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로 ‘기회’인 opportunity는 라틴어 ‘ob portu’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ob portu’는 항구 밖에 정박해 있는 배를 말한다고 합니다. 왜 배가 항구 밖에 정박해 있겠습니까? 배는 파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도가 올 때 파도를 이용해서 항구로 들어와 정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를 ‘ob portu’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곧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파도가 오는 순간만을 기다리는데, 만약 그 파도를 놓치면 파도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opportunity라는 단어가 유래되었습니다.
영국의 대문호 쉐익스피어는 ‘opportunity’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는 파도가 있다.
그 파도는 사람들을 행운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생략한 사람들의 인생 여행은
슬픔과 얄팍함에 갇혀 있다.
거대하고 넓은 이 바다에 우리는 떠 있고,
파도가 넘실댈 때 우리는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
아니면 우리의 모험은 끝이 날 것이다.”
쉐익스피어는 멋진 인생을 사는 자는 파도를 피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파도를 기회로 삼고 파도에 과감히 몸을 맡기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가 어린이 주일 예배로 드리는 이유는 저희 자녀들의 축복된 삶을 위해서 일줄 압니다. 그런데 축복된 삶은 어떤 것입니까? 인생에 심한 파도를 겪어 보지 않고 잔잔한 바닷가에 사는 것이 아닐까요? 인생의 파도는 언제나 있는 법 그 파도를 기회로 삼고 멋지게 사는 것이 축복된 삶이 아닐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자녀들이 이런 축복된 삶을 살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인생의 파도에서 도망치지 않고 도리어 파도를 타면서 훌륭한 삶을 살았던 청년이 등장합니다. 곧 디모데입니다. 디모데가 어떻게 디모데가 되었는지를 알면 우리가 우리들의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알게 될줄 압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에는 디모데가 많은 인생의 파도를 겪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인생의 파도를 겪었음은 우리가 쉽게 생각해 낼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세 차례 선교 여행을 떠났는데, 그 중 두번째 선교 여행에서 디모데가 합류합니다. 사도행전 16:1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디모데가 이 후로 사도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합류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 선교 여행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여행이었습니다.
제가 오래 전 안식년 때 터키를 방문했었습니다. 기독교 여러 유적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스톤에서 터키 갈 때만 비행기를 탄 것이 아닙니다. 터키에 도착해서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비행기를 타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가기도 했는데 버스 타는 시간이 장장 7시간이 걸렸습니다. 7시간을 가는 도중에 안내인이 바로 사도바울은 이 길을 걸어서 선교여행을 다녔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7시간을 버스로 달렸다는 것은 요즘식으로 하면 보스톤에서 거의 필라델피아까지 가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길이 제대로 되어 있었겠습니까?
디모데가 이처럼 어려운 여행임을 몰랐을까요? 큰 파도를 수없이 겪어야 함을 몰랐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그는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이미 1차 선교여행을 마친 사람입니다. 너무나 험난한 선교여행임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나 사도바울이 선교여행에 동행케 했을까요? 사도바울은 험한 파도를 잘 탈줄 아는 자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 안에서 진정한 용감한 자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용감한 자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얼마나 디모데를 사랑하였으면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생각하겠습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서 청결한 양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보는 디모데의 모습은 아마 이 두 가지로 잘 표현되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청결한 양심과 눈물을 소유한 디모데만이 자기와 함께 험한 파도를 타고 선교 여행을 잘 마칠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청결한 양심과 눈물 없이 진정으로 용감한 자가 될수 있을까요?
얼마 전 이해인 수녀의 ‘아침의 기도’라는 글을 접해 보면서 청결한 양심을 소유한 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의 첫 부분만 소개해 드리면,
오늘을 위한 기도 -이해인-
기도로 마음을 여는 이들에게
신록의 숲이 되어 오시는 주님
제가 살아있음으로 살아 있는 또한번의 새날을 맞아
오늘은 어떤 기도를 바쳐야 할까요?
(중략)
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제가 더러는 오해를 받고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쓸쓸함에
눈물 흘리게 되더라도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길을 가는 인내로운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아침 기도 가운데 바로 이 대목이 저의 눈에 띄었습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신뢰 받지 못하는 쓸쓸함에 눈물 흘리게 되더라도…” 이해인 수녀는 꽤 자주 많은 아픔을 당한 것 같습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청결한 양심을 소유하지 않았던 동료였음을 알게 될 때가 아닐까요?
사도바울도 이런 경험을 많이 당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디모데는 청결한 양심의 소유자였습니다. 사도바울도 이해인 수녀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했을줄 압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서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서 눈물을 보았습니다. 잃은 영혼들을 위한 눈물 그래서 그는 사도바울과 함께 그 험한 선교여행에 뛰어 들어 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디모데의 아름다운 신앙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5절 말씀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을 전수받았다고 사도바울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어릴적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거짓 없는 믿음을 보면서 자랐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어느덧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을 소유한 어린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저는 BNI에서 한 클래스를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BNI가 북쪽에서는 Reading에 있는 나사렛 사람의 교회에서 모이고 남쪽 물론 Central이라고 합니다만, 중앙에서는 저희 교회에서 모이고 있습니다. 저는 나사렛 사람의 교회 담임 목사님이신 유경렬 목사님과 함께 합동으로 ‘이민신학 알아가기’라는 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민 신학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삼세대 교육입니다. 유 목사님과 삼세대 교육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던 중 유 목사님께서 당신 가정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사시고 몇 년전에 은퇴하신 목사님이십니다. 하루는 학교 숙제가 할아버지가 어릴 때 어떻게 사셨는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나눈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당신의 이야기를 다 하신 후 마지막으로 손주에게 물으셨다고 합니다.
“재영이는 앞으로 무엇이 될래?”
“목사님.”
할아버님도 목사 아버님도 자기도 목사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초등학교 학생입니다. 할아버지가 계속하시는 말씀이,
“그래 나는 재영이가 무엇을 하던 좋아. 그런데 재영이는 무엇을 해도 아주 잘 할거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장난꾸러기 재영이는 갑자기 눈물을 마구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Reading에는 동양인은 거의 없습니다. 동양 아이로서 늘 힘들었던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지는 잘 모르겠다고 아버님 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의 말씀이 손주의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디모데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할머니의 가끔 던져주시는 몇 마디 몇 마디가 디모데의 뇌리에 깊이 박히고 어느덧 할머니와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 받는 청년으로 자라 갔을 것입니다. 그러니 삼세대의 신앙 전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의 전수만 가지고 디모데가 디모데가 되었을까요? 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사도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에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시킬 때 디모데에게 안수를 준 것 같습니다. 그 안수받았던 일을 기억하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안수받은 일을 기억하라고 할까요? 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사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쓴 유서와 다름 없는 서신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당신의 바톤을 청년 디모데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앞으로도 디모데가 겪어야 할 심한 파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심한 파도를 도리어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으려면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디모데 안에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거짓이 없는 신앙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삼대를 거쳐 내려 온 맑고 깨끗한 신앙의 소유자임을 일깨워 줍니다.
한 가지를 더 일깨워줍니다. 당신이 베풀었던 안수를 기억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당신과 함께 나눴던 시간들을 기억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다녔던 선교 여정을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이런 말을 할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디모데의 멘토였던 것입니다.
곧 디모데가 사도바울을 뒤이어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사람이 되어서 그 거센 파도를 복음의 기회로 뒤바꾸는 믿음의 청년이 될수 있었던 것은 첫번째로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아울러 두번째로는 사도바울이라는 멘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즘 ‘멘토’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줄 압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도 얼마전까지 멘토는 순수 영어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안 것은 멘토는 그리스 신화 Odyssey에 나오는 신입니다. Odysseus가 트로잔 전쟁에 나가기 위해서 친구인 멘토에게 자기의 아들 Telamachus를 맡기는데서 멘토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영성가는 멘토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게 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부모의 교육으로는 온전한 교육이 이루어질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 말고 누구나 멘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거기에는 크게 공감합니다. 아울러 사도바울도 공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제자 디모데에게 큰 일을 맡기면서 삼세대의 신앙 전수를 강조하면서 자기로부터 받은 안수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어린이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저희 교회 어린이들이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삼세대를 거치는 사랑, 또 하나는 멘토의 사랑입니다.
어린이 디모데가 이처럼 귀한 인물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훌륭한 삼 세대 가정교육, 게다가 청년이 되었을 때 바울을 멘토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자라는 자녀들에게도 같은 축복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요즘 신임 제직 교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육을 받아 보신 제직분들은 아시겠지만 시작과 함께 조크를 나누는 시간이 있습니다. 한 번은 어느 집사님이 따님 이야기를 조크를 대신으로 하셨습니다.
서너 살난 여자 아이인데 한글로 숫자 세는 법을 최근에 배운 것 같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하나 둘로 시작하여 열까지 세었을 테고…. 그것이 익숙해지니 열을 넘어 세기 시작합니다. 열 하나 열 둘 열 셋… 스물까지 세었습니다. 그 다음은 또 엄마가 가르쳐 줘서 스물하나 스물 둘 스물 셋… 서른까지 세었다고 합니다. 마흔까지도 세고 쉰 까지 그리고 예순까지 세었습니다.
엄마가 또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순 하나 예순 둘 예순 셋….”
꼬마 아이가 혼자서 외우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하나, 예수님 둘, 예수님 셋….”
얼마나 기특하고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에게 멘토까지 생기면 얼마나 귀한 삶을 살겠습니까? 친부모는 아니지만 저희 교회 어르신들에게 “너는 무엇을 해도 잘 할거야!” 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이 어린이뿐 아니라 우리 교회 어린이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요?
교우 여러분,
가까이는 구역에 있는 가족의 자녀들의 이름을 기도로 올려드릴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기회가 되면 직접 말로 축복을 하면 더욱 좋을 줄 압니다. 구역을 넘어서라도 마음에 한 어린이를 두시고 기도해 드리면 그 축복을 그 어린이가 받게 되지 않을까요? 그 때 정말로 삼세대 교회가 되어 가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저희 교회 자녀들에게 삼세대의 사랑을 나눠주십시다. 아울러 멘토가 되어 가십시다. 어느 원주민부족의 이야기처럼 아이들은 가족과 더불어 마을이 키우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교회가 키우는 것이 아닐까요?
“너는 무엇을 해도 잘 할거야!”
그래서 사도바울은 삼세대의 사랑과 함께 멘토의 축복을 나누는 자들을 위해 이처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