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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 (요한복음 12:20-24) 06/05/2016

 

 

어느 스승과 제자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승님,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오늘은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찾아 왔는가?”

“스승님, 제가 며칠 전에 상심이라는 연못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연못을 건너는 동안 참으로 놀라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혹 연못에서 괴물이라도 나온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라 사공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공을 보고 놀랐다니, 혹 그 사공이 신통한 재주라도 지니고 있던가?”

“예, 사공의 노 젓는 솜씨가  뭐라 말할수 없을만큼 뛰어났습니다. 사공이니까 당연하겠지만 그 솜씨가 너무 뛰어나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멋진 사공을 만났나 보군. 그래 멋진 사공을 만났다는건 복된 일이지. 그나저나 그 얘기를 들으니 사공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나 역시 몹시 궁금하군.”

“정말이지 상상할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놀랍다는 것인가?”

“제가 노 젓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사공에게 다가가 그 비법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어려운 말을 하지 뭡니까.”

“이해할수 없는 말이라. 도저히 사공이 뭐라고 했는가?”

“사공은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은 몇 번 만에 노 젓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깊은 물에 잠수를 잘하는 사람은 배를 본 적이 없더라도, 또 노를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더라도 금방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승님, 과연 배도 안 본 사람이 그렇게 쉽게 노 젓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스승은 사공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스승님, 그렇게 웃지만 마시고 제발 그 뜻을 가르쳐주십시오.”

 

스승의 말을 듣지 않아도 여러분은 다 짐작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노 젓는 것을 배우기 전에 헤엄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잠수하는 법을 배워 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려움이 없기에 노 젓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것입니다.

달리 얘기해서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 아닙니까? 기본이 잘 되었을 때 무엇을 해도 멋지게 해 낸다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배를 잘 젓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이 인생의 최고의 뱃사공이 될까요? 아마 기본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아닐까요?

그러면 인생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삶은 어떤 삶인지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사실 오늘 본문 바로 전 귀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명절은 유월절 명절이고 3년의 공생애 중 세번째로 지키는 유월절이었을 것입니다.

 

Sermon Insert 051516

 

지난번 성령강림주일에도 말씀드린대로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때는 그 세 절기 중에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만 예배드리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에 들어 온 모든 민족의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독실한 신자들만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성령강림주일 예배시에 드린 말씀에도 여러 민족과 방언을 쓰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때도 유월절이니 많은 민족이 왔을 것입니다. 그 들 중에 섞여 있는 헬라인 몇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자, 헬라인 몇 사람이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와서 예수님을 뵙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왜 하필 빌립이었는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사실 빌립은 이 당시 헬라식 이름이었습니다. 아마도 헬라 문화권에서 자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이 헬라인들은 같은 문화권에 있는 빌립에게 제일 쉽게 다가갈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번 쉐마의 밤에서 앞으로 구성될 영어회중을 위한 시간을 가졌는데 정말로 같은 한인이지만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는 장면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그러면 왜 빌립이 혼자서 예수님께 가서 여쭙지 안드레에게 가서 말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을줄 압니다. 하나는 안드레도 헬라 이름입니다. 곧 빌립과 안드레는 무척 가까왔을 것입니다. 아마 둘이 있을 때는 헬라말로 대화를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헬라인이 와서 예수님을 뵙자고 하니 빌립은 제자들 중에 제일 가까운 안드레에게 찾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석연치 않습니다. 헬라인이 빌립에게 가서 부탁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빌립은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 해도 왜 직접 예수님께 찾아 가서 여쭙지 못 했는가 좀 이해가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무서웠겠나요? 예를 들어, “헬라인 몇이 주님을 뵙길 원합니다.” 제자들이 말하면 주님은 벌컥 화를 내실 것 같았을까요? 아마 그런 생각을 조금은 갖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이유라고 생각이 되는데…, 얼마전 소그룹 성경공부 교재에도 나왔겠지만, 마가복음 7장에 보면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여인이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구하니 주님께서 먼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주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주님의 입에서 헬라 여인을 향하여 ‘개’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가슴이 조마조마 했을 것입니다. 한 마디 말로 그동안 쌓았던 탑이 다 무너지는 것이 눈 앞에 보이는듯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여인은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어떻게 보면 여인이 예수님을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응답을 받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지만 아마 두 제자는 그 때의 충격에서 채 가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혼자 가기 어려우니 우선 친한 안드레를 찾아 갑니다. 그러니 안드레도 가슴이 두근반 두근반 합니다. 이번에도 주님께서 헬라인들에게 ‘개들’이라고 말할지도 몰라 무척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님께 구했을 것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사실 안드레와 빌립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조심스럽게 여쭌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뜻밖에 답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그동안 살아 오셨고 특히 공생애 3년을 지내셨다는 뜻의 말씀인 것입니다. 헬라인이 당신을 찾아 온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한 마디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온 인류 곧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위하여 오셨고 이 위대한 과업을 위해서 오늘까지 왔으며 앞으로도 이 위대한 과업을 영광 중에 마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수로보니게 여인 곧 헬라여인이 찾아 왔을 때는 마치 당신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구원자처럼 보이려 하셨습니다. 아니 주님은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공생애를 마치면서 당신 스스로를 환하게 나타내십니다. 헬라인을 비롯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나타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과 헬라인들은 특히 헬라인들은 더 신이 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니 이제 기다리고 기다린 보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헬라인들은 자기들이 나타나니 갑자기 주님께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니 헬라인들을 통해서 뭔가 큰 역사가 이뤄질 것을 자연히 기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헬라인들도 귀를 기울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헬라인들도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영광을 얻으신다고 하시더니 고작 하시는 말씀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주님은 이 중요한 시간에 바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바로 당신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광의 삶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솔로몬의 궁전에 앉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바로 한 알의 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한 알의 밀이 온 인류를 지금도 존속하게 하는 기본 단위입니다. 한 알의 밀들이 있지 않았으면 벌써 인류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까지 인류를 존속시킨 것은 거대한 나무들이 아니었습니다. 나무가 없는 사막에도 사람들은 살아 왔습니다. 한 알의 밀 때문에….

한 알의 밀이 온 세상을 존속시키는 기본 단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겸손히 한 알의 밀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영광이십니다.

 

가장 멋진 자세로 지내는 식물로는 금방 생각이 나는 것이 은행나무입니다. 특히 가을 단풍이 지면 정말로 멋진 노란 장관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은행나무입니다. 그런데 은행나무는 몇 천년씩 사는 것이 예사라고 하니 정말로 은행나무야 말로 최고의 식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무의사 우종영씨는 은행나무를 ‘나무의 왕’으로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반면 은행나무의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무과라는 한 종류밖에 없는 외로운 나무라고 합니다. 더구나 독립수라는 특성 때문에 숲을 이루지 못합니다. 저희들끼리 한데 어울려 자라지 못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워낙 크게 자라다 보니 주변에는 작은 풀조차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거대한 몸집으로 땅속의 영양분을 독식하고 넓게 뻗은 가지로 해를 전부 가리니, 그 근처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다른 나무들에겐 곧 죽음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은행나무는 병충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독을 만들어 냅니다. 스스로 살기 위해 자구책으로 독을 만들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주위의 모든 생명체를 물리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얼마나 독하면 집안의 개미를 없앤다고 일부러 은행나무 잎을 방바닥에 깔아 놓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무 의사 우종영씨는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만일 나무로 태어난다면 아니 은행나무로 태어난다면 어떨까…?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 안 깊이 숨겨진 비밀을 생각하면 은행나무가 된다는 것에 선뜻 자신이 서질 않는다. 천 년이고 이천 년이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삶은 결국 철저한 외로움을 전제로 얻은 게 아니던가.”

 

여기에 우리 주님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스스로를 나무의 왕인 은행나무로 비유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찮아 보이는 곡식 밀로 비유를 하십니다. 그리고 밀의 철학을 가지고 그 위대한 과업을 완성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칭송받는 은행나무의 철학을 따르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수 없는 밀의 철학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도리어 최고로 멋진 삶을 사시지 않았을까요?

 

Shane Claiborne이라는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분이 자기 친구 목사에게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더 이상 순교자가 없다는 거야. 우리에게는 유명 인사들만 있어!”

한 알의 밀은 없고 은행나무만 잔뜩 남아 있다는 뜻일줄 압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저는 이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할수 밖에 없는 이유를 잘 압니다. 은행나무는 쉽게 보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은 보이지 않습니다. 땅에서 썩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도 온 세상에는 주님의 영광이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어지는 곳에 주님의 영광은 빛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알의 밀이 되십시다. 한 알의 밀이 온 세상을 세우는 영광스러운 기본 단위입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되셨습니다.

 

얼마전 이해인 수녀의 글을 읽으면서 한 알의 밀이 되었던 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주 소개해는 윤동주 시인입니다.

수녀님은 여중 시절에 처음으로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접한 후 그 안에 있는 모든 시를 좋아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시’를 읽었을 때의 그 향기로운 여운과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이 시는 지금도 전 국민의 애송시라지만 나 역시 기도처럼 ‘서시’를 자주 외우며 살았고, 어쩌면 그 시의 영향으로 수도자의 삶을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견뎌왔는지도 모른다.”

그 후에 암으로 투병할 때도 짬짬이 시를 쓸 수 있는 저력은 모태신앙의 영향과 더불어 윤동주의 시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그동안 미국에서 살았고 한국 뉴우스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한국에 한 때는 탈옥수 신창원 형제가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 신창원 형제에게 수녀님은 어떤 훈계의 말을 하기 보다는 다음과 같이 권유하였다고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싶었던 선한 마음이 분명 속 깊이 있었을 테니 그 마음을 다시 꺼내 보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답장이 오기를, 깨우쳐 줘서 고맙다며 ‘사실 엄청난 잘못을 한 것에 비해 참회하기는 커녕 별 죄의식도 없이 산 것 같다’고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제는 수녀님을 이모라고 부르며 종종 러브레터를 보내오곤 한다고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된 윤동주 시인의 삶이 이해인 수녀의 삶에서 열매를 맺었고 이어서 신창원 형제를 비롯 또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윤동주 시인은 은행나무가 아니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멋진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멋진 인생은 우리들 앞에도 환히 열려져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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