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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한 해(마가복음 4:30-32) 12/27/2015

 

‘황금 좁쌀의 꿈’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당나라 현종이 황제이던 시절 한 젊은이가 어느 성에 있는 여인숙에 묵게 되었습니다. 마침 도교의 제사장 루웡을 만납니다. 그들은 곧 친해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는 자기 기대치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제사장에게 말합니다.

“사나이가 살려면 굵게 살아야죠. 장군이나 장관이 되든지 아니면 부자가 되어서 인생에서 누릴수 있는 모든 것들을 즐기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 갈 곳조차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너무 고단해 이내 잠에 떨어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여인숙 주인은 좁쌀을 삶고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이야기를 듣고 난 제사장은 그에게 베개를 내밀었습니다.

“내 베개를 베고 자게나. 그러면 자네의 모든 꿈이 이루어질 걸세.” 젊은이는 베개를 받더니 옷 벗는 것도 귀찮다는 듯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곧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꿈 속에서 그는 부자인 추이 가문의 딸과 결혼해 호화스럽게 살았습니다. 이듬해 그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 관리가 되었고 곧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최고위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최고위 관리직을 넘어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빠른 출세는 주위 다른 관리의 시기와 질투를 낳았고, 마침내 그들은 이제 재상이 된 그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부인에게 탄식하며 말합니다.

“오랫동안 나는 돈과 권력을 좇아왔는데, 결국 감옥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 모르겠소. 차라리 남루한 옷을 걸치고 검은 조랑말을 타고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가는 게 더 낫겠소.” 그는 슬픔이 너무 컸기에 자살까지 생각합니다. 다행히 황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사면시켜 멀리 귀양을 보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황제는 그가 겪은 모든 것이 모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다시 재상에 임명하고 전보다도 더 큰 상과 부상을 하사했습니다. 그의 다섯 아들과 열두 명의 손자들은 관리가 되어 더욱더 큰 권세와 부를 쌓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영향력 있는 가문의 여자들과 혼인을 하자 그는 더욱 기뻤습니다. 그는 늙어서도 비옥한 땅과 여러 채의 저택과 값진 말 여러 마리를 소유했으며, 또 아름다운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호화롭게 여생을 보냈고 여든이 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로 이 때 젊은이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여전히 똑같은 여인숙에 루웡 제사장과 같이 있었고 여인숙 주인이 올려 놓은 좁쌀이 여전히 끓고 있었습니다. 이 풍경 안에서 번개처럼 갑작스러운 통찰을 통해 그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젊은이는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여러 가지를 추측할수 있겠습니다만, 처음에 남 보기에 내놓으라 할만한 삶을 살지 못하였기에 풀이 죽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꿈에서 최고의 성공적인 삶을 잠시 맛 본후 깨어났으니 아마도 세상적인 성공도 꿈처럼 지나 간다는 것을 깨달았지 않았을까 생각할수 있습니다.

 

오늘 송년예배로 드립니다. 어떤 마음을 안고 예배에 임하시고 계십니까? 혹시 이 이야기의 젊은이처럼 한 해를 기대치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고 풀이 죽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지는 않으신지요? 바라건대 이 젊은이처럼 귀한 깨달음이 있는 예배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송년예배를 맞이하여 예배드리는 우리에게도 좁쌀처럼 작은 씨앗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겨자씨 비유입니다. 다음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청중들은 들으면서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그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눈에 보일까 말까 하는 겨자씨에 비유해? 못해도 야자수 정도로 큰 나무와 비교해야지.” 어떤 사람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멀리서 들으러 왔으니 더 무슨 말을 하나 기다려 보았을 것입니다. 계속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만큼 되느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의 큰 찔림을 받습니다. 처음 섣불리 실망을 했던 청중은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작은 것이라고 무시하고 거들떠 보지 않고 살았던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기 시작합니다. 아니 그동안 큰 것 아니면 상대하려 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큰 것만 좇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 손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늘 큰 것만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지난 일을 돌이키고자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지금이라도 작은 것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맛보려고 마음을 바꿉니다. 그 때 그들은 놀라운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송년예배를 맞이 하여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겨자씨와 같은 우리들의 삶 안에 놀라운 것이 담겨져 있음을 보게 하심이 아닐까요?

 

올 가을에 저는 어느 분으로부터 아주 귀한 선물을 받은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제가 교인주소록 사이에 책갈피로 사용할 정도입니다. 매일 아침 기도 시간에 교인주소록을 보면서 한 페이지씩 기도를 드리는데 주소록 책갈피로 사용하니 매일 아침 그분의 선물을 제가 즐기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선물인데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겠습니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가 적혀 있는 종이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시가 너무 좋아서 제가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가을날’인데 첫 대목이 저의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어느 가을날, 여름을 생각하면서 쓴 릴케의 시입니다.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서 여름은 위대했음을 고백하는 릴케의 마음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릴케는 여름의 위대함으로 인해서 가을이 있고 그로인해 가을에는 수 많은 열매들이 영글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생각해 보십니다. 릴케가 지난 여름을 위대하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지난 여름을 가만히 놓아 두시겠습니까? 가을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놀랍게 열매를 맺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씀드린대로 이 시의 제목은 ‘가을날’, 어느 가을날 시인은 지난 여름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송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겨자씨를 보여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365일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청중처럼 처음에는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루 24시간 1시간이 60분 그리고 1분이 60초가 되는 시간들을 우리는 하찮게 여겼습니다. 겨자씨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요? 겨자씨의 위대함은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요?

반면 두번째로는 그 작은 시간들을 위대하게 보는 것입니다. 1분 1초를 위대한 시간으로 우리들을 위한 위대한 선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들로 하여금 자라게 하십니다. 끝내 공중의 새가 깃들일 정도로 위대한 작품을 만드십니다.

곧 겨자씨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겨자씨를 통하여 당신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를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 말씀드린 젊은이는 도교의 제사장을 통해서 전도서의 교훈을 받은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교훈을 받고 더 이상 높아질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꿈을 잃은 젊은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겨자씨의 비유로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아니 중국에 겨자씨가 없다면 비슷한 것으로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겨자씨와 같은 교훈을 주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열면 주님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소재를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몇주전 나무의사 우종영씨에 대해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나무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대나무는 마지막에 예쁜 꽃을 피고 삶을 마감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 역사의 마지막도 대나무처럼 화려하게 마쳐 질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서 겨자씨와 비슷한 나무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절대 나무가 자라지 못할 것 같은 곳에서만 뿌리는 내리는 나무들이 있는데 노간주나무가 바로 그런 나무라고 합니다. 흙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바위나 돌 틈에서만 자란다고 합니다. 서울에서는 도봉산 포대능선에서 노간주 나무를 볼 수 있는데 나무가 서 있는 곳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를 볼 때마다 기특하단 생각보다는 바보 같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노간주 나무는 제 코가 석 자면서 남 생각 먼저 하는 놈이라고 그는 표현합니다. 다음의 글을 인용합니다.

“이른 봄 자하문 터널을 지나 인왕산 산자락 상명대 삼거리를 지나 본 적이 있는지. 그곳에 가면 노간주 나무와 함께 진달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노간주나무가 보인다 싶으면 그 옆에서 영락없이 진달래꽃이 얼굴을 들이 밀고 있는거다. 생긴 것도 비슷하지 않은 데 두 나무가 어떻게 무리를 이뤄 한데 자라고 있는 걸까. 그건 다 노간주나무 덕이다. 쉽게 말해 노간주 나무가 진달래를 먹여 살리는 거다.”

(스크린)

이 노간주 나무를 보고 위대함을 생각하지 않을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노간주 나무는 그 어느 나무도 자라기를 원하지 않는 곳에 아니 자라지 못하는 곳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리고는 예쁜 진달래가 그 험한 곳에 자라도록 도와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간주 나무는 보지 않고 진달래만 보면서 아름답다 극찬할줄 압니다. 그러나 진달래가 있기까지는 노간주 나무의 위대함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올해 큰 일을 못 하셨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노간주 나무를 통해서 큰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끔 심은 씨앗은 노간주 나무처럼 버려진 땅에 심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씨앗으로 노간주 나무를 자라게 하십니다. 결국 진달래까지도 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노간주 나무로 인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좁은 곳에 노간주 나무를 자라게 하십니다. 혼자서가 아니라 진달래까지…. 겨자씨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 그리고 노간주 나무를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바로 누구를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겨자씨와 노간주 나무를 통하여 당신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겨자씨와 같은 우리들의 삶을 위대하게 만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지금 이 비유를 과거의 위대함을 생각하면서 말씀하시고 계신가요? 아니면 미래의 위대함을 생각하면서 말씀하시고 계신가요? 아니 달리 표현하면 겨자씨의 비유를 믿는 자들의 과거가 위대해질까요? 미래가 위대해질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어느 장소에서 읽는지에 따라 뉘앙스가 바뀔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비유는 더 그런거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송년예배시 이 말씀을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신년 예배시 이 말씀을 생각한다면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신년 예배시 이 말씀을 상고하게 되면 당연히 미래의 위대함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겨자씨는 미래라는 시간을 통해서 놀랍게 자라 갈 것입니다’라는 멧세지가 주어질 것입니다. 반면 오늘은 송년예배입니다. 같은 말씀이지만 송년예배시 이 말씀을 상고하게 되면 당연히 과거의 위대함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1년이라는 지나간 위대한 시간 안에서 겨자씨는 심기워졌으며 그동안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놀라운 일들이 이미 벌어졌으며 이는 새로운 미래를 여는 너무도 위대한 사건이었음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오늘 송년예배에 하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주신 이유는 이제 알겠습니다. 과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Emerson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Every moment of the year has its own beauty.”

(한 해의 매 순간 순간은 특이한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다.)

 

사실 이 글도 신년에 읽게 되면 미래의 위대함을 노래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송년에 읽게 되면 과거의 위대함을 노래하게 됩니다.

그런데 더 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과거의 위대함을 노래하지 못하는 자들이 미래의 위대함을 노래할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과거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후 자연스럽게 우리는 미래를 노래할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송년 예배를 드린 후 신년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생각해 보십시다. 지난 1년의 위대함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새해의 위대함을 볼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송년예배를 맞이해서 우리에게 겨자씨를 보여주십니다. 한 해의 매 순간 순간이 특이한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더 놀라운 새해를 허락하시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1년 우리는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표어로 삼고 위대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다시 인용했던 성경귀절을 말씀드리면, 요한복음 13: 34, 35절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 한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당신의 보혈로 씻겨 주시고 우리의 말씀대로 산 삶에 당신의 능력을 더해 주시사 놀라운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겨자씨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순종이었지만 점점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고 끝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어 갈 것입니다. 그 그늘에 진달래 꽃이 필 것입니다. 2015년도는 위대한 한 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만큼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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