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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한 목사, 온전한 헌신과 화평을 이끄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6:1-16) 05/14/2017

 

지난 4월15일, Harvard Graduate School of Education에서 주최한 “Let’s Talk”이라는 컨퍼런스에서 듣게 된 내용입니다. Asian-American 또는 Asian 학생들이 부모님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어려움과 다름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내용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컨퍼런스의 주요 강사들은 이야기 합니다. 이중 문화 속에서 자라나는 우리의 자녀 세대를 부모님들이 보다 잘 이해하고 바르게 서포트 해야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진정한 소통과 바른 성장이 함께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물론 부모님들 만큼이야 되겠습니까? 다만,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갈 수도 없고, 진정한 소통을 이끌어 내는 것도 힘들다는 말입니다.

 

어머님들이 자녀들에게 이런 말씀 잘 하시죠? Did you eat? 밥 먹었니? 옷은 왜 그렇게 입고 다니니? 시간 잘 지키고 미리미리 좀 다녀라. 강연자는 자녀 세대들에게 다음과 같은 반응과 대답을 제시합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이야기할 때면, 그 이야기를 듣는 자녀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밥은 먹었니? (자녀) I love you, too.

(어머니) 옷은 왜 그렇게 입고 다니니? (자녀) I want to see you, too.

(어머니) 시간 잘 지키고 미리미리 좀 다녀라. (자녀) I am proud of you, too.

 

잔소리라고 생각되는 어머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사실은 자녀를 향한 사랑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해하고, 또한 이해로 그치지 않고, 사랑한다고 대답해 보라는 말이죠.

 

이런 시도가 우리 가정 안에서 충분히 일어나서, 부모와 자녀가 서로 좀더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시도가 우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일어나길 바랍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부름에도,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또한 믿음의 삶으로 응답하는 삶. 오늘 본문은 그러한 삶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가장 암울하고 어두운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인도하심으로 이집트(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갑니다. 100년이 지나고 200년이 지나갑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신앙의 위대한 유산이 아니라, 이제는 색이 바랜 채 천막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법괘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방신에게 드리는 예배와 별다른 차이가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가까운 신당 찾아가듯 드리는 예배만이 남았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회막이든, 법괘든,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든, 다른 이방 민족들의 신전과 신상과 비교해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질 때면, 하나님은 힘이 없어서, 하나님의 성막과 법괘는 그다지 웅장 하지도 화려 하지도 않아서,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업친 데 덮친 격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300여년이 지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원래 살던 족속들은 물론이고, 지중해 바다로부터 들어온 블레셋이라는 강력한 해양민족들 때문에, 점점 더 살기 어려워졌습니다. 해안가의 평지 땅은 대부분 그들에게 빼앗긴 채, 산으로 올라가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지난 해 말부터 최근까지 시집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김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가장 인기있는 시집 중 하나라고 합니다. 시집이, 그리고 김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이 인기를 끌었던 때는 역사적으로 시대가 암울하고 사람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허무함이 가득했을 때라고 합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시대에 따라 정치,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암흑기라고 부르는 어려운 시절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특히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은 장미빛 찬란한 밝음이 가득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혹 시대가 어둡지 않고, 경제와 문화가 침체하지 않은 시기라고 하더라도, 이민자들의 삶은 그리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결코 쉽고 만만한 시기는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별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들이 한 가지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법괘에 내려오는 하나의 전설이었습니다. 법괘를 앞세우고 나갔던 전투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투였고,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아들들인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우상들의 기이한 제구나 신령한 무기라도 되는 듯 하나님의 법괘를 가지고 나갑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이스라엘 군대는 처참하게 패배했으며,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전투 중에 죽임을 당하였고, 대제사장 엘리는 그 소식을 듣고 쓰러져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현재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 상황, 군대를 이끌어 줄 장군도 없고, 나라를 다스릴 방백도 없고, 심지어 예배를 인도하여 신앙을 다시 일깨울 대제사장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런 암흑기가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의기양양하여,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쳐서 물리칠 수 있는 사람들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빼앗은 하나님의 법괘를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의 신당에 전리품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그런데, 다곤 신당과 블레셋 사람의 땅에 그 때부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다곤 신상이 하나님의 법괘 앞에 쓰러져 있기도 하고, 신상의 머리가 부러져 있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피부병이 퍼져 고통 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7달이 지납니다. 여러 고을로 법괘를 옮기다 못해, 블레셋 사람들은 혹시나 이 일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하나님의 법괘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가지 실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혹시 모를 재앙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여러 보물들을 싣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수레를 끌게 끔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그 암소의 새끼 송아지들은 떼어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사무엘상 6:7)

 

아직 젖 먹는 새끼와 어미 소를 떼어놓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 울며 부르고, 또 서로에게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당연히 그러할 어미 소들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 그 소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 어미 소들이 벧세메스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땅으로 가면, 자신들이 받은 재앙이 정말 하나님이 하신 일로 믿고, 그 어미 소들이 본성을 따라 자기 새끼들에게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 재앙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여러 정황과 여건, 어미 소의 본성을 생각한다면, 어미 소들은 자기 새끼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암소들이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의 땅으로 수레를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암소들이 로봇처럼 아무런 생각과 감정 없이 그 길은 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암소들이 울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자기 새끼 송아지들과 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그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미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암소들은 자기 새끼 송아지와 떨어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고, 한 번도 메어보지 않은 수레를 끄는 어려움을 겪고 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암소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 길로 갑니다.

 

어떻게 그렇게 갈 수 있었을까요? 그 암소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이끌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순종의 길을 봅니다. 순종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아무 감정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눈물이 난다고 해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로 가는 것. 그것이 순종이라는 것을 이 본문은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순종조차도, 우리의 힘이 아닌 그리고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순종도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대신 순종은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 제자의 길입니다.

 

이렇게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준 암소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하나님의 법괘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려준 암소들은 상을 받기에 합당할 것입니다. 여물도 가장 좋은 것으로 주고, 잘 쉬게 해주고, 수레를 끌었으니 맛사지 같은 것도 해주고. 무엇보다 가능한한 빨리 새끼 송아지들과도 만나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길을 간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풍성한 복을 주시리라 기대해 보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반전이 일어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수레의 나무들은 물론, 그렇게 고마운 두 암소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번제물로 바쳐집니다. 번제가 무엇입니까? 그 살과 기름과 뼈와 피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의 기록된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의 기록인 것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어떻게 법괘를 되돌려 주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최소한 그 순간에는 잘 몰랐다고 하더라도, 암소들이 이렇게 되는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막아주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상황, “이제는 그만 되었다. 충분하다.”라고 말하고 생각하는 때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 우리를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중에 우리가 믿는 것은, 순종의 길 끝에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에 우리가 다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헌신은 우리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고,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온전한 헌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온전한 헌신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가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도 보여주십니다. 또한 우리들의 어머님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끔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올 해 초 극장가에서 많은 인기를 끈 La La Land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재즈 음악이 많이 나오는 클래식 뮤지컬 방식을 차용한 영화여서, 젊은 사람들이나 나이 드신 분들이나 여러 세대가 즐겁게 봤다고 합니다. 내용은, 한 배우지망생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밑바닥 상황에서부터 성장해 가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그 과정 중에 연인을 만나서 사랑을 키우기도 헤어지기도 하는 영화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노래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 중에 일부입니다.

 

“Someone in the crowd”

… Someone in the crowd could be the one you need to know

The one to finally lift you off the ground

Someone in the crowd could take you where you wanna go

If you’re the someone ready to be found …

 

군중 속 누군가가 당신이 알아야 할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마침내 당신을 바닥에서 들어 올려줄 사람

군중 속 누군가가 당신이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발견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직 무명이고, 오디션조차도 계속 낙방하고 있는 여자 주인공이, 사교 파티에 가면서 친구들과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여자 주인공은 자신을 밑바닥에서 이끌어서 배우로 성공시켜줄 기회를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마 유명한 제작자나 감독, 혹은 자신을 그런 사람들에게 소개해 줄 에이젼트나 동료 배우를 그런 사람으로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영화는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더 나아가 바로 자기 자신이 some in the crowd 군중 속의 그 사람이 스스로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인생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장 먼저 기회를 준 사람.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아낌없는 사랑과 믿음과 지원을 베풀어 준 사람이 누구일까요? 여러분을 발탁한 직장 상사라든지, 학교 교수님들이 있기 이전에, 여러분들의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두 마리 암소의 희생으로 표현된 진정한 헌신의 끝에, 화평이 찾아옵니다. 이 일 끝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금 하나님과 화목하며,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사사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자신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미스바에서 회개와 부흥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온전한 헌신과 화평의 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도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혹시 메어보지 않은 수레라 할지라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할지라도,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을 떼어놓아야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이끄시는 온전한 헌신과 화평의 길에 믿음으로 동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특히 어머님들의 삶을 통해서, 그러한 헌신의 삶의 단초를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어머님들의 삶과 성도님들의 삶에 우리 주님의 평화가 마음 가득 차오르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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