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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가복음 18:9-14) 01/22/2017

 

중국의 한나라 왕 유방이 전국을 통일한 후 궁궐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 때 장수들이 한쪽 구석에 모여 쑥덕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방이 부하에게 “저들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물었습니다. 부하가 대답하기를 “반역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유방이 “이 일을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부하는 “전하께서 가장 미워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 자에게 상을 내리면 반역은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러하냐?” 고 묻는 유방에게 부하가 답합니다.

“전하가 가장 미워하는 자도 상을 받는다면 다른 사람이야 공적에 따라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며, 상 받을 것을 의심치 않으면 저들은 자연히 해산할 것입니다.”

부하의 말을 따라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장수에게 상을 내리자 모여 있던 장수들은 “저 장수가 상을 받는다면 우리가 상 받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면서 흩어졌다고 합니다. 부하의 지혜로 유방은 어려운 위기를 넘기고 나라를 잘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기업가가 지은 책에서 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려면 이러한 지혜가 필요함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기업뿐이겠습니까? 세상 나라를 통치하려면 이런 지혜가 있어야 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한국도 미국도 이런 통치자와 관료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자기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상을 줄줄 아는 지혜를 가진 멋진 정치인들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해 들어 네번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만유의 주이시고 만군의 주님이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만물의 통치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어떤 지혜로 세상을 통치하시나요?

사실 우리가 오늘 예배를 드리는 이유 중 하나는 주님은 놀라운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이심을 믿기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분이고 그 능력과 지혜의 하나님께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지혜로 당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실까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지혜일까요? 아니면 우리에게 밝혀져 있으나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혜인가요?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주님과 유방과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유방도 그렇고 주님도 그렇고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들이 타겟이 되고 있습니다. 분위기를 봐서는 주님은 스스로 의롭다 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을 미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미워하시겠죠. 그러면 주님도 유방처럼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나요? 주님은 한 이야기를 꾸며서 말씀하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비유의 특징 중 하나는 청중을 깜짝 놀라게 하는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의 비유에도 그런 요소가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한편 그 요소를 느끼려면 중요한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고 생각하고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입니다. 그동안 들었던 기억을 다 지우시기 바랍니다. 지우셨죠.

두번째로는 여러분이 그 현장 속에 가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바로 여러분 앞에서 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청중 중 한 사람입니다. 예수라는 청년이 말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금방 드는 생각이 나쁜 바리새인과 주님이 사랑하는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면 아직 옛 기억을 지우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다시 지우시기 바랍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기억을 지우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17:20절 말씀부터 시작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사실 바리새인들은 아주 훌륭한 질문을 하면서 주님과의 대화가 시작이 됩니다. 거기에 어떻게 주님은 대답하시나요? 20절과 2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성경에는 기록이 안 되었지만 주님은 그 질문을 받고 신나서 대답하셨을줄 압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오셨는데 이를 어떻게 알았던지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나셨을줄 압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의 답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여기에서 너희가 누구겠습니까? 지금 누구가 이 질문을 하였죠? 이 대답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곧 바리새인들 안에 있느니라’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의미로 말씀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청중 앞에서 주님은 깜짝 놀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바리새인들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상으로 보면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칭찬한 것입니다.

우리에겐 주님은 늘 바리새인을 야단치신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칭찬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34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움을 당할 것이요.”

바리새인을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으로는 과부의 기도가 얼마나 소중함을 말씀하시는데 역시 바리새인을 꾸짖으신게 아닙니다. 어쩌면 바리새인들이 너무 훌륭한 질문을 했기에 신이 나서 이것 저것 더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본문 말씀 전에 이야기를 오래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이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어떤 상황인지를 느끼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훌륭한 질문을 하였고 보너스로 좋은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이 났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질문을 인정해 주고 계속 주옥과 같은 말씀을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 기대를 갖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청중들도 바리새인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10절 말씀 봉독해 드립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자 이제 바리새인은 이 말씀을 어떻게 듣겠습니까? 일반 청중들은 어떻게 듣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칭찬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세리들을 야단칠 것을 기대합니다. 이 당시 세리는 누구와 같은 부류로 생각이 되었죠? 창녀와 같은 부류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민 목회 현장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기가 막힌 이야기를 종종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거리의 여인들의 헌금을 받아야 하는가 안 받아야 하는가의 질문들이 종종 오고 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비슷한 케이스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분들이 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실줄 압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였겠습니까?.

여러분의 판단이 어떻든 이 당시 바리새인들의 판단은 쉽게 짐작이 갑니다. 당연히 바라새인들은 창녀의 헌금을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러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으로 올라 가는 장면을 보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분노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창녀와 같은 세리 가 감히 성전으로 들어가 그것도 바리새인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세리와 비교하여 우리를 칭찬하려나 보다.” 일반 청중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계속 들립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늘 자기들이 하던 기도를 쪽집게 처럼 잡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감사의 사람으로 여겨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더 신나는 말씀을 하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자기들의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 말해 주시니 너무 좋아 합니다. 그동안 힘들었지만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한 보람이 있습니다. 매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 보람이 있습니다. 더욱 우쭐해 집니다.

오늘 배경 말씀이 바리새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답변하셨습니다. 아마 그 말씀이 생각이 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의로운 바리새인들 가운데 있느니라.”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리를 망신주시는 것입니다. 계속 기대를 안고 귀를 기울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정말로 통쾌합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저러한 불쌍한 기도를 드리지 않고 도리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바리새인임을….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들에게 임하고 있음을 주님께서는 세리와 비교하면서 너무도 적절하게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동안 살아 왔던 것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생겨집니다. 바리새인들끼리 서로 좋아서 얼굴을 쳐다보며 즐거워 하며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온전한 삶인지를 결론 내려주실 것을 기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리와 같은 자들로 인해 나라가 망하였고 이제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놀라운 희망이 보인다는 말씀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런 흥분과 기대 가운데 있는데, 계속 그들의 귀를 울립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정말로 바리새인들은 귀를 의심합니다. 처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기들의 질문을 했을 때 분명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하셨는데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의로운 행위를 그렇게 많이 나열하셨는데 나중에 말씀하시는 것은 의로운 자는 세리라는 것입니다. 세리는 창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인데, 그러면 창녀들보다도 자기들이 못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지고 손은 주먹을 불끈 쥡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두 그룹이 생겼을 것입니다. 한 그룹은 “말도 안 돼” 하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동안 율법을 사랑하며 살아 온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 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는 분통을 터뜨리며 그 자리를 떠납니다.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다고 귀를 씻으면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없는 자들이 됩니다.

 

또 한 그룹은 깊게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 하신 말씀과 맞지는 않지만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깨닫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두번째 그룹의 바리새인들이 깨달은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들 안에 있다” 라고만 풀이할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분명히 임하는데 세리와 같은 겸손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임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그 누구도 세리의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현명한 바리새인이라면 어떠한 결론을 안고 집으로 돌아 갔겠습니까? 다음과 같은 말씀을 가슴에 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 안에도 세리 안에도 있다.”

그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세리를 무시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결국 세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때 바리새인도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이, 이 바리새인이 의롭다 함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바리새인에게 임한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얼마 전 정신을 번쩍 들게하는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Kathleen Kern이라는 분이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미국의 기독교인과 바리새인의 공통점은 모두 마음이 굳어 있고 사랑이 없고 위선적이다. 두 그룹 모두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다. 두 그룹 모두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최선을 다 하고 있다. 두 그룹 모두 하나님의 규례를 잘 지키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 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하는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이 있고 행함도 있지만 바로 세리의 고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의 특징은 율법을 사랑함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실천하였습니다. 요즘식으로 하면 말씀을 사랑하였고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바로 의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미 말씀대로 살고 있으니 그래서 의롭다는 확신이 가득차니 어떤 고백이 나오지 못합니까? 세리의 고백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이 있고 행함이 있고 그리고 세리의 고백이 있는 곳에 임합니다. 놀라운 역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리의 눈물로 촉촉해진 땅 위에 행함의 씨앗들은 열매를 맺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세리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지난주 총회 전도 콘퍼런스에 다녀 왔습니다. 강사님이 어느 책을 소개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 역사는 100년의 주기를 갖고 움직입니다. 오늘의 사건은 이미 100년전부터 시작된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100년전에 시작한 하나님의 역사의 한 정점에 와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에 하나님은 바리새인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세리의 고백을 하는 바리새인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고 행함이 있고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울부짖는 자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100년전부터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완성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2017년도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누가 불리움을 받겠습니까?

바리새인처럼 말씀을 사랑하십시다. 아울러 세리의 고백을 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함께 콘퍼런스에 참석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거의 20년전에 개척해서 오늘까지 목회를 잘 해 오셨는데 20년간의 목회의 목표가 교인들을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저에게는 세리의 고백으로 들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바리새인처럼 말씀을 사랑하십시다. 세리처럼 낮아지십시다. 2017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사용될 것입니다. 세리는 고백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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