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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파와 오메가(요한계시록 22:10-15)04/24/2016

 

 

‘그림 그리는 남자’라는 책을 지은 일본인 도요오 화가가 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작년 한국 방문시 구입하였는데 구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 제일 힘들었던 과목이 미술이었습니다. 한번은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웃으면서 “이것도 그림이냐” 말씀하신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 분의 그림 한 품이 저희 집 family room에 걸려 있습니다. 저를 비하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고 그저 솔직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여튼 그림에 대해서는 늘 자신감이 없는데 책의 부제로는 ‘마흔 한 살, 나는 이렇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뒤늦게도 그림재간이 발휘될수 있나 보다 하면서 그 책을 구입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 꿈은 금방 깨졌습니다. 원래 아버지가 화가이셨고 도요오 씨도 고등학교까지는 그림을 그렸는데 어머니의 만류로 그림 대신에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림 그려서는 남자가 생활이 보장이 안 된다는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이후로는 그림을 손에서 놓습니다. 그러다가 41살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가 있습니다. 중병에 걸리면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림을 통하여 위로도 받고 어떤 면에서는 치료의 도움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제가 기대했던 책은 아니었습니다.  

하여튼 한번 손에 드니 끝까지 그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만, 몇 가지 그림에 대한 중요한 점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합니다.

“누구의 작품이든 그림에는 신기한 힘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정성껏 그린 그림을 말하는줄 압니다. 정성껏 그린 모든 그림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에게 남아 있는 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화가였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버지는 어릴 때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도요오, 보지 않고는 그리지 말거라. 그릇 하나라도 좋으니까 잘 보고 그려.”

어린 아들이 혹시 화가가 될지도 모르니 어릴 때 아버지가 어린 도요오 씨에게 준 교훈인 것 같습니다.

“보지 않고는 그리지 말거라.”

곧 제가 그 책을 읽고 그림에 대해서 두 가지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는 보지 않고는 그리지 말아야 할 것과 그림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요한 계시록에서 읽으시고는 왜 그림 이야기만 잔뜩하시나 의아해 하실줄 압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보는 말씀입니다. 그림으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1: 2절 말씀을 보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19절 말씀 한 절만 더 봉독해 드리면,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인 22장은 마지막 때 일에 대해서 본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그런데 마지막 장면치고는 정말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신데 곧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실 분이신데 좀 주님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목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강도를 구원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을 베푸셨던 주님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22장에 와서는 그림도 보여주시지 않을뿐 아니라 주님의 속성과는 먼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느 주석가는 이 말씀을 한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대비되는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물이 있으라 하니 물이 생기면서 하늘과 땅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곧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까요? 주석가는 창세기 1장과 대비해서 오늘 본문의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라 하시니 그렇게 되었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자가 되라 하시니 그렇게 되었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인이 되라 하시니 그렇게 되었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한 자가 되라 하시니 그렇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가 된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은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의를 행하는 자는 영원히 불의한 자가 되어 갑니다. 반면 의로운 자는 영원히 의로운 자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처럼 완성이 됩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마지막 세상의 완성되는 장면을 말씀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장면도 하나의 그림이 된 것입니다. 이 그림 앞에 서는 자들은 시간이 영원에 삼킨바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간은 잠시 동안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이제 영원한 세상이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찾아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영원히 의로운 자가 되는 세상, 불의한 자는 영원히 불의한 자가 되는 세상이….

 

저희 집 거실에 한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레오날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비단과 같은 천에 새겨긴 그림입니다. 혼자서 거실에서 기도하다가 종종 그 그림을 보면서 많은 위안과 힘을 얻곤 합니다.

아울러 또 다른 방에는 주님의 부활의 장면이 담겨져 있는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성화는 두 개가 걸려 있는데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세번째 성화를 걸어 놓는다면 이런 그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대한 그림인데 더러운 자는 영원히 더러운 자가 되고 의로운 자는 영원히 의로운 자가 되는 날을 그린 그림 말입니다. 사실 요한은 지금 이 그림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지금 이 그림 앞에 서 있습니다.

더러운 자는 더 이상 의로워지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순간을 그린 그림 앞에, 의로운 자는 영원히 의로운 자가 되는 순간을 그린 그림 앞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 앞에 서는 자들이 이 땅에서부터 최고의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요? 한편 이 그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시간은 잠시 동안 주어진 하나의 피조물임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언젠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그 연약한 시간과 더불어 잠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 연약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살고 있는 시간도 연약합니다.

 

‘유키나’라는 일본 여자 아이가 어릴 때 중병에 걸려서 병원 생활을 오래 하였습니다. 병원생활을 통해 여러가지 시를 썼습니다. 그 중 ‘생명’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생명’

 

생명은 굉장히 소중하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건전지 같은 거다.

하지만 건전지는 언젠가는 다 닳아 없어진다.

생명도 언젠가는 닳아 없어진다.

건전지는 바로 새 것으로 갈아 끼우면 되지만,

생명은 쉽게 갈아 끼우지 못한다.

몇 년이고 몇 년이고

긴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하나님이 내려주신다.

생명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생명,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하며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아직 많이많이 생명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 슬퍼진다.

생명은 일요일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데….

그래서 나는 생명이

‘나 피곤해 죽겠어’

하고 말할 때까지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아갈 테다.

 

이 시를 쓰고 4개월 후에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에게 애독되고 있고 특히 ‘왕따’등 문제가 많은 학교에 이 시가 읽혀진 후에는 왕따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이 땅의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유키나는 생명은 건전지와 같음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달은 아이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생명도 건전지와 같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소중하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들의 생명만 건전지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도 건전지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언젠가 이 세상도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연약한 시간과 더불어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에 주님은 언젠가 영원한 의로움의 완성의 세계로 들어갈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아주리라.”

건전지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어떻게 산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곧 언젠가 사라질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살았느냐가 마지막 관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산 것을 다 기억하시고 갚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편 그 약속의 말씀을 다음의 말씀으로 도장을 찍으십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주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도 말씀으로 세상을 완성시키십니다.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은 시간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안에 어떻게 살았느냐를 소재로 해서 마지막 때 새로운 세상을 장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이 삶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교우 여러분,

시간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우리들의 삶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요한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시간보다 소중한 이 땅의 삶을 소중하게 산 사람들에게 어떻게 갚아주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었기에 생명나무에 나아갈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영원히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은 생명나무가 있는 성에 들어 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성에 들어 오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그런데 왜 이들이 영원히 더러운 자들이 되었을까요? 요한계시록이 주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림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림 앞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는 불의한 자로 남아 있으라” 명령하시는 주님의 그림, “의로운 자는 영원히 의로운 자가 되어라” 명령하시는 주님의 그림, 언젠가는 더 이상 더러운 자가 의로운 자가 될수 없음을 보여주는 그림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그림 앞에 자주 자주 서십시다.

  

제가 그림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 그림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200년도에 어느 화가가 지은 그림입니다. 저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아래는 불의한 자들이 영원한 불의한 자가 된 것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위에는 13사람인데 앞 줄은 남자들이고 뒷줄은 여자들인 것을 봐서 12사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위에 13 사람은 영원한 의로움 가운데 사는 자들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닙니다. 이 그림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 그림 앞에 서는 자들은 이미 주님의 은혜로 위에 있는 의로운 자의 대열에 속해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 앞에 서는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말씀을 거둡니다.

유키나의 이야기를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유키나의 병원 친구 유카 어린이가 있습니다. 유카는 유키나를 통해 큰 힘을 얻어 병을 이겨내고 현재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유카가 ‘유키나에게’라는 시를 썼습니다.

 

‘유키나에게’

 

유키나는

2년전부터 줄곧 병원에서 산다.

매일 치료 때문에 힘들어한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울고 있을 땐

자기가 아픈 건 말짱 잊어버리고

금세 쪼르르 달려가 아픈 친구를 달래준다.

가아-끔

밤에 훌쩍이는 소리가 난다.

언제나 다른 친구들을 달래주는 유키나가 울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훌쩍이는 유키나를

그저 가만히 바로보고만 있을 뿐…,

“미안해” 달래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유키나.’

 

생명은 건전지와 같음을 안 유키나는 건전지가 다 할 때까지 자기의 아픔도 잊은채 친구들을 달래주면서 멋지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건전지와 같은 삶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이 유키나의 삶을 주님께서는 너무도 멋지게 갚아주시지 않으셨을까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네번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서 십자가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부활절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한 가지를 더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마지막 그림 앞에 서십시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이 그림을 보여주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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