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자가 한 광부를 따라 탄광에 들어 가 본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땅 위의 직업’입니다.
“강원도 사북에 간 김 기자는 광부 김장순 씨를 따라 수직갱으로 들어갔다.
먼저 탈의실에 들어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헤드 램프가 달린 헬멧을 쓴 뒤,
작업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7백 미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갱차를 타고 수평으로 1천 2백 미터까지 가서, 다시 갱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미로와 같은 갱 속은 춥고 어두웠다. 지하 사무실에서 막장으로 가는
지도를 보았으나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갱 양편으로 탄가루가 섞인 검은
지하수가 급히 흘러갔다. 갱 바닥은 탄가루와 뒤범벅이 돼 장화 신은 발이 푹푹
빠졌다.
김 기자는 오직 헬멧에 부착된 희미한 불빛만 의지하고 김장순 씨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 30여 분쯤 걸었을까. 더 이상 갱도가 없는 곳이 나타나고,
갱벽 한가운데를 비스듬히 위로 뚫은 새로운 갱도 하나가 나왔다. 두세 사람 정도
겨우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좁은 갱 속을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면서 들어가 보니 그곳이 바로 지하 막장이었다. 광원들은 좌우로
버팀목을 세우며 안으로 안으로 파들어가고 있었다. 김장순 씨가 한 번씩 곡괭이를
내리찍을 때마다 탄덩이가 떨어져 나왔고, 떨어져 쌓인 탄덩이는 경사진 배출구를
통해 갱도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김 기자는 곡괭이질을 하는 김장순씨를 지켜보며 막장에 널브러져 있는 버팀목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막장 안은 지열 때문인지 몹시 더웠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고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도 없는 땅 속 저 깊은 곳,
어딘지도 모르는 한 지점에 한 마리 벌레처럼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막장에서는 잠을 못 자게 합니다. 담배도 못 피이지요. 그런데 어떤 때는 앉은
채로 깜빡 졸 때도 있습니다.”
김 기자는 곡괭이질을 하는 중간 중간 한 마디씩 던지는 김장순 씨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를 취재한다는 일이 자기로서는 너무나 건방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김장순 씨가 막장을 나온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다시 갱 속에 있는 지하
사무실로 가 그곳에 보관해 둔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어둠 속에서 손도 씻지 않고
작업복도 입은 채 그대로였다.
“드세요. 우린 여기서 이렇게 점심을 먹습니다. 그래도 이때가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김장순씨가 김 기자의 몫으로 싸온 도시락을 건네주면서 허옇게 이빨을
드러내었다. 김 기자는 김장순씨가 건네준 도시락을 먹으면서, 광원이 된 지 몇
해나 되는가, 고향의 농협 빚은 다 갚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가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건 물론 땅 위의 직업을 갖는 일이지요.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직업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잘 몰라요.”
김장순씨가 그후 땅 위의 직업을 얻게 되었는지 못 얻었는지는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의 삶에 큰 도전을 주는 표현입니다. ‘땅 위의 직업이 얼마나 좋은지를….’
오래 전 이 글을 읽었는데 늘 저의 뇌리에 남아 있곤 한 글입니다. 왜 저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사람은 늘 더 좋은 세계를 향한 갈망 가운데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땅 아래서 일하는 분들은 땅 위의 직업을 그리워합니다. 반면 김장순씨가 땅 위의 직업을 얻게 되면 또 다른 더 좋은 세계를 갈망하지 않았을까요? 우리 모두가 땅 위에 직업을 가진채 새로운 역사적인 세계를 늘 갈망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상고하며 더 좋은 세계를 이 땅에서부터 어떻게 누릴수 있는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으면서 종교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이 땅의 삶에 많이 만족하였고 반면 그래서 그런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주님과 부활논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잘 아는 종교인이니 율법으로 주님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논지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게 하라는 율법의 말씀이 있습니다. 곧 연약한 여인인 형수를 위한 사랑의 법입니다. 이 선한 법을 가지고 주님을 공박합니다. 20절 이하 말씀입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는 것을 이 논리로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부활 후 한 여자를 중심으로 일곱 형제가 둘러 싸 있게 되는데 이는 상상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부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없습니다. 24, 2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아마 이들은 속으로 불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니 우리는 이래 뵈도 전통있는 사두개인들인데…. 단지 부활을 안 믿는다는 것뿐이지 우리가 성경을 왜 몰라….”
이들의 속 생각을 알아채셨는지 주님은 이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일깨워주십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아마 사두개인들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이야기는 잘 아는데 어떻게 이 말씀을 부활과 연결시킬수 있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죽지 않았는가? 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부활을 증명하는가?”
여기에 주님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주님은 먼저 떨기나무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출애굽기 3:2절에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나 볼까요?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주님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 부활의 능력이 떨기나무에 임하였음을 사두개인들에게 일깨워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떨기나무에 불이 임하였습니다. 죽은 것 같은 떨기나무가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러면 하물며 사람에게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떨기나무였습니다. 오래 전에 죽은 떨기나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2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떨기나무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곧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 속에 살아 계셨던 것입니다. 죽은 떨기나무 같은 그들의 이야기 안에 하나님은 불꽃 처럼 살아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 15절에 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떨기나무, 이삭이라는 떨기나무, 야곱이라는 떨기나무에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도 살아계신 산 자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아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스스로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필 하나님은 왜 이 세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이 세 분의 특징을 알면 크게 도움이 될줄 압니다. 이 시간 이 세 분의 특징을 나열해 드릴테니 여러분은 어느 분에게 가깝고 어느 분이 제일 존경스러운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일 먼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약속을 받았다는 말은 듣기는 좋아도 살기는 괴로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5세 때 약속을 받습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25년간 아들 낳는 일에 실패합니다.
드디어 25년만에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약속을 받은 자로서 떳떳하게 살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실패의 고통을 맑게 씻은듯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약속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오릅니다. 역시 자신의 삶은 정녕 실패자의 삶이었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기적적으로 양 하나를 예비해 주셔서 이삭 대신에 양을 제물로 바치고 내려 옵니다.
그러나 이날 받은 충격은 25년간의 실패의 충격을 되살아나게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사람으로서 평생 산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아브라함과 비슷합니까?
다음 이삭은 말씀드린대로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느 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산에 올라가고 끝내 제물이 되어서 나무 위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시퍼런 칼 날이 막 내려 오는 순간입니다. 평생 이것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삭은 상징적으로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삼촌네 도망 가서 아내를 넷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들을 12을 얻게 됩니다. 12아들이 곧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2지파는 예수님의 12제자로 이어집니다. 결국 야곱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자, 세 사람을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삭은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약속의 성취를 누린 사람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떨기나무처럼 죽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산 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아니 오늘도 만들어 가시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떨기나무를 아브라함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삭이라는 떨기나무를 이삭으로 부르셨습니다. 야곱이라는 떨기나무를 야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산 자의 하나님은 이 세 떨기나무를 모두 필요로 하십니다. 지금은 우리를 부르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처음 말씀드린 김장순씨가 땅 위의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갖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만약 갖게 되었어도 얼마나 오래 행복했을까요?
인간의 참 행복은 내가 이룬 일로 인해서 오질 않습니다. 3대를 거쳐서 이루어진 일로 인해 올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3 세대의 하나님으로 우리를 찾아 오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어떤 세대는 아브라함처럼 약속을 받는 세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어떤 세대는 이삭과 같은 십자가의 세대가 있습니다.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어떤 세대는 야곱처럼 약속의 완성을 보는 세대가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면 안 되는 세대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한 세대만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우리 산 자의 하나님은 삼 세대를 통하여 나타나십니다. 삼 세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면 땅 아래에서 살던 땅 위에서 살던 상관 없습니다. 새로운 영광의 세계를 늘 체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은 삼 세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진급주일로 지킵니다. 저희 자녀들이 한 학년씩 진급하여 새로운 선생님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그 중 주일학교에서 중고등부로 진급하는 자녀들은 새로운 선생님뿐 아니라 교역자를 만납니다. 새로운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진급주일을 맞이해서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는 큰 아픔이 있습니다. 중고등부를 졸업하고 떠나는 자녀들로 인한 아픔입니다. 물론 여러 여건상 멀리 떠나야 하는 자녀들도 있지만…, 계속 저희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삼 세대로 자라기를 원하는 자녀들을 위한 영어회중이 없다는 것이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물론 가까운 다른 교회를 다닐수도 있지만 삼 세대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곧 오늘 저희 교회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이름에 이미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야곱이 없다면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의미가 있을까요? 이삭이 없다면 야곱을 통한 약속의 완성이 있을까요?
우리는 모든 세대가 소중합니다. 속히 영어세대와 더불어 삼 세대를 통해 일하시는 산 자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길 오늘 진급주일을 맞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종종 저희 집사람이 기독교TV 방송을 통해 들은 좋은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곤 하는데 지난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계신데 어릴 때 불우한 집에서 태어나서 11살에 어느 집에 입양이 됩니다. 양부모님이 너무 잘 해 줘서 좋은 신앙인으로 자랍니다. 15살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닥쳐오곤 했는데 제일 어려웠던 것이 친한 분들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12년동안 9분의 가까운 분들을 잃습니다. 특히 불우한 집에서 태어나서 양부모 집에서 살았으니 인간 관계가 얼마나 소중했겠습니까?
그런데 9개월 사이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아버지를 방문하고 차에 탔는데 너무도 슬픔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한참 슬픔에 잠겨 울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습니다. 천사의 손으로 느낍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손이었습니다. 이삭의 손 아니 야곱의 손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산 자의 하나님의 손이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자녀나 손주들의 손이 우리 어깨에 닿을 때 우리는 이미 땅 위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손자의 손이 우리 어깨에 닿을 때 이미 그 손은 하나님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손자의 손으로 인해서 최고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삼 세대가 하나가 되어 이 땅에 꼭 필요한 역사를 이루어 가는 최고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Anais Nin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꿈을 연처럼 하늘로 날리십시오. 놀라운 일들이 생기지 않을까요? 새로운 삶, 새로운 친구, 새로운 사랑, 새로운 나라.”
교우 여러분,
삼세대의 꿈을 날리십시다. 놀라운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 세대의 하나님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