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때 일입니다. 전쟁터에서 모든 병사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한 종군기자가 죽음의 공포를 가장 많이 느끼고 있던 한 흑인 병사에게 녹음기를 들이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전 세계로 타전되어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대답은,
“Give me tomorrow.”
그 병사는 내일을 희망하였고 내일이 있기만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벌써 1월의 네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1월24일이 되었습니다. 새해 들어 와서 우리에게 주어진 23번째의 내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 속으로 24번째의 내일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내일인 1월 25일을….
흑인 병사는 우리들에게 하루 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내일은 사실 너무도 소중한 선물입니다. 2016년이 2015를 살았던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하듯이 말입니다.
이 소중한 하루 하루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 원하시는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유로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주님은 곧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아시고 계신데 언젠가 하나님에 대한 것을 직설적으로 말씀하실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조금 신학적인 말씀을 드리면 요한복음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I am’입니다. 7번 ‘I am’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만 열거하면, “I am the light.” “I am the bread,” “I am the good shepherd.” 모두 ‘I am”입니다. 어떻게 보면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7개의 비유적 의미가 담긴 표현으로 늘 머리가 복잡해 있었던 것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27절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은 단순합니다. 7가지의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사실 예수님은 잘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니 어떻게 보면 사랑할 것이라는 것을…. 두번째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었으므로”
곧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믿는다면,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느니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시느니라.”
그런데 이 짧은 표현 안에 기가막히게 많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요한복음 전체가 담겨져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3:16 보다는 못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비행기 안에서 종종 설교 준비를 하곤 합니다. 지난주에도 출장을 다녀 왔는데 Florida에서 뉴욕까지 와서 뉴욕에서 보스톤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Florida에서 뉴욕까지는 긴 시간을 비행하게 되서 laptop을 꺼내서 비행기 안에서 할수 있는 만큼 설교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빈 자리 하나 없이 꽉 찬 비행기였습니다. 옆자리가 비어 있으면 훨씬 써 내려 가는게 쉬운데 그럴수는 없었습니다. 곧 앞좌석에 붙은 테이블에 콤퓨터를 놓으면 꽉 찹니다. 순간 후회했습니다. 호텔 방에서 성경 귀절만큼은 미리 다 쳐 놓을 걸….
이렇게 말씀드리면 요즘 젊은이들은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그걸 왜 손수 치십니까? 웹싸이트에서 카피해서 페이스트하면 되지?”
언젠가 말씀드린줄 압니다만, 사실 저는 종종 예화는 그대로 카피한 후 페이스트를 하는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말씀은 카피해서 페이스트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손으로 직접 쳐 넣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에 대한 경외감도 있구요.
오늘 이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니고, 하여튼 그래서 저는 후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호텔방에서 다 쳐 놓았으면 비행기 안에서 훨씬 쉽게 설교 준비를 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회한들 뭐합니까? 어쩔수 없이 성경책을 꺼내서 한 절 한절 암송하다시피하면서 콤퓨터에 써 넣었습니다. 27절 말씀인데 두 세번 암송하고는 쳤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쳤겠습니까?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느니라.”
원래 하나님의 말씀은…?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느니라.”
저는 설교 준비를 멈추고 잠시 멍하니 있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로서 늘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제 모습을 느낄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저는 두 번 세 번 암송한 후 되었다 하고 썼는데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써 놓은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화 시키고 있는 제 모습을 느낄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문자화 시킬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아니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만일 이 설교준비를 비행기 안에서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체험을 하였을까요? 제가 외워서 썼을리가 없습니다. 요즘은 그래도 보지 않고 한글 타자를 할 정도는 되었으니 말입니다. 옆에 성경책을 펴 놓고 그냥 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저를 비행기 안에서 설교 준비를 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함께 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화시키더라도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찾아 오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에서 저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노라 하시니.” 주님은 계속 ‘아버지’ ‘아버지’하십니다. 주님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을 다시 강조하십니다. 무슨 의도가 있으신줄 압니다. 하여튼 ‘아버지’를 계속 외치는 주님에게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제자들은 하나님을 아직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하나님을 문자화 내지 신학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주님은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또 부르시는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은 절대로 꾸짖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아직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하기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하나님과 영원한 시간에 함께 계셨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뜻대로 세상에 잠시 내려 오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주님과 3년간 함께 산 것 밖에 안 됩니다. 어떻게 3년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주님은 크레딧을 제자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3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가 이제는 믿느냐?”
제자들이 무엇을 믿고 있죠?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아닙니다. 주님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는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 만으로도 만족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수 없는 더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하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보라 너희가 각각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노라.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느니라.”
잘 생각해 보세요. 어느 말씀이 더 환난을 앞 둔 주님께 위로가 되겠습니까?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느니라,” 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느니라.”
주님은 환난이 닥아 오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환난중에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함께 계실 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계속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 때만 하더라도 제자들은 주님이 환난을 당하실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만 아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환난 중에 당신에게 필요한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작년도 제가 총회장을 마치는 NCKPC총회 모임에 주기철 목사님의 손자이신 주승중 목사님을 초청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 목사님은 친구 목사님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어느날 친구 목사님이 전화를 하시고는 당신의 아들이 중병에 걸렸는데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당신의 아들이 회복되었다고 감사하다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함께 기도한 결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몇 년 후 어느날 다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 친구로부터…. 당신의 아들이 갑자기 아퍼지면서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다는 전화였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그리 절망한 목소리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목소리에 신비한 확신감을 느낄수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제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저는 아무 것도 할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 지켜 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저에게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시면서 이런 안타까움으로 지켜 보지 않으셨을까…? 바로 나를 위하여….”
비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셨다고 합니다.
반면 생각해 보십시다. 목사님의 아들은 아버지를 무엇이라고 불렀겠습니까? 아버지는 자기에게는 목사님이자 아버지였습니다. 목사님이자 아버지인 아버지가 자기가 죽어 가는데 안타깝게만 자기를 보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배신을 느꼈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몹시도 괴로워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큰 사랑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무엇이라고 불렀을까요?
“목사님” 아니면 “아버지”?
당연히 아버지라 불렀을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이 아이처럼 지금 환난을 앞 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당할 환난을 내다 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앞에서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또 다른 아니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실은 제자들을 위해서 ‘아버지’를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언젠가 당신처럼 환난을 당할터이니 이 때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불러야 함을 알고 계셨고 이를 몸소 보여주신 것뿐입니다. 주님의 바램은 제자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매일 매일 잠기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승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가 스페인을 떠난 후 그와 선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나운 바람과 거센 파도, 보이는 것은 끊임 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뿐이었습니다. 선원들은 분노와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식량과 물이 점점 동이 났습니다. 선원들은 콜럼버스를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 보았습니다. 이는 스페인으로 귀항하자는 암묵의 협박이었습니다. 분명히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수 없는 한계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절망하는 선원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침반이나 선박의 성능을 믿고 항해를 시작한 것이 아니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은 꿈과 소망일 뿐. 나는 지금 희망의 책, 이사야서를 읽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소!”
콜롬버스는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정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이 아닐까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못했을지라도 이런 고백을 하였다면 이미 승리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2016년도 승리의 삶은 매일 매일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고백하는 누구에게나….
말씀을 거둡니다.
세상을 이긴 많은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윤동주 시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에 산 사람입니다. 1917년에 중국 연변 명동에서 태어나서 해방되기 바로 전 1945년 2월에 일본 감옥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한번도 일제의 그늘 밖에서 산 적이 없습니다.
그의 유명한 시 ‘서시’가 있습니다. 후반부만 소개해 드립니다.
‘서시’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평론가들은 윤동주의 별은 그의 꿈꾸는 유토피아인데 조국의 독립을 시작으로 한반도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랑을 나누는 세계이며 사랑의 힘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낙원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꿈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곧 승리가 아닐까요?
마지막 귀절에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자기의 꿈인 별과 바람인 일제의 현실이 만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꿈인 별이 이깁니까 일제라는 현실인 바람이 이깁니까? 아니 별이 이겼습니까 바람이 이겼습니까?
사실 콜롬버스처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것도 멋진 삶입니다. 그러나 윤동주처럼 꿈이 이루워지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평생 산 삶도 멋진 삶입니다. 두 분다 하버지의 사랑 가운데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들의 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매일 승리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