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시를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봄기운이 나도는 계절에 꼭 맞는 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 저자는 누구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제가 두 사람을 말씀드릴텐데 그 중에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분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시인입니다. 정호승 시인…? 아니면 YPK의 윤동주 시인…?
감옥에서 28살에 삶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의 ‘새로운 길’이라는 시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시를 지을 것 같지 않은 분 같지만 바로 윤동주 시인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이런 시를 지을수 있는 분이기에 그 어려운 시절에 저항시인으로서 빛을 발했고 오늘까지 그의 시가 많은 분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 생각도 됩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를 살았지만 언제나 그의 마음에는 새로운 길이 열려져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늘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부활후 두번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들은 바로 윤동주 시인과 같이 ‘새로운 길’과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서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평소에 늘 다니는 길이지만 매일 아침 새로운 길로 느껴진다면 진정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길을 매일 가는 자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그들의 앞 길은 어디서부터가 밝은 빛이 환하게 비쳐 올까요? 그래서 이웃 사람들조차 금방 알아 볼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한지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솔로몬이 지었다고 생각되는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전도서’ 하면 많은 분들이 쉽게 이 말씀이 떠 오르실줄 압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2:1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솔로몬은 염세주의 인생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도 염세주의적인 냄새가 많이 풍깁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솔로몬의 예리한 통찰력이 빛이 납니다. 솔로몬은 당신이 깨달은 세상사를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지혜의 사람 솔로몬은 당신이 본 ‘지혜’를 소개합니다. 사실 솔로몬은 누구보다도 지혜를 가까이 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 보다도 지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솔로몬이 일생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지혜’를 표현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를 꾸민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작은 도시 국가를 큰 나라가 쳐 들어 온 것입니다. 작은 국가 국민들은 큰 곤궁에 빠집니다. 그들의 미래는 눈에 보이듯 선합니다. 아마 온 시민이 크게 절망하였을줄 압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다행히 가난한 지혜가가 있어서 그 나라를 건집니다. 보통 때는 거들떠 보지 않았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으니 가난한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결과는 아주 잘 됐습니다. 그런데 아타까운 것은,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가난한 지혜자를 그 후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깨달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세상이 어려울 때만 빛이 나는 지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솔로몬은 지혜를 설명하면서 주인공을 가난한 지혜자로 삼았습니다. 그냥 지혜자면 지혜자이지 왜 가난한 지혜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참 지혜자는 가난할수 밖에 없어서 그랬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작은 도시 국가에 큰 나라 왕이 쳐들어 왔습니다. 작은 국가가 큰 나라를 어떻게 감당할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큰 나라가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싸워야 합니다.
얼마전 어느 방송국 뉴스에서 봤습니다. 아주 좋은 교훈을 받은적이 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는 졌고 이랔 전쟁에서는 이겼습니다.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베트남은 전쟁에서 이겼고 이랔은 미국에게 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락이 미국식으로 전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베트남이 미국을 이길수 있던 이유는 그들은 미국식으로 큰 무기를 가지고 전쟁한 것이 아니라 게릴라전으로 전쟁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왜 솔로몬은 가난한 지혜자를 등장시켰는지 좀 이해가 됩니다. 아마 가난한 지혜자는 가난하기에 큰 왕을 무찌를수 있는 지혜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승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자는 가난한 지혜자일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대개 언제 지혜가 필요합니까? 권력있는 사람들이 약한 자들을 괴롭힐 때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온 세상이 어두움과 공포 가운데 있을 때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제 세상이 어두워집니까? 언제 세상이 공포 가운데 거합니까? 힘 센 자들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솔로몬은 정말로 놀라운 통찰력을 갖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모습을 가난한 지혜자로 소개해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결과적으로 지혜자는 영웅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솔로몬은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가난한 지혜자의 지혜로 이겼는데 왜 그들은 다시 거들떠 보지도 않을까요? 막상 이기긴 이겼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난한 지혜자의 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급해서 사용은 했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지혜였습니다. 지혜자가 제시한 길이 더 이상은 쓸모 없어 보입니다. 또 다시 큰 것 밖에 눈에 들어 오지 않습니다. 큰 왕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사모합니다. 그들과 같은 큰 길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 지혜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금방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Ronald Culberson이라는 유머 전문가가 있습니다. 어느 날 pre-school다니는 아들 라이언을 학교에서 픽업해서 차 뒷좌석에 태웠습니다. 라이언은 그 날 따라 상당히 에너지가 넘쳐 보였고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히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물었습니다.
“오늘 어땠어?”
“You know what?”
“What?”
“오늘 게임 하나 만들었어.”
“정말. 야 신나겠다. 말해볼래.”
“이렇게 시작하는거야. 먼저 playground에 가서 신발을 다 벗어.” 신발 벗는 것이 큰 범죄나 저지른 것처럼 킥킥 됩니다. 계속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네 주위를 뱅글 뱅글 도는거야. 제일 많이 돈 사람이 이기는거고!”
여기까지 들은 아빠는 머리가 재빨리 돌아 갑니다. 분명히 라이언이 1등을 했고 그래서 신나게 말하는구나 생각합니다. 어린 나이에 이처럼 경쟁력이 강하니 점차 자랄수록 여러 상을 휩쓸고 끝내 노벨상까지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에 잠시 빠집니다. 큰 기대를 갖고 묻습니다.
“누가 이겼어?” 순간 라이언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실망스런 표정을 짓습니다.
“I don’t know.”
라이언은 눈빛으로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아빠는 느낍니다.
“아빠, 누가 이긴게 중요한게 아니야. 우리, 우리, 우리가 게임을 함께 만들어서 재밌게 놀았다구요!”
어른들이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경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입니다. 라이언과 친구들은 가난한 지혜자들이 아닐까요?
생각해 보십시다. 라이언과 친구들이 사는 마을에 큰 위기가 닥쳐 왔습니다. 이 때 라이언의 아버지는 라이언과 친구들의 지혜를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우리, 우리, 우리가 게임을 함께 만들어서 재밌게 놀았다구요!”
그것이 먹혀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 후 어른들은 언제 라이언과 친구들의 지혜를 사용했었냐는듯이 살아 갑니다. 이것이 안타깝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모든 것을 너무도 잘 파악한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급할 때는 지푸라기 잡듯이 사용하지만 평상시에는 전혀 이해가 안 되서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7, 18절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권세 있는 자들은 그 지혜자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지혜자도 그 권력자들을 뇌리에서 지워 버렸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정반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다시 권력자들에게 다가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게임을 하려고 기회를 엿보면서 자기를 무시하는 그들 주변을 항상 두리번 거리지 않았을까요?
그들을 찾아 가는 새로운 길을 늘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증인들이니깐…. 부활의 증인들은 이웃과 게임을 합니다. 그러나 이기기 위해서 게임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론 게임이 게임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기는 기준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기준을 정한 이유도 fun, 곧 재미를 위해서 정한 것입니다. 함께 웃기 위해서 정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처음 소개해드린 시의 저자 윤동주 시인이 아닐까요?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만난 주님의 제자들이 아닐까요?
사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난한 지혜자의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니 가르쳐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새로운 길이 항상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승천하시기 전 40일을 제자들 주변을 맴돌고 계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부활하신 후 주님은 제자들과 줄기차게 숨바꼭질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갑자기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 또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갑자기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허리에 손을 대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갑자기 디베랴 호숫가에 새벽녁에 나타나셔서 물고기를 구우셨습니다. 아마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제자들과 고기를 맛 있게 드시지 않으셨을까요?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즐겁게 게임을 하신 분이십니다. 승자가 없는…. 이미 승자는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을 만났기에 매일 새로운 길을 걸어가며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지칠 대면 늘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장난꾸러기 주님을….
그런데 이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려고 하면 언제든지 나타나셔서 우리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하십니다. 재밌게 하십니다. 웃기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우리로 더불어 이웃을 위한 가난한 지혜가가 되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이웃을 찾아가 함께 웃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본받아 장난꾸러기가 되어서 이웃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함입니다.
Kimberly Greer라는 사회학자는 감옥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웃는다는 것이 그 무엇 보다도 중요한 소질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Vanessa라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Vanessa는 감옥에 함께 갇혀 있는 친구들 곧 죄수들을 웃음으로 회복시키곤 하였다 합니다. 감옥에서 누군가 우울증에 빠지면 친구들은 Vanessa를 불러 옵니다. Vanessa는 그들을 재미있게 해 줍니다. 자기도 죄수이지만….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한 Vanessa가 되어서 이 땅에 오셨고 이제는 부활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새로운 길을 가십시다. 재미있게 가십시다. 새로운 길은 부활의 주님과 함께 가는 재미있는 길입니다.
우리도 Vanessa가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전 같은 노회 소속인 우스터 장로교회 교우님의 장례예배에 참석한적이 있습니다. 남편은 Gary McConwell장로님이라고 저희 교회 행사에 여러번 첨석하신 분입니다. 언젠가 단기선교단 파송예배시 권면도 하신 분입니다. 저희 교회를 늘 많이 사랑하신 분인데 이 분의 부인이 소천하셨습니다. 그 분에 대한 감사의 뜻도 표하기 원해서 참석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 본문을 전도서에서 정하셨습니다. 설교 중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이 천국에 대한 설교를 한 때 자주 하신 모양입니다. 종종 고인이 하신 말씀이 이 세상에도 좋고 기쁜 일들이 많은데 왜 천국의 이야기만을 하냐고 이 땅 이야기를 좀 더 많이 해달라고 부탁을 받곤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이야기가 대부분인 전도서를 본문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혼자서 생각하며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이 땅과 천국은 따로 떼어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물론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의 삶도 새로운 길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고 천국은 물론 새로운 길의 축복을 누리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부활의 증인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늘 새로운 길을 통해 이웃과 만나는 축복된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닐까요? 내 생각이 당신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삶이 아닙니다. 새롭게 만나는 재미가 넘치는 삶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그러므로 이웃과 더불어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가십시다.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매일 매일 부활의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새로운 길을 가시기 원하십니다. 웃으면서….
교우 여러분,
매일 아침 직장을 향하는 길이, 학교로 향하는 길이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길이 될 것입니다. 늘 만나기 부담스러웠던 사람과 함께 할 재미있는 게임이 생각이 날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웃음을 안겨다 주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문을 두드리는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난한 지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지혜자의 축복을 함께 누리십시다. 가난한 지혜자의 말로 세상을 웃기십시다. 언젠가 그들의 기억에서 사라질지라도….
성경은 말씀합니다.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