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어느 산문집에서 읽은 소록도 나환자 부부 이야기를 전해드렸었습니다. 같은 주간에 우연찮게 어느 신문에서 또 다른 소록도에 관한 글을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소록도 병원에서 의사로 수고하셨던 분의 글이었습니다. 필자는 자기가 감동 받은 분들의 이야기를 실었는데 특히 해외에서 오신 두 분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1960년도에 간호대학을 졸업한 두 외국인 수녀가 그곳에서 섬겼습니다. 이들은 소록도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20대후반의 나이에 소록도에 들어와 섬기기 시작을 하였고 그 후 2005년 귀국할 때까지 40여년간 소록도 병원에서 나환자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특히 이들은 나환자들의 대소변 목욕 식사 및 외출을 도왔다고 합니다. 이들은 나환자들에게 ‘할매’로 불리면서 검소하고 소박한 삶으로 나환자뿐 아니라 한국인 의사나 간호사들에게도 아름다운 기억을 남기어 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두 수녀들의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아름다운 나라 오스트리아를 떠나 소록도에 오게 하였나? 그리고 무엇이 20대에 와서 60이 넘도록 40년 이상 젊음과 삶을 나환자들을 위해 송두리채 바칠수 있게 하였나?’
두 가지를 생각할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 사로 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 사로 잡히지 않고는 이렇게 최고의 헌신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자들입니다. 한편 이들이 오스트리아로 떠날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줄 압니다. 곧 이들을 보낸 사람들 아니 보낸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소중한 것은 두말할나위 없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들 못지 않게 보내는 사람들도 귀합니다. 곧 보내는 교회도 소중합니다. 보내는 교회 없이 그 누구도 보냄을 받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세계 최초로 선교사를 세계 속으로 보낸 안디옥 교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모습을 살펴 보며 보내는 교회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다섯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이름이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다섯 명의 이름을 한 사람씩 거론한걸 보면 안디옥 교회에는 말씀을 잘 가르치는 선지자와 교사가 다섯명씩이나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곧 안디옥 교회는 말씀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보내는 교회의 첫번째 모습은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말씀을 그 무엇 보다 소중히 여기는 교회입니다. 얼마나 소중히 여겼던지 사도행전의 저자는 다섯 명의 이름까지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내는 교회의 첫번째 특징은 말씀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수많은 교회가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는데 왜 하필 안디옥 교회가 세계적인 선교하는 교회가 되었는가 궁금한 생각이 들수 있다고 봅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른 교회에 없는 특별한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특별한 점을 찾으려면 아주 쉽게 찾을수 있습니다. 다섯 명의 이름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한 마디로 다섯명의 리더가 모두 배경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배경을 잠시 살펴 볼까요? 먼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4:36절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곧 바나바는 유대인이긴 하지만 구브로 현재 Cyprus라고 불리우는 요즘 씨리아 난민들이 많이 온다는 구브로 섬 출신입니다. 그 다음 리더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입니다. 니게르는 흑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당시 북아프리카인 중 크리스챤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떤 연고인지 북아프리카에서 온 리더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 구레네는 요즘식으로 하면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있는 도시입니다. 곧 이 사람도 북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왕족 출신입니다. 그런데 헤롯 왕가는 순수 유대인들은 아닙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는 사울입니다. 물론 사울은 유대인이지만 출생지는 다소라는 소아시아의 작은 도시입니다. 바나바처럼 이민 2세라고 할까요?
다섯 명의 선지자 내지 교사들이 모두 다릅니다. 달라도 보통 다른게 아닙니다. 유대인, 흑인, 구레네 사람 그리고 왕족….
어떻게 이들은 이처럼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었지만 교회를 하나로 이끌고 나갔을까요? 어느 신학자는 말하기를 사도행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안 나온다고 합니다. 이유는 사랑은 당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다섯 지도자가 서로 사랑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쉽게 확신할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말씀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제가 대학교 1, 2학년 때 그러니 벌써 약 45년전이네요. 저는 얼마전 같이 느껴지는데…. 하여튼 그 때 심리학자 Eric Fromm의 ‘Art of Loving’이라는 책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아마 ‘사랑의 기술’로 번역된 것으로 압니다만, 그 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그 때 그 때마다 노력하고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사랑의 대상이 어떤 사람이고 그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분의 이론대로 안디옥 교회를 생각한다면 그들은 어떤 사랑의 기술자들이 되어 갔을까 생각해 볼만 합니다. 이것도 다섯 명의 이름을 생각하면 쉽게 추측할수 있습니다. 이 다섯명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달랐지만 공통적인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모두 떠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제가 다섯 명의 리더만을 말씀드리지만 다섯 명의 리더가 달랐더라면 일반 교우들은 훨씬 더 다양하지 않았을까요? 서로 서로 말도 잘 안 통하고 쉽게 오해도 하고 별의 별 일들이 많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상처도 많이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놀라운 일이 생겨났는데 보내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 가운데서 사랑의 기술자들이 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7080세대입니다. 요즘도 자주 듣는 음악 중 하나가 7080노래입니다. 그런데 교우님들 중에 7080세대가 많이 있는데 교우님들이 좋아하는 분이지만 제가 처음 듣게 된 가수가 있습니다. 이문세입니다.
얼마전 집사람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모두들 이문세를 좋아하는데 아마 우리가 한국을 떠난 다음에 나온 가수인가 봐.” 사실 저희는 81년도에 한국을 떠나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문세가 7080가수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유투브로 이문세를 찾아 가지 않습니다. 김민기 양희은 등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 들었던 가수가 좋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이문세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저를 생각하는 것과 김민기 양희은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저를 생각하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날 것입니다. 김민기, 양희은을 좋아하는 분은 괜히 커피라도 사주고 싶은 생각이 드실줄 압니다.
아니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이문세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같은 7080세대로서 저를 이해하지 못할줄 압니다.
저는 그저 재미있는 예를 들었지만, 떠남의 시간 차이로 인해서도 서로가 얼마든지 오해할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이 것이 이민자들의 신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특별한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안디옥 교우들은 이런 이민자의 신비를 잘 이해하고 있었을줄 압니다. 작은 오해가 생기면 이웃을 정죄하기 보다는 떠남의 삶이 주는 특성을 먼저 생각하면서 서로 오해를 풀고 사랑으로 감싸는 축복을 누렸을줄 압니다.
그런데 저는 같은 한국인 그것도 같은 7080세대 안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만, 안디옥 교회는 훨씬 다른 문화 배경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극복해야 할 이민자의 신비는 더욱 깊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픔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모두 믿는 사람들이라 모든 것이 평화로울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니 고향을 떠나 온 아픔도 나눌수 있어서 더 기대가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reality를 보는 것은 얼마 안 걸렸을 것입니다. 도리어 떠나온 아픔 위에 새로운 아픔이 늘 더해집니다.
도저히 같은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이해할수 없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아픔을 이길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말씀이었습니다. 말씀 가운데서 이웃을 보니 그 이유가 눈에 들어 옵니다. 모두 떠나온 사람들이고 떠나온 곳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도착한 곳만 같습니다.
말씀 안에서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웃의 행동을 비판하기 보다는 이웃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감싸 주기 시작합니다. 아니 서로의 아픔을 존중합니다. 그렇게 되니 이웃도 자신의 아픔을 감싸 주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아픔도 존중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아픔은 도리어 놀라운 재산이 되어 갑니다.
이스라엘이 주변의 아랍국들을 무찌른 6일전쟁에 대해서 잘 아실줄 압니다. 1967년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발발한 아랍 연맹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입니다. 재밌는 것은 이스라엘 측에서는 6일만에 끝났다고 해서 6일 전쟁이라고 부르고, 아랍 세계 측에서는 6월에 전쟁을 하였다고 해서 6월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당시 어떤 외국인이 이스라엘을 방문중에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가 만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국인이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250만명의 유대인밖에 없지 않는가? 이에 반하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아랍 측은 1억 수천만 명이나 되지 않는가?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꼭 승리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유대인들은 250만뿐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나치스 독일에게 학살당한 600만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있다.”
250만명의 유대인이 1억 수천만 명이나 되는 아랍 연맹과 싸워 승리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600만명이 겪은 민족의 아픔을 지니고 싸우는 250만명의 유대인들은 경이로운 승리를 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은 도리어 그들을 경이로운 민족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가 왜 이처럼 세계 역사를 바꾸는 교회가 되었는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떠난 자들의 교회였습니다. 떠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이민자들의 교회였습니다. 아울러 새로운 만남의 현장 안에서 발생하는 각자의 아픔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하나 될 때 그 모든 아픔들은 경이로운 재산들이 되어 간 것입니다. 사랑의 기술로 서로의 아픔을 놀라운 보화로 바꾸어 나간 것입니다.
이처럼 경이로운 재산들이 가득찬 안디옥 교회에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2, 3절 말씀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경이로운 교회가 금식하며 기도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를 가만 놓아 두시겠습니까?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결국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세계를 향해 첫 선교사로 보냅니다. 세계 역사상 첫번째 보내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말씀의 교회, 사랑의 교회, 기도의 교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최초 세계 선교사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안디옥 교회만 못해도 저희 교회도 2000년부터 해외 단기 선교단을 파송하였습니다. 먼저 이 시간을 빌어서 그 동안 단기 선교단을 파송할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줄 압니다. 그리고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올해는 저희가 단기 선교단 파송을 Zika Virus로 인해서 취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올해 한 해 쉬게 하시는 이유는 더욱 경이로운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선교에 도구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아픔도 우리를 경이롭게 하는 도구였음을 새삼 깨닫는 것입니다. 곧 서로의 아픔을 존중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며 아울러 말씀과 기도의 교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교회를 어떻게 기가 막히게 사용하실까 오늘부터 다시 고민하시기 시작하셨을줄 압니다. 주님께 더 큰 고민을 안겨 드리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전 60년사가 편찬되었는데 16년전 곧 2000년도 해외 첫 단기 선교 준비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편 선교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었다. 본 교회 교육위원회와 대학.청년부가 ‘증인 되리라’라는 주제로 페루 단기선교 위한 음악회를 열어 $6,000 상당의 기금을 모았고, 교회의 여러 부서가 음식 판매, 골프대회, 티셔츠 판매 등의 형태로 선교기금 마련을 도았으며, 선교를 위한 특별헌금과 어느 한 교우의 헌금등이 결실을 맺어 선교팀을 보낼 수 있는 재정이 확보되었다. 또한 여러 제약회사와 선교기관에서 기증받은 의양품 ($50,000) 상당이 갖춰지면서 의료 선교팀이 떠날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저도 지금도 이 때 열었던 음악회가 종종 기억이 나곤 합니다.
지난 16년간 단기 선교단을 파송할수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말씀과 기도로 인해서 선교의 싹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자라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교우 여러분,
계속해서 사랑과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십니다. 보내는 교회의 축복을 계속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