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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느헤미야 1:1-11) 11/22/2015

 

하루는 앵무새가 어느 상점에 들어 와서 점원에게 말합니다.

“포도 있어요?”

“없어.”

앵무새는 웃으면서 상점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에 앵무새가 다시 들어 오면서 말합니다.

“포도 있어요?”

“아니. 15분 전에 벌써 말했잖니.”

앵무새는 다시 웃으면서 나갑니다. 십 분 후에 다시 들어 오면서 말합니다.

“포도 있어요?”

점원은 신경질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꺼야! 다시 들어 오기만 하면 발에 못을 박아 버릴거야!”

앵무새는 다시 웃으면서 나갑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앵무새가 또 들어 오면서 묻습니다.

“못 있어요?”

“아니.”

“잘 됐네요. 포도 있어요?”

 

앵무새가 어디선가 말을 배웠나 봅니다.

“포도 있어요?” 이 말을 자꾸 하고 싶은데 할 사람은 점원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상점 점원을 귀찮게 굴고 있습니다.

 

추수 감사주일이자 창립62주년 예배 설교 서두에 엉뚱하게 앵무새 이야기를 먼저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감사주일을 맞아 잊혀진 감사의 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개인의 감사의 제목, 가정의 감사의 제목 특히 오늘은 창립 기념 주일인만큼 교회적인 감사의 제목을 찾아 마음껏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좀 다른 각도에서 감사 주일이자 창립주일 설교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우리는 앵무새처럼 감사를 하고 있지 않은 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입으로만 앵무새처럼 감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실 주님은 ‘앵무새 감사’를 누구 보다 잘 구별하실줄 압니다. 그래서 그런지 산상수훈(마태복음 7: 21)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결국 주님은 입으로 “주여 주여”하는 자들을 구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하는 감사도 구별하시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씀이 아닌가요?

 

진정 감사하는 사람의 모습을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가 누구인지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느헤미야는 왕궁에 있던 것으로 보아서 꽤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왕은 페르샤 곧 바사왕국의 다섯번째 왕입니다. 곧 바벨론 포로 시대는 끝났는데 아직도 많은 유대인들이 바사왕국에 살고 있었던 때입니다. 못해도 이민 3대 내지 4대는 되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느헤미야는 이민자의 후손으로서 대단히 성공을 한 셈입니다. 11절 하반절에 보면 왕궁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 알수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이 당시 술 관원은 고급 공무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줄 압니다. 왕에게 드리는 술을 관리하는 일을 아무에게나 맡길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이민 3, 4대만에 고급 공무원의 자리에 올랐으니 성공한 셈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얼마전 중앙 아시아의 고려인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한국 판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듭니다.

때는 1937년 한창 일본이 조선을 합방하고 갖은 박해를 행할 때입니다. 많은 조선인들이 쏘련 땅 연해주에 살았는데 이들은 고려인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고려인들이 일본 사람들과 외모상 구별하기가 어렵고 일본 스파이들이 고려인들 사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민족’이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그 해 8월 21일 소련 지도부는 극동지역의 고려인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집단 이주시킬 것을 결정합니다.

이 결정 후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집합하라는 명령이 하달됩니다. 고려인들은 잠시 어디를 갔다 와야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간단한 복장과 얇은 담요 한 장을 챙겨 들고 물도 챙기지 못한 상태에서 모입니다. 이 때가 9월이었는데 이들을 그대로 기차에 태웁니다. 저녁에 섭씨 5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씨였습니다. 그 중에는 산모들도 있었고 아이를 낳은 지 겨우 며칠 밖에 안 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42일간 기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갑니다.

물도 공급되지 않았고 밤이면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온 몸을 파고 들었습니다. 당시 아이를 낳은 지 5일 밖에 안된 아내와 핏덩어리 아기를 데리고 기차에 올랐던 한 고려인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묻지 말라. 한 때문에 살아남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특히 다음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립니다. 중앙 아시아에 어느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저 아이들을 어떻게 살려냈는지 아오? 기차를 타고 출발한지 한 달이 지나자 한 겨울이 되었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지. 가끔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한밤중에 기차에서 내리라고 했소. 내리라고 하면 그곳이 무덤이었소. 그곳에서 밤을 나기 위해 우리들은 땅굴을 파야 했소. 그런데 도구가 있어야지. 숟가락으로 팠소.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파는 것이 쉽지 않았소. 우리 중에 산모들도 있었소. 그 한 겨울에 땅바닥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이 있었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소. 그들은 ‘우리는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저 아기는 살려야 할 것 아니냐’고 마음을 모았지. 그리고는 할머니 할아버지 10여명이 산모와 아기를 가운데 두고 몸으로 감싸 안았소. 아침이 되니 바깥에 있던 어르신 대여섯 명은 얼어 죽었소. 하지만 그 아기는 살아 남았지. 그렇게 우리가 저 아이들을 살려 내었소.”

 

느헤미야의 조부모와 부모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성경은 전혀 이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느헤미야가 이런 훌륭한 인물이 되기까지는 조부모님과 부모님들의 희생이 있었을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아이들의 모습에서 느헤미야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조부모와 부모의 희생적 사랑 가운데 멀리 이방 땅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부모와 조부모를 향한 깊은 존경을 갖고 살았을줄 압니다. 아울러 하나님께는 한 없는 감사의 마음을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와 조부모를 공경하고 아울러 늘 감사의 삶을 살아서 그런지 사회적으로도 성공합니다. 외국인으로서 고급 공무원이 됩니다. 더 큰 감사의 마음으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게 감사 그 자체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하실지 모릅니다. “꼭 감사를 잘 해야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하는가 감사의 삶을 안 살아도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느헤미야는 감사의 삶을 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어느 날 형제인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는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불 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반응하죠?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어떻게 보면 느헤미야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는 지금 이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왕의 오른팔이 되어 있습니다. 왕의 완전한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조국의 소식을 듣고는 수일 동안 슬퍼하며 울고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를 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느헤미야가 감사의 사람이 아니었더면 어떠했을까요? 남몰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의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삶을 삽니다. 아울러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연결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많은 분들을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느헤미야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국의 소식을 듣습니다. 가슴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고 아울러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그는 울며 금식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또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감사를 많이 하지만 이웃과 좋은 관계를 갖지 않은 사람도 종종 보는데요?” 이런 사람은 열이면 열 앵무새 감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는 앵무새의 감사를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민족의 슬픈 이야기를 듣자 눈물이 홍수가 되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이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곧 진정한 감사의 사람은 동족을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드릴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감사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기도를 깊이 묵상하면 놀라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느끼게 됩니다. 독수리의 정기를 느끼게 됩니다. 기도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다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이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감사를 하는 자들에게서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하는 자들이 능력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순수한 감사를 하는 사람은 독수리의 정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입으로만 감사하는 사람은 앵무새의 정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앵무새가 어떻게 민족을 위해 기도할수 있겠습니까? 민족을 위해 인류를 위해 기도한다면 이미 독수리의 정기를 소유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부터 주어질까요? 삶에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자들에게 독수리의 정기가 주어지지 않을까요?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가슴 아픈 사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작년도 국내 선교위원들과 함께 아메리카 원주민 vision trip을 다녀 왔습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에게 없는 훌륭한 점들이 많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에게는 ‘고아’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가까운 친척이 데려다 기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왜 요즘 인류를 위해 공헌하지 못하는가 참 궁금한 생각이 들어 왔습니다. 한 가지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작년도 방문시 원주민이 만든 달력을 하나 구입해 왔습니다. 11월 달력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Picture1

Thanksgiving Day라는 글씨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다른 날 아니 다른 달에 감사절을 지키나 궁금해서1월부터 한 달 한 달 달력을 넘겨 가 보았습니다. 감사절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 보았는데 이들은 도리어 11월 넷째 목요일을 ‘애도의 날’(Day of Mourning)로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 와서 바벨론이 멸망한 후 바사 왕국에 살게 되었지만 감사할줄 아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 뿐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고려인들은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동 당했지만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그들은 이제는 러시아 선교를 위해서 너무도 큰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원주민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로 그리고 고려인들의 강제 이동과 비슷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만 마약과 도박 그리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그룹이 되었을까요?

어떤 이유이던 감사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기도하긴 커녕 늘 스스로 서지 못하는 자들이 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품기 시작한다면, 온 인류를 위한 민족으로 거듭나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독수리의 기상을 품고 하늘을 날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올해 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우리 한국인과 비슷한 점이 많은 미국 원주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감사를 회복하는 자들이 되게 해달라고….

 

오늘 추수 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독수리는 우리들의 감사를 먹으면서 자랍니다. 우리의 진정한 감사를 통하여 독수리는 커지고 또 커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사도바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번 파리에서 있었던 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사건 현장에 많은 분들이 꽃과 촛불을 켜 놓았는데 어느 아이와 아빠가 그 곳을 방문해서 나눈 대화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전 세계에 퍼진 것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대화가 진행됩니다.

“나쁜 사람들이 총을 가지고 있어요. 총으로 사람들을 죽였어요. 우리는 이사 가야 할지 몰라요.” 아빠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꽃을 가지고 있어.”

“꽃, 꽃이 무슨 힘이 있어요?”

“꽃이 우리를 보호할거야.”

“어떻게 꽃이 우리를 보호해요.”

“우리는 초도 있잖아.”

“초, 초는 무엇을 하는데요.”

“꽃과 초가 우리를 총에서 보호해 줘.”

“이제 안심이 되?”

“예, 꽃과 초가 우리를 보호해 주니 안심이 돼요.”

 

저는 한 가지를 더 넣고 싶습니다.

‘꽃과 초와 감사.’ 이것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아니 우리로 하여금 독수리의 정기를 갖고 살게 합니다. 어떤 악한 세력도 도망 가게 합니다. 그래서 민족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함께 감사의 사람이 되어 민족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독수리의 기도를 하십시다.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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