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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그리고 피와 물 (요한복음 19:31-37) 03/13/2016

 

요즘 점점 미국 대통령 선거가 열기를 띄어 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 선거에 관심이 많으셨던 분들은 잘 기억하고 계실줄 압니다. 오바마가 처음 대통령이 될 때 문제가 되었던 시카고에 있는 Trinity 교회가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 되기 전에 다녔던 교회입니다. 대통령 선거 당시 담임 목사님이셨던   Jeremiah Wright목사님이 계신데 그 분이 한 미국을 비난하는 설교가 문제가 되어서 오바마 후보가 드디어 그 목사님과 등을 돌리게 되었고 그래서 많은 화제거리가 되었었습니다.

한편 오바마 후보가 민주당 후보로 확정이 되면서 그 교회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급기야 Wright 목사님은 사임을 하게 되고 새로 Otis Moss목사님이라는 젊은 목회자가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아직 선거는 완전히 끝나지 않은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그 교회는 많은 협박을 주위로 부터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1주일에 백 여건의 협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교회를 폭파시키겠다는 협박도 받았다고 합니다. 새로 부임한 Moss목사님은 많은 스트레스를 안고 목회를 할수 밖에 없었고 밤마다 잠자기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밤 중에 반쯤 잠들어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부인이 목사님을 깨우면서 나가 보라고 합니다. 목사님은 손에 잡히는 막대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습니다. 아래층에 내려 와 보았는데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리는 계속 들렸습니다. 다시 윗층으로 올라 가 보니 딸의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니 여섯 살 난 아이가 어둠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문을 연 아빠를 보더니 말합니다.

“아빠, 나를 봐.”

“Makayla, 잠자야지. 지금 3시야.” 딸은 계속 말합니다.

“No, look at me, Daddy. Look at me.” 그러면서 계속 춤을 춥니다. 그 때 두려움 가운데 있었던 모스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멧세지를 받게 됩니다.

“너의 딸을 봐라. 어둠에 둘러 싸여서 춤을 추고 있지 않니. 어둠은 딸 주위에만 있어 딸의 마음안에는 없어. 딸은 그 어둠 속에서도 춤을 추고 있어.”

그 후 모스 목사님은 어둠 안에서 춤을 추는 목사가 되어 갑니다. 그는 어둠이 자기 안에 침투하지 못하게 합니다. 단지 어둠 안에서도 춤을 추고 있을뿐입니다. 딸처럼!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두 주가 지나면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사순절 기간 참회와 절제 구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간을 보냄을 통해서 세상이 밝아지길 바라는 마음 모두가 갖고 계실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기에 세상의 어둠이 우리 주위에서 쉽게 쫓겨 나 갈까요? 물론 얼마큼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는 우선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 내기 위함일줄 압니다. 아울러 어둠이 더 이상 우리 안에 침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 한 복판에서 밝은 춤을 추는 모스 목사님의 따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함일줄 압니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도 밝은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함일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축복된 삶을 살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31절 말씀입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때는 안식일과 더불어 유월절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는 안식일에 시체가 십자가 위에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린 세 사람의 다리를 꺾어 완전히 죽인 후 시체를 십자가에서 거두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군인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달린 두 사람의 다리를 꺾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런데 주님은 이미 죽으셨습니다. 이유야 몇 가지를 생각할수는 있다고 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땀이 피가 될 정도의 기도를 통한 고통의 시간을 이미 가졌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두 강도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하셨을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체력적으로 두 강도가 더 월등하였을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이미 해가 저물기 전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다리를 꺾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34절 말씀입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아니 이미 다 죽었는데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이미 죽었으니 고통은 없으셨을줄 압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에게 창을 들이 대는 것은 너무 잔인해 보입니다.

 

정호승 시인이 쓴 ‘죽음은 외로워서는 안된다’라는 엣세이가 있습니다. 어버이날 며칠 전에 부모님께 전화를 거는데 두 분 다 받지 않아서 무척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저녁때가 되어 겨우 통화가 되었는데, 무슨 일을 낮에 하셨냐고 여쭈니…, 수의를 장만하러 동대문시장에 다녀 오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직 팔순도 되지 않으신 부모님께서 죽음을 준비하시는 것을 보고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미국의 외과의사 Sherwin Nuland가 쓴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라는 책을 읽게 됩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부모님에 대해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저자인 Nuland는 40년간의 의사 생활을 통해서 많은 죽어 가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각자 인생이 다르듯 죽음 또한 다 다르며, 각자에게 각기 알맞은 죽음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편안한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해야 할 권리가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을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 정호승 시인은 모든 인생의 죽음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떠셨습니까? 물론 주님의 죽음을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몇몇은 함께  보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죽음은 차라리 외롭게 맞이하시고 싶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당신이 왜 죽으시는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실제로는 외롭게 죽어가셨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괴로워하시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며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습니까? 주님은 정말로 그 어느 누구도 겪지 않은 최악의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가슴이 아픈 장면은 죽음 후에 계속 펼쳐진 것입니다.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릅니다.

사실 죽은 자는 그 어떤 문화에서도 경외의 대상이지 않습니까? 이미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지 않습니까?  

제가 한국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봉직했는데 제가 속해 있던 대대에 한 병사가 훈련 중에 익사했습니다. 군의관으로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이제 장례를 치르러 시신을 차에 태워 보낼 때가 되었습니다. 시신을 실은 차가 떠나니 대대장부터 모든 장교와 병사들이 일제히 경례를 하였습니다. 더 이상 계급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은 자는 경의를 받을 자격이 백번 있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 주님은 어떻습니까? 죽은 후 군인이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죽어서도 주님은 모욕을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정황을 살펴 보면 군인은 상관의 명령으로 확인 사살과 같이 찔렀을줄 압니다. 사실 우리 주님이야말로 죽음 후에 온 인류에게 경례를 받으셨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유야 어떻든 주님은 고귀한 죽음 후에 또 모욕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후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곧 피와 물이 나오니라.”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계셨을까요?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36절 말씀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주님의 이러한 죽음은 이미 구약을 통해 예언되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편 34편에 이미 메시야는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 37절 말씀입니다.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구약 스가랴서에 나오는 말씀인데 누군가에 의해 주님께서는 창에 찔리실수 밖에 없으심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구약은 이미 두 사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창으로 찌르고 다른 한 사람은 찔리고 대신 뼈는 꺾이지 않습니다. 곧 한 사람은 십자가에서 뼈가 꺾이지 않고 죽음을 맞이 할 사람이었습니다. 곧 주님이십니다. 또 한 사람은 물론 복수로 되어 있지만 이들을 대표하는 한 군인입니다. 이 군인이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주님을 찌른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구약은 그 오래 전부터 이 두 사람을 보여주고 있었을까요? 창을 찌르는 사람은 어둠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어둠의 창을 손에 든 존재는 오늘까지 아니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 존재할 것입니다.

반면 주님은 죽은 후에도 창에 찔림을 받은 후 마지막으로 남겨진 피와 물을 쏟아 내십니다. Ronald Rolheiser라는 영성가는 피와 물은 새로운 생명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새 생명의 탄생은 바로 피와 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이는 곧 주님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요?

  주님은 찔린 상처를 통해 생명의 축복을 베풀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실 때 늘 주님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의 세력은 주님께서 죽은 후에도 주님을 괴롭힌 것입니다. 창이 되어서 주님을 찔렀습니다. 어둠이 주님을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평생 악을 선으로 갚으셨던 주님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셨던 주님은 죽은 후에도 당신을 괴롭히는 어둠의 창에 당신의 마지막 남은 것으로 갚으십니다. 피와 물로 답례하십니다. 새 생명으로 감싸십니다.

이 놀라운 장면을 구약의 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을 비롯 십자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놀라운 역사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증인들을 통해서 이제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5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다코다 지역 어느 원주민 부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족의 한 젊은이가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의 친척들이 모여서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지혜자가 그들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후 잠시 담배를 피면서 조용히 명상에 잠깁니다. 그리고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친척들에게 집으로 가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가져 오라고 합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들이 가져 온 선물은 살인자에게 전해 줄 것이다. 우리의 신실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어도 우리는 그를 우리의 친척으로 삼는 것이다. 그 사람은 너희들의 형제가 되고 나에게는 조카가 되는거지. 앞으로 그는 우리 중 한 사람이 되는거야. 우리 모두에게는 죽은 형제가 다시 돌아 온 축복이 되는거고….”

그리고는 살인자를 불러 왔습니다. 살인자에게 말합니다.

“여기에 너의 친척들과 함께 앉아 담배를 피게. 그들이 너를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 삼기로 했지. 이것은 그들의 바램이야. 그러므로 너는 아무 두려움 없이 그들 안에 들어가 함께 살아. 이 선물들이 바로 너를 그 죽은 사람처럼 사랑한다는 증거물이지, 영원히….”

이 이야기를 들은 살인자는 심하게 오열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받은 사랑에 보답하면서 최고의 친척이 되어 갑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다코다 원주민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춤을 추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죽은 당신의 몸에 창을 찌르는 군인에게 당신의 남은 최고의 것을 주셨습니다. 피와 물을 주셨습니다. 군인을 사랑으로 감싸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춤을 출 것을….

우리가 춤을 출 때 두 가지 일어 납니다. 우리 주위의 어둠이 우리를 더 이상 침투하지 못합니다. 한편 우리의 춤이 어둠을 정죄합니다. 어둠이 쫓겨 갑니다. 이러할 때 우리도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증인은 어둠 가운데서 춤을 추는 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이 마쳐질 때 우리 모두 어둠 가운데서 주님의 보혈로 인해 춤을 추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 가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오래 전 워싱톤 DC에서  살 때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고양이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저나 집 사람이 오면 문까지 나와 항상 저희를 반겼습니다. 고양이는 우리들의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구별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발걸음은 어떠합니까? 이웃을 해하는 자의 발걸음입니까? 아니면 누구의 창에 찔릴까 두려워 하는 자의 발걸음입니까? 아니면 춤추는 자의 발걸음입니까? 남은 사순절 기간 춤추는 발걸음의 소유자가 되십시다. 주님의 허리에서 나온 피와 물이 온 세상 사람들을 덮고 있습니다. 온 세상 죄를 녹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춤을 추십시다. 춤추는 자들이 바로 주님의 고난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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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45 창, 그리고 피와 물 (요한복음 19:31-37) 03/13/2016 webmaster 2016.03.14
44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가복음 14:32-42) 02/28/2016 webmaster 2016.02.29
43 아버지의 마음 (마태복음 8:5-13) 02/21/2016 webmaster 201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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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복음에 참여하고자 (고린도전서 9:19-27) 02/07/2016 webmaster 201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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