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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부활의 증인 (빌립보서 3:10-12) 07/03/2016

 

어느 농부가 시장에 거위들을 내다 팔기 위해 막대기를 휘두르며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거위를 팔아 돈을 마련해야 하는 만큼 시장이 파하기 전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거위들에게 막대기를 휘두르며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거위들은 농부의 그런 행동에 대해 심하게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시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여행자를 만나자 농부에 대해 원망을 늘어 놓았습니다.

“우리 거위보다 불쌍한 동물은 없답니다. 이 농부란 사람은 우리를 무시하여 마구 대한답니다. 이 무식한 주인은 아무것도 모르지요. 자기가 이 정도 살게 된 것도 모두 우리 거위 덕분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또 우리 거위가 우수한 품종인 것도 모르고요.”

거위들은 꽥꽥거리며 더욱 큰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옛날에 로마를 구한 거위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 거위의 후예들이거든요. 로마 사람들은 그 거위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서 거위 기념일까지 정해 놓았지요.”

그러자 여행자가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은 거지?”

“그거야 우리 조상이………”

“그래, 너희 거위에 관한 일은 역사책에서 읽어서 알고 있어. 그런데 알고 싶은 게 있는데, 너희들이 이 농부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말이야.”

거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이 로마를 구했단 말이에요.”

여행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그 일은 잘 알고 있다니까. 나는 너희가 농부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냐고 묻고 있는 거야.”

거위들은 힘없이 말합니다.

“우리요? 우리는 아무 일도 안 했어요.”

여행자는 측은한 듯이 거위들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쓸모없는 짐승이구나. 이제부터는 그 훌륭한 조상 거위들의 이름을 팔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희들은 아무 일도 한 게 없으니까 사람들의 식탁에 오를 수밖에 없겠구나.”

여행자의 말을 들은 거위들은 깜짝 놀라서 또 다시 꽥꽥거리며 큰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어느 분이 지은 동화이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어서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조상이 로마를 구한 것이 자기들이 구한 것인냥 조상덕만 믿고 사는 거위들의 모습에서 오늘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식과 함께 성만찬을 거행했습니다. 세례식에 신학적인 여러 의미가 있지만 요즘 현대 신앙인들을 위한 가장 소중한 말씀이 있다면 저는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을 들고 싶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세례를 받은 자들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를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만 하고 입으로 자랑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를 사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세례받은 자들의 특권입니다.

한편 세례받은 자들은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 가시기 전에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몸소 떡을 떼시고 잔을 나누시면서 이는 당신의 몸이고 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선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먹고 마시라 하셨겠습니까?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을 통해서 주님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주님은 이 땅에 안 계실터이니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바로 당신의 삶 그리스도의 삶을 대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식과 성만찬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와 같은 삶을 잘 실천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사는 모습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의 권능에 동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고난 보다 사도바울은 부활을 먼저 언급하고 있나요? 여기에 사도바울의 지혜가 있습니다. 사실 고난이 먼저입니까? 부활이 먼저입니까? 당연히 고난이 먼저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부활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을 생각하는 자만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가 오늘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부활을 믿기에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기에 성만찬에 동참한 것입니다. 부활을 믿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더라면 세례식도 성만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식과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계속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10절 하반절부터 봉독해 드리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함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부활을 믿습니다. 그래서 세례식과 성만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체험하는 것과 부활을 믿는 것과는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자들이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할 때 진정 부활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활을 믿을뿐 아니라 동참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고 특히 성만찬을 베푸시면서 떡과 잔을 나누시고 이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사도바울은 순종하였고 아울러 순종하면 순종할수도 더 놀라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다음 귀절이 이를 증명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는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된 삶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이 가득찬 것을 체험하고 체험하고 또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는 삶 안에 펼쳐지는 무한한 축복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끝없는 신비한 가능성의 세계 속으로 자신을 온전히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머리로만 생각하고 입으로만 말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조상덕만 믿고 사는 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가 우리들의 몸 속에 신비하게 사용되듯이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던질 때 오는 신비한 축복의 세계가 있음을 그는 너무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와 성만찬에 참여하는 축복입니다.

 

지난 두 주 전에 저는 PCUSA총회에 총대로서 참석하였습니다. 총대가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총회장을 선출하는 것입니다. 올해 부터는 총회장을 동사 총회장으로 두 사람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두 후보가 나왔습니다. 남자 두 분이 한 팀이 되었고 또 여자 두 분이 한 팀이 되어서 출마를 했습니다.

남자분을 제끼고 여자 두 분이 동사 총회장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백인 흑인 여자 두 분이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이 분들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확신하고 있는 모습을 강하게 느낄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1주일간의 총회를 마치면서 잠시 당신들이 어떻게 출마하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2년전에 St. Louise에서 처음 만나서 총회장 출마를 의논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는 듯이 말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흑인 총회장이 하는 말이 정말 자신들이 될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지만 지금 이처럼 총회장이 되었다면서 저의 뇌리에 박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Don’t limit yourself.(자신을 한계 안에 스스로 가두지 말라.)”

 

이것이 지금 사도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두고 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부활의 세계를 향하여 늘 도전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명하시고 성만찬을 명하신 이유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한계 안에 가두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도리어 무한한 그리스도의 세계 그의 부활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 초청에 과감히 응하십시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증인의 삶입니다.

 

Victor Hugo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미래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약한 자들에게는 ‘불가능’. 소심한 자들에게는 ‘미지: 알수 없음’, 담대한 자들에게는 ‘ideal’”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미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세례를 받으신 교우 여러분의 미래는 ‘ideal’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신 분들의 미래도 ‘ideal’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의 삶이야말로 ideal입니다.

이 ideal한 삶에 우리는 초대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총회를 통해서 느꼈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번에 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세 가지 처음으로 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총회에 총대로 참석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총회 위원회 위원장으로 섬겼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영어로 회의를 주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뜻 깊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인교회가 없으면 지금 이 교단의 모습은 어떨까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광고 시간에 말씀드린대로 알라의 이름으로 이슬람 종교인이 기도를 하였는데 이를 항의한 그룹이 바로 우리 한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시작하니 미국인 중 보수적인 분들이 동참한 것입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는 인디아나폴리스에 어느 목회자는 우리 교단을 떠날까 고민하던 중에 한인들이 항의를 해서 사과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마음을 잡고 계속 교단에 머물면서 함께 섬기기로 하였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일의 시작은 600명의 총대들 중에 13명의 한인 총대들이 싸인을 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을 limit안에 가두지 않은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뿐일까요?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서 자신을 한계 속에 가두지 않으면 놀라운 일을 감당하지 않을까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 처럼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미래는 ideal합니다. 우리 개인의 미래도 ideal합니다. 우리 가정의 미래도 ideal합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도 ideal합니다. 우리 교단의 미래도 ideal합니다. 한 민족을 포함한 온 인류의 미래도 ideal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앞에는 높고도 넓은 부활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참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다. Ideal한 최고의 미래를 향하여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십시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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