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컴퓨터는 잘 하진 못하지만 이멜 주소는 세 개를 갖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 된 것이 aol입니다. 아침에 QT를 마치면 이멜을 열어봅니다. 지난주 어느날 여느 때처럼 AOL을 열었습니다. Aol은 이멜 보다 먼저 그 날 주요 뉴우스가 쭉 나옵니다. 그중에 관심이 있는 제목이 나오면 원하는 뉴우스를 열어 봅니다. 제 눈을 끄는 제목이 하나 눈에 들어 왔습니다. 집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Good News라고 써 있기에 안 열어 볼수가 없었습니다. 더 제 마음을 끄는 말들이 이어집니다.
1981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제가 해당이 됩니다. 계속 이어지기를 정부에서 이들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아직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한 달에 $200을 세이브할수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올해말까지 유효하니 아직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또 내려가 보니 1951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1953년 생이니 가까스로 합격했습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아래 웹싸이트만 클릭하라고 합니다.
한편 의심이 생겼습니다. “이건 장사꾼들이 올려 놓은 건 아닌가?” 그런데 말씀드린대로 뉴우스 section에 올라온 글입니다. 그래서 이건 진짜다 하고 자신 있게 클릭했습니다. 클릭을 하니 일단 저의 info를 넣어야 합니다. 그럴수밖에 제가 1953년생이라는 것을 알리려면 당연히 넣어야죠. 집주소와 전화 번호를 넣고 클릭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광고가 나오더러구요.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씁쓸한 마음으로 콤퓨터를 끄고는 산책을 나갔습니다. 산책 나간지 5분이 되기 전에 전화 하나가 걸려 왔습니다. Id를 보니 번호만 뜹니다. 혹시 교우님인가 해서 전화를 받았더니, 융자 회사였습니다. 정중히 끊었습니다. 다시 5분만에 또 걸려왔습니다. 이번에는 1-800 전화였습니다. 아예 받지 않았습니다. 그 날 하루 다섯 차례 더 그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 전화들은 그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까지 끈질기게 이어졌습니다.
혼자 생각해 봤습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함정에 잠시 빠졌음을 느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집을 소유한 사람이면 대개가 1981년 전에 태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그 후에 태어난 사람도 소유한 사람은 가물에 콩 나듯이 있겠죠. 그리고 1951년 전에 태어난 분들은 지금쯤은 몰게지를 다 갚았던가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이 태반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1951-1981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만 특혜를 준다고 하니 눈이 번쩍 띄인 것입니다.
게다가 2016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하니 더 귀가 솔깃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산책하며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힌 착안이었습니다.
한편 감사한 것은 사실 목회를 하다 보면 세상일과 멀어지곤 하는데 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잠시라도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은 요즘 머리 좋은 젊은이들이 이런 일을 하면서 데스크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윤리적으로 바른지 그른지를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환경을 함께 나누고자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 가운데 살아야 하는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하자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청년회 헌신 예배로 드립니다. 이런 환경 가운데 사는 청년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지혜로운 왕이었던 솔로몬을 통해 들어 보겠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이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한 마디로 ‘세상을 즐겨라. 그러나 심판이 있음을 알라.’ 이제 착한 청년들은 결심하기 시작할 겁니다. ‘언젠가 심판이 있으니 즐기기만 하는 것보다는 뭔가 사회에 큰 공헌을 하면서 살아야지….’
이런 결심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E. B. White이라는 분의 말입니다.
“매일 아침 두 마음이 나를 괴롭힌다. 하나는 세상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마음과 하나는 세상을 즐기고픈 마음이다. 이 때문에 하루를 계획한다는 것은 늘 어렵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즐길수 있는 많은 것들을 주셨고 또 좋은 일을 많이 할수 있도록 만드셨음을…. 그는 이 두 가지 사이에 늘 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고뇌였습니다. 아니 헷갈림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말씀을 듣고 많은 청년들이 비슷한 고민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즐기며 살고 싶고 한편으로는 심판이 있으니 좋은 일을 해야 하고…. 이런 고뇌를 하는 청년들에게 솔로몬은 계속 말씀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역시 또 헷갈립니다. 근심이 마음에서 떠나게 하고 악이 몸에서 물러 가게 하는 유일한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스스로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다음이 ‘악이 몸에서 물러 가게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영어 성경으로는 ‘악’이 ‘고통’ 곧 ‘pain’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고통 보다는 ‘처참’ ‘misery’로 해석하는 분도 있습니다. 곧 자신을 즐겁게 함으로 고통이 몸에 머물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곧 두 사이에서 헷갈려하는 청년들에게 솔로몬은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즐겁게 살아라.” 그런데 이번에 조금 다른 것은 심판을 언급하는 대신에…,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먼저 말씀드릴 것은 전도서에서 ‘헛되다’라는 뜻은 많은 경우 ‘이것도 지나가리라’의 의미가 깊게 담겨져 있습니다.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 곧 청년 시절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를 정리하면 9절은 즐겁게 지내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이 강합니다. 반면 10절은 청년의 시절이 빨리 지나가니 청년의 시절을 즐겁게 보내라는 뜻이 강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9절과 10절의 순서입니다. 먼저 10절이 기록되었다고 가정하십니다. 그리고 9절이 뒤쫓아 옵니다. 그러면 심판이 더 강하게 강조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이렇게 끝납니다. “너를 심판하실줄 알라.”
그런데 다행히도 10절의 내용이 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년의 때가 곧 지나니 즐겁게 지내라는 내용이 더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심판 보다는 헛됨이 더 강조가 되는데 헛됨은 청년시절이 빨리 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E.B. White처럼 즐기는 것과 좋은 일을 하는 것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청년들에게 속 시원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껴서 헷갈리게 살지 말고 매일 즐겁게 살아라. 심판을 두려워 하는 것도 중요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나가고 있는 청년 시절을 즐겁게 지내는 것이다.’
우리 청년들의 눈들이 반짝이는게 보입니다.
사실 솔로몬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청년의 때에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즐거워 할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즐거워 할줄 알았던 사람들이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도 즐거워 할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즐거워 할줄 아는 자들을 좋아 하십니다.
링컨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어야 한다.” 요즘 청년의 정의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청년의 시절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서 40세 자기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뜻으로 해석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청년 시절에 즐거워 할줄 알았다면 40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쉽게 상상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솔로몬의 전도서를 잘 이해해서 그런지 요즘에도 유대인들은 솔로몬의 정신을 많이 이어 받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세 가지 특징을 어느 랍비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육, 유머, 음악. 교육에 대해서 너무 잘 아실줄 압니다.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유대인 중에 많이 있습니다. 유머로 인해서 어떻게 보면 그들은 나찌 Holocaust를 견뎠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번째는 음악입니다. 음악에 관한 이야기만 잠깐 해 드리면, 어느 랍비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 가족들은 합주를 자주했다. 큰 누나인 골다는 만돌린을 연주하고, 작은 누나 라헬은 피아노를 치고 아버지와 형 시몬은 바이올린을 켰다.
우리들은 베토벤이나 바하나 쇼팽의 곡들을 우리나름대로 편곡해서 합주했다. 우리들이 합주를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창밑에 모여들어서 마치 음악회와도 같았다. 대부분의 유대인 가정은 가족끼리 합주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합주하지 않을 때면 사람들은 다른 집 창밑으로 모여들었다.”
유대인들은 따로 음악회를 갈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이 집 앞에 모이고 하루는 저 집 앞에 모이고…. 이 외에도 유대인들은 춤추면서 축제를 많이 엽니다. 아마 축제가 많은 민족중 하나가 유대인일줄 압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솔로몬의 말씀을 따라 어려서부터 세상을 즐길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인들에게는 대학자도 많이 나왔고 음악가도 많이 나왔고 수많은 역경을 이긴 자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솔로몬이 원하는 모든 것이었을까요? 교육과 음악과 유머가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서 후손들에게 주고 싶은 그 모든 것이었을까요?
솔로몬은 이 모든 것을 열심히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멧세지를 분명히 줍니다. “심판이 있음을 알라.” “이것도 지나가리라.” 교육도 유머도 음악도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검은 머리의 시절이 지나가듯이…. 그러면 지나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나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솔로몬은 말씀합니다. 12: 1, 2절 말씀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언젠가 세상을 즐길수 없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수 없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 창조주를 기억하려 하지 말고, 지금 세상을 즐길수 있는 때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세상을 더 발전시키려고 공부도 하고 좋은 일도 마음껏 할수 있는 지금 이 때 창조주를 기억하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솔로몬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기억하라’ 했으면 어떠했을까요? 어쩌면 십계명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났을 것 같습니다. 물론 십계명 중요합니다. 십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강조하다 보면 세상을 즐기고 또 좋은 일을 하는 삶으로 부드럽게 연결이 되지 않았을줄 압니다.
반면 지혜의 솔로몬은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말씀하십니다. 곧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언제? 청년의 때에….
교육과 유머와 음악 정말로 중요합니다. 청년시절에 받은 교육과 경험했던 유머와 즐겼던 음악이 여러분의 평생을 따라 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지나갑니다. 그러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지나가지 않습니다.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갑니다.
한편 청년 시절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하나님을 아니 창조주를 경배하는 날로 삼습니다. 주중 6일은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 갑니다. 때로는 음악과 유머로 세상을 즐깁니다. 그러나 일주일의 하루는 꼭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들의 삶은 결코 지나가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빛 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국의 다일공동체라고 최일도 목사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웠는데 최 목사님의 간증 이야기를 접해 보았습니다.
한 번은 어느 장로님이 학생들을 인솔해서 다일공동체로 겨울 수련회를 온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보면서 최 목사님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셨는지 장로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번 수련회는 고생하러 왔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추운 것 압니까? 배고픈 걸 압니까? 따뜻한 잠자리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형제들은 노숙자들처럼 길바닥에서 잘 걸 각오하고 왔습니다. 자매들만 집 안에서 재워 주세요.”
남학생들에게 따라 오라고 하시곤, 치약을 짜서 먼저 손바닥에 바르게 한 후 머리 몇 번 문지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5년간 머리 한 번 안 감은 사람처럼 모습이 바뀐다고 합니다. 그리곤 종이를 태운 잿가루를 얼굴에 바르라고 하고 허름한 옷을 입혀서 거리에 함께 나갔습니다. 홈리스가 되어 이틀을 청량리역 차디찬 바닥에서 잤습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게 화장실이었다고 합니다. 화장실이 딱 한 칸이었습니다. 붐비지 않겠나 싶어서 최 목사님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갔다고 합니다. 이미 두 명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최 목사님 뒤로 이내 금방 두 명이 더 왔습니다. 답답한 건 화장실 안에 있는 분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안에 누가 있는지 목사님이 문을 두드리며 물었습니다. 장로님이 일을 보고 계셨습니다.
“장로님, 대강 끊고 나오시지요. 밖의 사정이 절박합니다. 지금 다섯 명이 줄을 섰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장로님 목소리가 들리는데 일어서 있는 듯한 눈치였습니다.
“목사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끝납니다.”
그러고는 몇 분이 더 흘렀습니다.
“어어, 장로님, 지금 다들 급하다니까요. 대강 끝내고 속히 나오시라니까요.”
“예, 조금만, 죄송합니다. 조금만.”
그 사이에 줄은 한 명이 더 늘어났습니다. 최 목사님은 더 이상 지체할수 없었습니다.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문 좀 열어 보세요.” 조금 문이 열렸습니다. 장로님이 막힌 변기에 맨손을 집어넣고 뚫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변기에 넣는 바람에 변기가 막혔던 것입니다.”
후에 학생들에게 최 목사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께는 제가 그 어떤 설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여러분의 장로님만 본받으시면 됩니다.”
아마도 이 장로님은 청년의 때에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