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가 자주 나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나무를 보면서도 저 나무는 쓸데 없는 나무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모든 나무는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온 세계에 큰 공헌을 하면서 서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 나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 갑니다. 그런데 나무가 세상에 하나도 남지 않고 없어진다면 세상이 돌아 갈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모든 나무는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최고의 사명을 다 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나무가 이처럼 귀한 존재라면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떨까요?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분이 제가 한 두번 소개해 드린 나무의사 우종영씨입니다. 우종영 씨는 친구가 둘이 있는가 봅니다. 한 친구는 함께 등산을 하고 사진도 함께 찍는 친구입니다. 또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바로 ‘북한산 행궁터에 가면 볼 수 있는 서어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친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내는 내가 서어나무 숲에 간다고 할 때마다 슬그머니 걱정의 빛을 내비친다.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고서는 절대 돌아올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어나무 곁에 있으면 어느 결에 나 혼자 피식거리고 웃는다. 그 거대하고 엄숙한 나무 앞에서 웬 방정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엄숙함조차 편한 걸 어쩌겠는가.
서어나무 자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놈을 친구 삼아 버렸다.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나는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내게 그런 존재가 되어 준 서어나무가 그저 고마울 밖에.”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글을 맺습니다.
“서어나무와 그 친구가 내게 그렇듯, 이 순간 나도 누군가에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힘이 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이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사는 게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우종영씨는 서어나무가 자기의 친구가 된 것처럼 자신은 그 누구를 위해서 서어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의 서어나무는 무엇일까?” 그리고 두번째는, “나는 과연 이웃을 위한 서어나무가 되어 가고 있는가?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힘이 나는 존재가…?”
오늘 본문 말씀에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끈질기게 재판장을 괴롭게 하는 과부를 우리들을 위한 한 서어나무로 소개해 주십니다. 과부와 같은 서어나무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곧 기도의 모범으로 한 과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아주 교만한 재판장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재판장이 서어나무가 될수 없겠죠. 이유는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고 결코 마음의 평강과 힘을 주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참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과부일뿐 아니라 깊은 원한을 갖고 있는 여인입니다. 분명 이 여인도 서어나무는 아닙니다. 아니 서어나무로 삼고 싶지 않습니다. 과부이면서 깊은 원한을 갖고 있는 여인을 보면서 누가 힘을 얻고 위로를 받겠습니까? 4절 말씀입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청중들은 여인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과부인것도 안 되 보이고 또 원한이 있는 것도 안스러워 보이는데 자기들에게 없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인의 끈진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재판장이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재판장이니 처음부터 찾아 가는 것조차 포기하는데 이 여인은 끈질기게 재판장에게 달라 붙습니다. 청중들은 궁금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과연 재판장이 어떻게 할까? 5절 말씀입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청중은 여인의 위대함에 고개를 숙입니다. 여인의 끈질김이 불의한 재판장을 이겼습니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주저 주저하였을 것입니다. 이 여인을 서어나무로 삼고 싶은 마음은 아직 들지 않았을줄 압니다. 원한 가운데 사는 과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결코 힘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주님은 너무나 잘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여인의 끈질김이 불의한 재판장을 이긴다면 택함받은 자들의 끈질김이 의로운 하나님을 이길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택함받은 자들에게 과부를 서어나무로 삼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청중은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계속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8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재판장이 여인의 원한을 들어 준 것 것처럼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신다는 것이니다. 곧 이 여인이 택함받은 자를 위한 위대한 서어나무인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제 청중은 큰 갈등 가운데 놓입니다. 과부를 닮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되기는 또 싫습니다. 청중은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갈팡질팡하는 청중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인과 같이 서어나무가 될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청중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들킨 것을 느끼며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을 알았지?” 그들은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과부과 같이 되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과부와 같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청중은 두 그룹이 생깁니다. 한 그룹은 그래도 불의한 재판장에게 애걸을 할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부를 자기들의 서어나무로 삼지 않습니다. 두번째 그룹 사람들은 집으로 가면서 골돌히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되새깁니다. 한편 다음과 같은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과부의 기도의 특징을 살펴 보니 ‘원한’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입니다. 정확히 네 번 나타납니다. 3절에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5절에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곧 과부의 기도는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 아니라 원한을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와 원한은 깊은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7, 8절을 보면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말씀하십니다.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들어주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임을 알려주십니다. 기도는 단순히 택하신 자들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아뢰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택하신 자들이 자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는데 과연 자녀가 좋은 학교에 합격하는 것을 기도하고 있다면 이를 택하신 자들의 원한으로 생각할수 있겠습니까? 소원은 될수 있어도 원한까지는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매한 가지로 비싼 차를 사고 비싼 집에서 사는 것이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라고 생각할수 있을까요? 이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비싼 집 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과부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애도 부족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보시고 주님이 안타까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어떤 분들은 자신도 원한을 아뢰는 기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원한도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원한과 거짓 원한.
최근에 보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은 ‘Envy’ ‘부러움’ 또는 ‘질투’라는 책입니다. 질투가 생기는 원인을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화려한 광고입니다. 1997년에 유명한 Gucci회사가 향수를 하나 내 놓았는데 그 이름이 ‘Gucci Envy’라는 향수였다고 합니다. 이 향수가 비싸서 아무도 뿌리지 못하니 그저 질투만 하라는 것입니다. 7년후에 또 다른 향수를 내 놓았는데, ‘Gucci Envy Me’. 자신 만만한 여인들을 상대로 내 놓은 상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품을 원하지만 구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질투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 질투의 특징은 자존감의 상실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심리적으로 깊은 상처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불안이 생깁니다.
한편 이 보다 더 심각한 현상이 생깁니다. 수 많은 광고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 곧 하늘나라에 대한 동경심은 사라지고 새로운 자기 완성의 기준이 생기는데 이것은 이 땅 위에 만족을 향한 욕구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자기 완성의 goal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이런 것을 얻지 못 할 때 심한 자존감의 상처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곧 건전치 못한 원한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건전치 못한 원한은 결코 택한 자들의 원한이 아닐줄 압니다. 요즘 건전치 못한 원한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건전치 못한 원한을 가지고 기도를 한다면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과부의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과부의 기도는 택한 자의 건전한 원한을 소유한 자들만 드릴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소원도 아뢰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가 소원을 아뢰는 정도로 끝나서는 참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기도는 원한을 아뢰는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나아가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부의 기도 택한 자의 기도는 무엇일까요? 과부의 건전한 원한이 무엇이겠습니까? ‘Gucci Envy Me’가 과부의 원한일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과부의 원한을 쉽게 추측할수 있습니다. 사실 과부는 존엄성을 짓밟혔기에 재판장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존엄성을 짓밟힌 과부는 더 짓밟힐지도 모르는데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 옵니다. 더 짓밟힐지라도 찾아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찾아 가는 것이 바로 자신의 존엄성을 세우는 것입니다.
과부의 존엄성은 그 누구도 세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곧 자신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을 짓밟는 재판장을 찾고 또 찾음을 통해서 자신의 존엄성을 세웠고 과부의 존엄성 앞에 재판관은 두 손을 든 것입니다. 곧 과부의 원한은 인간의 존엄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과부는 존엄성의 사람이었습니다.
택한 받은 자의 원한도 매한 가지입니다. 택함 받은 자가 세상에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으로 버림 받은 경험 마저 체험합니다. 자기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존엄성을 짓밟으신 것과 같은 경험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찾아 옵니다. 자기의 존엄성을 짓밟으셨으니 계속 짓밟으실지 모르는데도 끈질기게 찾아 옵니다. 이것이 바로 택한 자의 존엄성을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엄성을 세우는 택한 받은 자 앞에서 하나님은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참 기도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세입니다. 자신의 존엄성을 안고 기도하는 자와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존엄성 없이 기도하는 자와 누가 끝까지 기도하겠습니까? 이것이 과부의 기도였습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들이 바로 세상을 밝게 하는 서어나무가 아닐까요? 이런 자들이 많아질 때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바꾸시지 않으실까요?
“내가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리라.”
한편 자신의 존엄성을 찾아 하나님께 찾아 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엄성만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이웃의 존엄성을 위해 살아 갑니다. 이웃의 존엄성을 위해 하나님을 찾아 갑니다.
얼마전 저희 집에서 구독하는 Dedham 타운 신문을 보니 다음과 같은 광고가 눈에 띄였습니다.
“If you are a fan of dignity. You are a fan of Special Olympics.”
우리가 자신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긴다면 장애인들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되고 그래서 장애인을 위한 Special Olympic을 후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멧세지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소원만을 기도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다. 우리들의 깊은 원한을 하나님께 아뢰십시다. 우리들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아울러 이웃의 존엄성을 위한 기도를 드리십시다. 우리도 이웃을 위한 서어나무가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미국에 노예제도가 굳게 자리 잡고 있던 1797년 노예의 자녀로 이사벨라가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평생 3명의 주인이 바뀝니다. 특히 두번째 주인이 제일 혹독했는데 이사벨라가 영어를 못해서 말을 못 알아들으면 가혹한 벌을 내리곤 했습니다.
마침내 어느 일요일 아침 주인은 이사벨라를 헛간으로 데려가 두 손을 묶은 채 불에 달군 회초리로 무자비하게 때렸습니다. 살이 깊이 찢어지고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렀습니다. 상처는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이사벨라에게 신앙이 있었는데 부모와 헤어지기 전 곧 팔려서 다른 집에 가서 살기 전에 어머니에게서 자비로운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고통을 참기 어려울 때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회초리를 맞을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울부짖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주인이 일을 열심히 하면 1년 뒤에 자유인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자 그 약속을 주인이 어깁니다. 사람을 믿을수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탈출합니다. 자유인이 된 후 자기의 아들을 찾기 위해 백인을 상대로 소송을 합니다. 백인을 상대로 승리한 최초의 흑인이 됩니다.
후에 이사벨라는 46세가 되었을 때 순회 복음 전도사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의 신앙은 만인에게 평등한 정의와 이상적인 자유의 근간을 이루는 신앙이었습니다. 이에 1851년 오하이오 주에서 열린 여성권리대회에 초청을 받아 감동적인 연설을 합니다.
“여러분, 제 팔 좀 보세요. 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작물을 거두어 곳간에 쌓았습니다. 저보다 일 잘하는 남자는 없었습니다. 그럼 전 여자가 아닌가요? 저는 남자만큼 일하고 남자만큼 먹을 수 있습니다. 먹을 게 있기만 하다면요. 그리고 채찍질도 잘 참습니다. 그럼 전 여자가 아닌가요? 저는 제가 낳은 아이가 노예로 팔려가는 걸 지켜 보았습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울부짖었지만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제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럼 전 여자가 아닌가요?”
이 여인의 기도에 하나님은 답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왜냐하면 여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놓고 울부짖은 것입니다. 택함 받은 자의 존엄성을 놓고 울부짖은 것입니다. 흑인들의 존엄성을 놓고 울부짖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놓고 울부짖으십니까?
교우 여러분,
존엄성의 fan이 되어 살아 가십시다. 때로는 자신의 존엄성의 fan, 때로는 이웃의 존엄성의 fan, 택함 받은 자의 존엄성의 fan, 인류의 존엄성의 fan이 되어서 하나님께 우리의 원한을 아뢰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