 드러나지 않았기에 제문을 몸소 지어서 어머니를 높인 것입니다.
아마 육퇴의 장인의 부모님은 서로 동등한 가운데 세상 역사에 놀라운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자기들이 사는 문화에 거슬려서 세상 역사를 good에서 best로 가꾸어 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아름다운 돕는 배필이었던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 되십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십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면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성경은 말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잇쉬에게서 취하였은즉 잇슈아라 부르리라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