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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골로새서 1:24-29) 03/19/2017

조선 시대 천주 교회사에 보면 ‘동정 부부’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부이지만 동정을 지키면서 사는 부부를 말합니다. 1700-1800년대는 조선시대에 유교가 한창일 때인데 이 때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유교시대인 만큼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가혹했던 때입니다. 유명한 한 천주교 신자 가정에 이순이라는 딸이 태어납니다. 어린 이순이는 일찍부터 모친에게서 글과 교리를 배웠습니다. 여러모로 뛰어났고 신앙심도 투철했습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이미 오래전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고백했습니다. 크게 놀란 어머니는 대견함과 현실적인 염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앞장서 삼강오륜을 지켜야 했던 양반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을 혼인시키지 않는 것은 일종의 패륜으로 여겨질 일이었습니다. 곧 이 당시는 처녀가 혼자산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딸의 선택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라 생각한 어머니는 평소 언행이 갸륵하고 믿음이 깊었던 딸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승낙이 떨어지자 이순이는 주문모 신부를 찾아 갑니다. 주 신부님은 중국에서 온 선교사로서 몰래 천주교를 전파하였고 끝내 순교를 당한 신부입니다. 이순이는 주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결심하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주 신부는 이순이의 말을 듣는 순간 전주의 유중철을 떠올렸습니다. 2년 전 주 신부가 전주 어느 천주교인 집에서 며칠 머무를 때, 그 집의 아들 중철이가 아버지와 주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주 신부는 이들의 결심을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주 신부 역시 조선 사회의 여론과 이목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멀쩡한 처녀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동정’에 관한 천주교 교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당장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기 십상이고, 결국에는 화가 닥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궁리 끝에 주 신부는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아예 두 사람을 혼인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평소 유중철과 이순이의 믿음과 사람 됨됨이를 신뢰하였던 까닭에 부부로 맺어 주어도 오누이처럼 지내며 틀림없이 동정을 지켜 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주 신부는 두 사람의 중매에 나섰습니다. 먼저 전주의 유항검에게 이순이를 소개하며 의향을 물었습니다. 유항검은 이순이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습니다. 이순이의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혼인이 성사되었습니다. 1797년 10월 이순이의 집에서 혼례가 이루어졌습니다. 열아홉 살 유중철과 열여섯 살 이순이가, 겉으로는 부부지만 내막으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유중철과 이순이는 부모님 앞에 꿇어앉아 장엄하게 동정을 서약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오누이로 지내며 동정을 지켜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지가 약해지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본능적 욕구가 불쑥 치솟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 갔습니다. 이들에게 일상은 매 순간이 자기 극복의 단련으로 이어지는 영신 수련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 결혼 생활도 3년만에 마칩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릴 시간은 없고,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천주교 박해시 체포되고 끝내 순교를 당합니다. 이 때 중국 선교사 주준모 신부도 함께 순교 당합니다. 주 신부님은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다시 조선 땅으로 들어 오는 길을 택하고 곧 체포되어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주 신부님의 중매로 두 사람은 동정 결혼을 하였고 3년 후 세 사람 모두 순교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셋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사순절은 주일을 뺀 40일을 주님께서 보내신 40일 광야 시간 내지 40년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면서 참회와 절제 그리고 구제의 삶을 사는 절기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이런 전통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한편 참회와 절제 그리고 구제의 삶을 사는 이유는 바로 주님과 하나 되는 축복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참회를 통해서 주님의 거룩함에 동참합니다. 주님의 거룩함에 가까이 간다고 할까요? 구제를 통해서 주님의 가난에 동참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흉내낸다고 할까요? 그러면 절제를 통해서는 어떤 면에서 주님과 하나가 될까요?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을 맞이 하여 절제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삶의 변화를 가져 오는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첫 절인 24절 말씀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바울은 기가막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 표현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 끝없이 토론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게 때로는 더 유익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고난을 아니 우리들의 절제를 주님은 당신의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때로는 많은 절제의 삶을 살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나 왜 끝없이 절제해야 하나?” 주님께 질문도 종종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받은 답변이 있다면, 주님은 사도바울의 고난을 주님 당신의 고난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사실 부모들이 자녀가 고난 받을 때 어떤 생각들을 합니까? 당신의 고난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고난도 절제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영광을 체험하곤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사순절 기간 믿음의 선조들이 절제를 하였던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워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될줄 압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에 짊어질 필요가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늘 나라에 가면 모두 주님을 닮은 자들이 됩니다. 곧 주님의 신비한 몸을 우리도 입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구원이고 천국에서 이 구원이 완성됩니다. 곧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가면 모두 주님의 신비한 몸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언젠가 주님의 몸을 입을텐데 왜 이 땅에서 부터 궂이 그리스도의 몸을 덧 입어야 하나 곧 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에 채워가야 하나?’ 라는 질문을 함직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의 선조들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사순절을 지킨 것은 아닙니다. 곧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절제의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절제의 삶을 산 이유가 25, 28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25절 말씀입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곧 각 사람을 주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바울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워갈 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많은 자들이 주님께 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닮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요즘 기독교는 더 이상 서방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800년대에는 기독교인들의 80%가 서구 세계에 살았습니다. 이제는 65%가 비 서구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남반구에 살고 있습니다. 왜 문명이 그처럼 발달된 서구 세계에 기독교인들이 줄고 또 줄고 있을까요?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에 채워가는 자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주 안에서 완전히 세워지는 새로운 신자들이 없어진 것이 아닐까요?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 목적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웃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순절에 우리가 절제의 삶을  통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편 고난과 절제는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 전에 분명히 본인들에게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26, 27절 말씀입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세계를 체험합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재미있는 동영상을 본적이 있습니다. 사람 두뇌에는 두 마리의 개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개를 한자로 ‘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영어로는 표현하기 애매합니다만, 선입견과 편견. 모든 사람들에게는 선입견과 편견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자기는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도바울 당시도 선입견과 편견이 심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에 대해서 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어떤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은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일어나는 놀라운 비밀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에 채워갔기 때문입니다. 절제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확신 가운데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에 채워가는 자들만이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합니다. 세상을 바로 보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세상을 아무리 잘 볼려고 해도 잘 볼수가 없습니다. 왜 서구세계에 기독교인들이 줄고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 없이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이웃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절제는 하나의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이 왜 이처럼 중요한지를 Walter Brueggemann박사가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을 합니다. “자기를 부인 한 자는 하나님께로 부터 온 순수한 자아를 되찾는 것이고 아울러 하나님께 순수해진 자신을 순종과 찬양으로 드려지는들이다.” 자기 부인한 자들은 염세주의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로 부터 온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할 때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입견에서 해방된 자들은 사도바울의 고백을 합니다. 29절 말씀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교우 여러분,

우리가 절제를 할 때 우리는 작은 자기부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자아를 찾게 됩니다. 선입견과 편견없이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축복에 동참케 됩니다. 주님과 더불어 온 인류 역사의 한 복판에 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남은 사순절 기간 유중철과 이순이 처럼 되자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절제의 작은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1년간 우리가 금번에 뿌린 작은 절제의 씨앗이 자라서 복음 전파에 쓰임을 받고 아울러 주님과 더 깊은 만남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절제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워가는 영광의 시간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오래 전 어느 성경공부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어느 화장실에 들어 갔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짜증을 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화장실이 너무 더럽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음성이 들려 오는데,

“너에게도 더럽냐? 나에게도 더럽다.”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곧바로 화장실을 청소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언제나 화장실을 깨끗하게 하고 나오곤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저도 그 후로 화장실에 갔다가 나올 때마다 청소를 한다고 성경공부 시간에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랬더니 후에 듣기로는 어느 교우님도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절제가 두 사람 세 사람으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서 참 신기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요즘도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휴지가 널려져 있으면 치우고 나옵니다만, 어떤 때 별로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얼마전에도 휴지가 넓려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손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 때문에 휴지를 줍게 되었다는 분 생각이 나니 어쩔수 없이 손이 휴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휴지통에 넣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넓은 지구에 한 복판에서 휴지를 줍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구의 한 구석에 위치한 화장실의 휴지를 줍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를 깨끗하게 하고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절제의 삶의 축복이 아닐까요? 우리가 절제를 할 때 우리는 실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주님의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스러운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어떻게 보내시렵니까?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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