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대학교 졸업시즌이 되면 감동적인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소개되어지곤 합니다. 올해 졸업한 졸업생 중에도 많은 분들의 관심이 되었던 분이 있습니다. 올해 67세로 Columbia Univ.를 졸업한 David Norman이라는 분입니다.
뉴욕 Harlem에서 자라면서 11살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15살에 마약을 시작합니다. 18살에 처음 감옥살이를 하고 그 후 수차례 감옥을 드나듭니다. 마지막으로 칼부림을 한 후 1997년도에 감옥에 또 들어갑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때부터 변화가 일어납니다. 혼자서 공부를 하기 시작하고 드디어 감옥 안에서 죄수들을 위한 재생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2000년도에 감옥에서 나온 후 계속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합니다. Mount Vernon Hospital에서 일을 하게 되고 이는 곧 이어 Columbia 대학과 연결이 되어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대학교 교수로서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학교에서 학사증을 받기 전에 이미 교수가 된 셈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러면 21년전 감옥에서 어떤 일이 생겼나…? 혹시 이 때 복음을 듣게 되지 않았을까? 복음을 듣지 않고서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생겼을까?” 이 질문을 갖고 열심히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제가 찾은 결과는 저를 좀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같이 감옥에 갇혀 있는 감옥수에게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감옥수로부터 생전 처음 쉐익스피어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이에 자극을 받아서 혼자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쉐익스피어뿐 아니라 여러 철학책들까지….
그후 공부하는 죄수가 되고 이어서 같은 동료 죄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석방된 후에도 계속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찾아 다녔고, 결국 Mount Vernon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고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실망을 했습니다. 은근히 복음을 듣고 변해서 소외된 자를 찾아 다니는 자가 되었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한편 저의 머리에는 계속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복음이 아니라 쉐익스피어로 인해서 사람이 변하게 되었는가…?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제 머리를 휙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복음을 접한 자들은 감옥에 들어가지 않지…. 쉐익스피어를 접한 자들은 감옥에 들어 갈수가 있고…. 그러니 도리어 쉐익스피어를 접한 자를 통해 한 사람이 삶의 turning point를 맞이할수 밖에….”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을 접한 자들이 감옥에 들어 갈리는 없죠. 아니 복음을 접한 자들이 감옥에 갈 일을 해서는 안 되죠. 특히 미국 처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는…. 그러다 보니 갱생의 역사는 도리어 다른 길로 일어난 것입니다. 어쩌면 이 분의 이야기는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현주소가 어디인지를 새롭게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가지 않는 많은 곳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가면 안 되는 곳 말입니다. 그러나 쉐익스피어를 아는 사람들은 갈수 있는 곳 말입니다. 예를 들면 홍등가…. 어느덧 이 세상은 믿는 사람들이 갈수 있는 곳과 가지 못 하는 곳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가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복음을 필요로 하는 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딜레마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 현대 교인들에게 주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귀한 멧세지를 전해 주시고 계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 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죄인은 거리의 여인들 같은 사람들이었을줄 압니다. 이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이 장면에서는 주님이 찾아 가신 것은 아닙니다. 이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2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주님은 죄인들을 찾아 가시지는 않았지만 찾아 온 죄인들을 맞이해서 음식을 같이 드셨습니다. 그들과 한 공동체가 되신 것입니다. 한 부류가 되신 것입니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만 있을리가 없습니다. 뒤에서 수근거리기 시작합니다. 수근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 당시 목자들의 모습을 잘 아신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모두 고개를 끄덕입니다. 당연히 자기들도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을 들에 두고 찾도록 찾을 것이라고 공감을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청중들을 향하여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당연히 즐거워 어깨에 메고 돌아 옵니다. 청중은 계속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자기가 잃은 양을 찾은듯 혼자 즐거운 생각에 젖어듭니다. 6절 말씀입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고개를 끄덕이던 청중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려다고 멈칫합니다. 잃은 양을 찾아 즐겁게 어깨에 메고 오는 것까지는 공감이 가는데 한 마리 잃은 양을 위해 잔치를 베푼다니 선뜻 이해가 안 갑니다. 분명 주님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아주 큰 잔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차 사고가 날뻔 하다가 간신히 사고를 면했다고 하십시다. 물론 많은 분들이 그런 경험을 하신줄 압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가족들에게는 얘기하겠죠. 아니면 요즘 식으로 하면 가까운 분들에게 카톡으로 그 날 있었던 일을 말할줄 압니다. 그러나 불러다가 잔치를 베풉니까?
주님은 지금 계속 고개를 끄덕이던 청중들의 허를 찌르고 있습니다. 양 한 마리를 되찾은 후 벗과 이웃을 잔치를 베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소한 양 한 마리 이상은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정확히 벗과 이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한 마리 가지고는 분명히 부족합니다. 그러니 청중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 이게 무슨 말이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비유에는 이처럼 항상 깜짝 놀라게 하는 펀치라인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들을 혼돈케 합니다. 주님은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예상치 못한 그 무엇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당황해 하고 있는 청중들에게 주님은 마지막 펀치를 날립니다. 7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떤 분들은 당연한 말씀이지 무슨 펀치냐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줄 압니다.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유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후 큰 잔치를 벌인 것과도 연결이 됩니다.
한 마디로 하늘 나라는 사람의 계산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숫자의 개념이 없는 곳입니다. 주님은 죄인 한 사람과 의인 99사람과 비교를 하셨지만, 실은 99이 아니라 99만명이라도 매한가지입니다. 숫자의 개념이 없는 곳입니다. 하늘 나라는 사랑의 개념만 팽배한 곳입니다. 죄인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의인 99만명에 대한 사랑보다 강한 곳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함께 하는 주님을 향해서 수근거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죄인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숫자에 강한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보다 99명이 훨씬 소중하게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삯꾼 목자입니다.
반면 참 목자는 죄인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수 많은 사람으로 느낍니다. 숫자의 개념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그 한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숫자의 개념이 없으셨습니다. 한 죄인을 한 사람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수 많은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으로 보십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그들은 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 많은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주님은 영접하셨고 식사를 함께 나누신 것입니다.
자, 그럼 처음에 말씀드렸던 질문에 대한 답이 확실해졌나요? ‘우리가 갈수 없는 곳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하냐?’ 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답은 나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갈수 없는 곳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계산에 초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 한 사람을 수 많은 사람보다 더 귀하게 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있는 현장에서 소외된 한 사람을 수 많은 사람들 보다 귀하게 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소외된 한 사람 안에 한 민족을 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계산을 넘어 넘치게 불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옥 가는 자들이 적어지고 홍등가에 가는 자들이 적어지지 않을까요? 물론 감옥 선교와 홍등가 선교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외된 한 사람 안에서 한 민족을 보는 자들이 이러한 선교를 해야 하고 이런 선교를 하지 않을지라도 이미 선교적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참 목자로 살았던 성 프란시스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뱃속 깊은 곳에는 성스러운 고행자도 있고 무섭고 더러운 유충(애벌레)도 잠들어 있습니다. 몸을 굽히고 이 유충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그 유충은 날개가 돋아서 나비가 됩니다.
유충은 징그럽고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비로 바뀌면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나비’처럼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에게 다가가 ‘사랑합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해줌으로써 깨어나도록 하는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은 유충의 단계를 지나 나비가 됩니다.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만나는 모든 이들 속에 있는 ‘유충’들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씨를 뿌리도록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뿌린 사랑의 씨앗은 꽃을 피우지 않고 스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쉐익스피어를 몰라도 됩니다. 이웃 안에 있는 애벌레에게 ‘사랑합니다’ 말을 할줄 알면 됩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위대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죄인 안에 있는 애벌레에게 ‘사랑한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소외된 자를 향해….
“사랑합니다.”
그들 안에 있는 징그러운 애벌레는 도리어 아름다운 나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 많은 아름다운 나비의 세계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유명한 빌 코스비(Bill Cosby)가 요즘 젊었을 때 저지른 일 때문에 많은 곤혹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은 후 그는 감동적인 말을 합니다.
“He was my Hero.”
제가 그 뉴스를 듣고는 저희 교회 성경공부 시간에 말씀드렸었습니다. 어느 교우님은 그 후 당신의 아들에게 “My Hero”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도 저희 아들에게 그 후로 “My Hero’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My Hero’라는 말을 듣고 자란 자녀들이 후에도 자녀를 향해서 ‘My Hero’라고 부르게 되지 않을까요? 한편 그들 안에 있는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자녀들에게뿐 아니라 소외된 자를 향하여 “My Hero”라고 부른다면 정말로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이제 새학기를 맞이해서 많은 분들이 보스톤을 찾아 옵니다. 이들 모두 나그네들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어떤 마음으로 대하시렵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소외된 자를 사랑해야 함을 피에르 신부가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합니다.
“성소의 아름다움은 대리석 포석이나 장식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소 주변에 주거지 없는 가족이 단 한 가족도 없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성소 주변은 지저분한데 성소만 아름답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성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로 조금 바꾼다면, “성소의 아름다움은 감옥에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전에 어떤 새 교우는 저희 교회 본당이 아름다워서 계속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정말 언제 더없이 아름다워질까요? 감옥에 아무도 없는 세상이 되기 전에는 참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을까요?
교우 여러분,
믿는 사람들이 가야 할 곳이 있고 가면 안 되는 곳이 있습니다. 주님의 성전에는 늘 와야 합니다. 그러나 홍등가나 아니면 죄를 진 후 감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사람들이 있는 한 성소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발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감옥이 사라질 때까지 소외된 자를 사랑하십시다. 그들 안에 있는 애벌레를 사랑하십시다. 아름다운 민족이 탄생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