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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세사람 (마태복음 18:15-20) 07/31/16

 

전라남도 고흥군에 위치한 소록도에 대해서 잘 아실줄 압니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나환자 수용소이고 이곳에 국립 소록도 병원이 있습니다. 한 때 신정식 병원장님이 계셨었는데 신 원장님은 당신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불편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병실 하나 하나를 방문하시며 환자들을 돌보셨다고 합니다. 물론 신 원장님뿐 아니라 이곳에서 섬기시는 간호사들도 아무 스스럼 없이 환자들의 손을 잡아 주기도 하고 손수건을 꺼내 침이 흐르는 입가를 닦아주기도 하고 빗을 꺼내 흘러내린 머리를 빗어주기도 하고 또 손톱깎이를 꺼내 몇 개 남지도 않은 손발톱을 깎아주기도 합니다.

한 번은 어느 방문자에게 신 원장님은 한 마늘밭을 보여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저기 저 마늘밭을 한번 보십시오, 저 마늘밭 주인은 부부인데, 부인은 눈이 있으나 다리가 없고, 남편은 다리는 있으나 눈이 없어요. 그래서 다리 있는 남편이 눈 있는 부인을 업고 서로 한몸이 되어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밭을 매죠.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일대 마늘밭에서 저 마늘밭이 잡풀 한 포기 없이 가장 잘 가꾸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그런 몸으로 몇백 평이나 되는 마늘밭을 가꾼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텐데도 저들 부부는 그저 일편단심으로 밭만 맵니다. 그래서 참으로 많은 걸 느껴요. 얼핏 보기에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불행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저들 부부와 한번 이야기를 해보면 놀랍게도 하루하루를 감사와 기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우리 소록도 사람들을 통해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 다음과 같이 말을 맺습니다.

“건강한 외부인들이 우리 환자들을 볼 때 저게 인간이냐. 저렇게 살 바에야 아예 죽고 말지 아등바등 살 필요가 뭐 있겠느냐 하겠지만, 저것이 바로 인간의 진실된 삶의 모습입니다. 생명을 부여한 절대자가 허락할 때까지는 운명에 순종하고 살아가야 하는게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저도 신 원장님의 이 말씀을 접하고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신 원장님은 특히 두 부부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진실된 삶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모든 사람에게 소개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내는 다리가 없지만 눈이 있고 남편은 다리는 있지만 눈이 없는…, 그러나 도리어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소유하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 중 하나는 진실된 인간의 모습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실줄 압니다.

그러면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소유하려면 이 나병환자 부부와 같은 여건에 처해야할까요? 사실 제가 들은 바로는 나병환자 부부가 모두 이들과 같은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병으로 인해 더 황폐해 진 분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곧 나병이 이들을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갖게 해주었다고만 생각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움은 되었겠죠. 사실 이들은 진실된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나병으로 인해 그 모습이 완성되어 간 것뿐입니다. 그러면 이들 가슴에 담겨 있었던 진실된 인간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진실된 인간의 모습의 소유자는 이웃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자들인가요? 어떻게 보면 진실된 인간을 보면 저절로 자신의 죄성도 느끼게 되니 진실된 인간의 모습과 죄의 깨달음과는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더 뚜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의 증인을 더 데리고 가서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랑하는 이웃의 죄를 깨닫게 해야 함을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정말 이웃의 죄를 회개케 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두 세 사람의 증인으로 회개를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7절 말씀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두 세 사람의 증인으로 안 통하면 교회에 말하라고 하십니다. 교회 공동체에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끝까지 이웃의 죄가 해결되도록 노력하는데 마지막은 교회에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 후는 더 이상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은 큰 각오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이웃의 죄 때문에 고민하고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당장 찾아가서 말하겠다고 결단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말했다가 도리어 사이만 나뻐진 경험을 갖고 있었던 사람은 용기를 내어서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말해야 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세사람이 함께 찾아 갔지만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은 경험을 한 사람은 용기를 내서 교회에 말하기로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는 더이상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을 알게 되어서 마음이 후련해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그동안 마음에 갖고 있었던 숙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보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중의 귀를 확 깨우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진실로’가 영어로는 ‘Truly’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원어는 ‘아멘’입니다. 곧 ‘Amen, I tell you.’입니다.

자, 우리가 기도를 마치면서 ‘아멘’하지 않습니까. 이는 ‘진실로 이루어지길 원하나이다’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멘’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종종 너무도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아멘”을 먼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말씀하려 하심을 알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웃의 죄를 잡아내기 위해 두 세사람을 찾으려고 마음을 쓰던 사람들은 갑자기 주님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18절 말씀입니다.

“Amen, I tell you,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주님은 ‘아멘’ 하시더니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동안 이웃의 죄를 고발하라 하시더니 이제는 그것과 전혀 다른 내용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아멘’ 후에 하신 말씀이 ‘아멘’ 전에 하신 말씀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은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큰 과제인 자기들과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을 들었으니 한쪽 머리에서는 계속 그 말씀이 맴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반면 한쪽으로는 방금 하신 말씀을 애써서 생각해 봅니다. ‘아멘’으로 시작하신 말씀이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웃의 죄를 꼬집어 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놀라운 차원의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얼떨떨한 가운데 있는데 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느 주석가는 다음과 같이 이 부분을 영어로 직역을 하고 있습니다.

“Once again, Amen, I tell you.”

얼마나 중요하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청중들은 전보다 더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Once again, Amen, I tell you.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청중들은 권투 용어를 쓰자면 아파커트를 얻어 맞은 것입니다. 사실 청중들은 은근히 두 세 사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세 사람으로 무엇을 하려고요? 이웃의 죄를 끄집어 내려고….

그런데 주님은 급소를 찌르신 것입니다. 두세 사람으로 이웃을 정죄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더 큰 일에 사용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사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웃을 정죄할 때 두 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하게 하라 하셨을까요? 그리고 나중에는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신명기 19:15절을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미 구약에서 모세를 통하여 한 사람을 정죄할 때 두세 사람의 증인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두세명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모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새삼 알려주시려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리고 이웃의 죄의 증인이 되는 것이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기에 이 진실된 모습의 소유자가 되라고 말씀하시기 위하여 오셨을까요?

주님은 구약의 말씀을 완성시키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께서 구약을 완성시키시고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Amen’을 외치시면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Once again, Amen, I tell you,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주님은 신명기를 통하여 주신 이 두 세 사람의 특권을 훨씬 높이십니다. 완성시키십니다. 두 세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은 이 사람이 죄인이다 아니다를 판결하는 재판장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한편으로는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안 오셔도 계속 유지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통해서 두 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곧 구약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이웃의 죄를 밝히기 위해서 두 세 증인을 찾아 다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믿는 사람들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두 세 사람을 찾아 다닙니다. 이들이야말로 인간의 진실된 모습의 소유자가 됩니다.

 

처음에 소개해 드린 나병환자 부부의 모습 안에서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생각해 보십니다. 두 분 중 한 분은 다리가 없고 한 분은 눈이 없습니다. 다리가 있는 남편이 다리가 없는 부인을 무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눈이 있는 부인이 눈이 없는 남편을 무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서로가 남의 약점을 자신의 강점으로 보완해 주었습니다. 그럴 때 최고의 진실된 인간이 되어 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이웃의 죄를 밝혀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밝힌만큼 이웃의 약점을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진실된 인간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 하찮은 죄인들 사이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찮은 죄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랍비가 휴가차 바닷가에 갔습니다. 해변가에 앉아 있는데 두 어린이가 모래성을 쌓고 있었습니다. 모래성에는 문도 만들었고 높은 성곽도 만들었습니다. 성벽도 두 겹으로 만들었습니다. 거의 끝나갈 무렵 큰 파도가 몰려 와서 완전히 모래성을 허물어 뜨렸습니다.

이를 보고 있는 랍비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두 아이는 곧 울음을 터뜨릴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아이는 배를 움켜 쥐고는 폭소를 터뜨립니다. 그리고는 다시 앉아서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를 보고 랍비는 깨닫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손을 같이 잡아 줄 사람만 있다면  그들은 웃으면서 성을 다시 쌓게 될 것임을….

 

진실된 인간은 이웃이 쌓은 성을 보고 잘 했다 잘 못 했다 평가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함께 손을 잡아 주는 것입니다. 서로의 눈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다리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눈이 되고 다리가 되어 이 땅에서 성을 쌓을 때 우리는 하늘에 무너지지 않는 성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웃에게 없는 눈을 보면서 멀리하지 마십시다. 도리어 그들은 다리를 갖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눈을 보면서 자랑하지 마십시다. 나에게는 다리가 없습니다.

반면 이웃이 갖고 있는 다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는 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폭소를 터뜨리십시다.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소유한 자들의 특징은 폭소가 아닐까요?

이를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니 폭소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폭소를 터뜨리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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