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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보내리라 (사도행전 22:1-21) 12/18/2016

얼마 전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민 초창기에 거의 모든 한인 교회들이 미국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도 20년전까지는 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사용료를 내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뉴욕 어느 교회도 미국 노회에 속한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렸는데 어느 날 비상이 걸렸습니다. 한 할머니가 손주의 기저귀를 그냥 변기(toilet)에 넣는 바람에 막혀 버렸습니다. 그동안도 한인 교회와 교회 관리 문제로 늘 골머리를 앓던 미국 교회는 이 일을 계기로 한인 교회를 내 보내려 했습니다. 이 일이 노회에 알려지게 되면서 노회 담당자들이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겠습니까? 한인 교회가 빨리 다른 처소를 찾아라? 첫 멧세지가 “This is a good news. 교회에서 기저귀가 발견되다니 이는 기쁜 일입니다.”
미국 장로교에 많은 교회에 어린이들이 없기 때문에 기저귀를 본지 오래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기저귀가 발견된다는 것은 도리어 희망의 싸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도 기저귀가 많이 눈에 띄입니다. 저희 자녀들도 많이 있지만 주중에 사용하는 preschool에 널려져 있는 기저귀까지 합하면 청소를 하는 분들의 수고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래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게도 다음 주일인 성탄 주일에는 성인 세례식과 함께 유아세례식이 거행됩니다. 아기 예수께서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는 저희 교회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기저귀의 축제를 벌이게 될 것을 바라지 않으실까요?

오늘은 분홍색 촛불을 키고 대강절 네번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사실 분홍색 촛불은 세번째 주일에 키고 그 주일을 세례 요한 주일로 지키곤 합니다. 세례 요한이 아기 예수의 길을 미리 와서 닦았기에 세번째 주일을 세례 요한 주일로 지키고 저희 교회는 가급적 이 날을 선교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기 선교단 파송 예배를 오늘 드리기에 오늘을 세례 요한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곧 세례 요한 주일은 기저귀의 축제를 준비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그로 인해 찾아 올 기저귀의 축제를 기다리는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앞장 섰던 세례 요한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날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제일 마지막 절 21절 말씀입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도바울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이것 저것을 떼고 이렇게 바꿔 보았습니다.
“내가 너를 보내리라.”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미국으로 오기 전에 영락교회 청년부 대표로 섬긴적이 있습니다. 그 때 청년 선교대회를 열게 되었는데 제가 표어를 정하는 책임을 맡았었는데 바로 “내가 너를 보내리라”로 정했었습니다. 이제 거의 36년이 지난 지금 성경과 신학을 좀 알게 되니 그 때는 제대로 깊은 뜻도 모르고 정하지 않았나 부끄러운 생각마저 듭니다. 물론 아직도 말씀을 계속 깨달아 가는 과정 중에 있지만 금번 대강절을 지내면서 새롭게 본문 말씀이 다가 왔습니다. 본문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짧아서 거꾸로 올라가면서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이는 사도바울이 주님께 하신 말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은혜 받기 전에 기독교를 박해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을 왜 사도바울이 했겠습니까? 자기는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할 자격이…, 왜냐하면 스데반도 죽였고 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리라.”

사실 저는 36년전에 영락청년부 선교대회 주제로 이 말씀을 정하면서 속으로 한 생각은, “우리는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 준비된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내리라.’” 이렇게 생각하며 표어를 정했지만 이제 와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자격이 안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바울에게 주님은 뜻밖의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보내리라.”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 정말로 사도바울은 자격이 없었을까요? 주님은 정말로 자격이 없는 자들을 마구 보내시는 분이실까요? 한참 건너 뛰어서 7, 8절 말씀입니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죠. 사울의 뜻은 ‘큰 자’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자가 되어 기독교를 핍박했었죠. 그래서 어느날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갑자기 빛이 임하더니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후 ‘큰 자’ 사울이 아니라 ‘바울’ ‘작은 자’가 됩니다.
곧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당신을 핍박하는 자를 찾아 오신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도바울의 자격은 사도바울에서 비롯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찾아 오심으로 주어졌습니다. 이를 어느 신학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문을 닫고 열쇠로 꼭꼭 잠그다 못해 피아노와 온갖 가구로 문을 막아 놓았지만 주님은 문과 열쇠를 부수고 피아노와 온갖 가구를 내 팽개치고 사람의 안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사실 사울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 열쇠로 단단히 잠그고 온갖 가구와 피아노로 하나님이 못 들어 오게 막았습니다. 아니 그것도 부족해서 철문을 내리고 두 겹 세겹 열쇠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다 부수고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다메섹 사건입니다. 이 다메섹 사건의 수혜자들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격을 갖춘 자들입니다.
사실 예수 믿는 자들은 크고 작게 다메섹 사건을 소유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도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닐까요?

반면 사도바울은 이 놀라운 다메섹 사건만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 한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자기는 율법주의에 빠져서 시간과 삶을 낭비한 자라고 그래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해가 갑니다. 사도바울의 경력을 보면 그는 어떻게 보면 완벽주의자입니다. 그의 이력서가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이런 완벽주의자가 그동안 헛 살았고 특히 많은 시간을 율법주의에 빠져서 보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스스로 허탈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사도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서 역으로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과거의 어떤 실수도 어떤 상황도 모두 헛되게 버려지지 않음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은혜 받은 후 3, 40년 복음을 전파하면서 체험하고 또 체험한 것입니다.

곧 두 가지 이유로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도바울이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자고 두번째로는 쓸데 없이 율법주의에 빠져 시간을 낭비한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이러한 사도바울을 보내시기 원하셨습니다.
왜 이런 사도바울을 보내셨을까요? 정말로 여러모로 자격을 갖춘 사람을 보내시지…? 예를 들어 기독교인도 해치지 않고 선한 일을 하다가 주님을 만난 사람을…
그렇다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은 전혀 쓸모 없는 자들을 부르셔서 전혀 쓸모 없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과거 쓸 데 없이 낭비한 시간도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전하는 자나 받는 자나 함께 체험케 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저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늘 대강절 넷째 주일을 맞아 저희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나바호 원주민들에게 보내리라.”
원주민들을 위해서 또한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주님은 스스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보내시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 보시기에 자격을 갖추신 분들을 보내십니다. 주님을 안 믿고 또 안 믿고 또 안 믿으려고 했지만 우리의 불신앙을 문을 뚫고 쳐 들어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과거의 여러 가지 일로 마음에 후회가 가득찬 분들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과거의 어떤 시간도 결코 버려지지 않고 사용되는 것을 체험하도록 하십니다. 후회했던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사용하고 계심을 체험하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는 자들은 이웃을 어떻게 대할까요? 더더욱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특히 매일 매일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는 자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그랬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 이웃의 마음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지 않을까요?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나바호 원주민들의 마음에까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무 데나 보내실까요?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는 곳으로 보내시지 않으실까요?
사실 미국 정부에서 원주민들을 위해서 여러 혜택을 주고 있는데 그러한 혜택으로 인해서 도리어 게을러지고 일거리는 없어서 술중독과 마약 중독자가 많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서 잘 아실줄 압니다. 청소년 자살률도 높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이들 사이에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희 교회에 말씀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너를 나바호 원주민들에게 보내리라.”
오해하지 마십시다. 저희 교회가 가기에 희망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의 꽃이 피어나기에 저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도구일뿐입니다. 우리가 희망의 꽃이 아닙니다.
얼마전 말씀드린 것처럼 대강절을 맞아 온 세계에는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나바호 원주민들 사이에도 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선교단은 그 희망의 꽃의 아름다움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그 향기를 맛보러 가는 것입니다. 나바호라는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뵈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 선교단이 다녀 온 후에 언젠가 기저귀의 축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아니 이를 위해 기도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1969년까지 군사기밀이었다가 풀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바호 청년들이 전쟁을 위해서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군인들이 미군이 사용하는 암호를 해석하곤 해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나바호 원주민들의 언어를 사용해서 암호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일본을 무찌를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 때는 이처럼 미국을 위해 큰 공헌을 하였지만 다시 잊혀져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나바호 베들레헴에 탄생하십니다. 우리가 그 증인들입니다. 아니 단기 선교단이 이 일의 증인들입니다.

단기 선교단 여러분,
그곳에 가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희망의 싸인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보는 순간 여러분은 그들에게 희망의 싸인이 되어집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는 여러분과 함께 뉴 멕시코로 향하십니다. 여러분이 도착한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나바호 원주민들에게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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