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난 두달간의 안식월 기간 동안 해외를 다닌 곳이 두곳입니다. 한국을 먼저 다녀 왔고, 그 후 프랑스 파리를 다녀 왔습니다. 프랑스 파리 하면 모두 제일 먼저 에펠 탑이 떠오르실줄 압니다.
에펠탑은 요즘도 매해 6백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파리의 명물이자 세계적인 예술작품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펠탑의 탄생은 그렇게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에펠탑은 바로 불란서 시민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졌습니다. 그 해가 바로 1889년입니다.
그러나 모든 건축이 다 그렇듯이 난관에 부닥칩니다. 제일 큰 난관은 예술가 300 명이 에펠탑이 파리의 분위기를 망치는 건축물이 될 것이라고 정부에 항의 청원을 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한 두 사람도 아니고 300 명 그것도 예술가들이 항의 청원을 내었습니다. 에펠은 끝까지 자기의 건축 작품의 예술성을 변호합니다. 정부는 결국 에펠의 편을 들어 2년만에 공사를 완성하게 됩니다.
한편 어떤 연고인지 어쩌면 반대가 심해서 그런지 처음에는 에펠탑의 수명을 20년으로 정합니다. 20년 후에는 다시 허물기로 하고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완성되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 당시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수적으로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전자 통신에 너무 좋은 구조물입니다. 전자 통신이 발달되기 시작하던 때라 졸지에 수명이 20년에서 무제한으로 연장이 되었습니다.
한편 시간이 지날수록 에펠탑은 점점 그 예술성이 인정을 받게 되고 파리의 명물이 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관광업을 넘어서 여러 분야에 기여를 하게 됩니다. 특히 산업 및 상업, 패션분야에까지 기여를 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자부심이 되어 갑니다. 에펠탑으로 인해 여러 방면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출됩니다. 여러모로 국가에 이익이 되어 갑니다. 잠시 스크린을 통해 살펴 볼까요?
사실 저는 이번에 에펠탑 아래까지 갔지만 올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유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해 저무는 시간에 갔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도저히 기다릴 만큼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에펠탑에 오른 다음에 느끼는 것도 좋지만 에펠탑을 상상으로 오르곤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라가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후에 들게 되었는데, 한국에 갔을 때 구매한 ‘에펠 스타일’이라는 책을 정독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은 후 느낀 것은 그야말로 프랑스는 에펠 스타일의 나라가 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스크린으로 보신 것 처럼 말입니다. 에펠탑이 그들의 자부심이 되었고 산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에게는 무엇이 있나…? 우리 한국민들에게는 무엇이 있나…?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프랑스인들이 갖고 있는 에펠탑과 같은 무엇이 있는가…?
곰곰히 생각했는데, 결론은…, ‘없다’ 였습니다. 에펠탑과 같은 것은 없지만 그 이상의 것은 있지 않을까요?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에펠탑이 아니라 돌멩이 하나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다윗은 8형제 중에 막내였습니다. 다윗의 형들은 모두 전장터에 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이새가 다윗을 불러서 먹을 것을 싸주면서 형들과 형들의 상관들에게 가져다 주라고 합니다.
다윗은 전장터에 나가 보았는데 한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소리치고 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아니 당돌한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사람에게는 어떤 상을 줄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왕이 많은 재물과 그의 딸을 주고 세금을 면제해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때 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듣고 노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부릅니다. 그 와중에 이미 다윗의 말을 들은 사람이 사울왕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의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갑옷을 입힙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주머니에 넣고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갑니다. 이 블레셋 사람 곧 골리앗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43절 말씀입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와왔느냐” 그러면서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합니다. 반면 다윗은 외칩니다. 45절 말씀에 보면,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골리앗은 다윗에게로 가까이 오는데 다윗은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면서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집니다.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 땅에 엎드러집니다. 다윗이 승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에서 어느 장면이 승리를 확증시키는 순간이었을까요? 돌을 던지는 순간…?
제가 보기에는 바로 다윗이 사울의 군복을 벗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손에 돌을 집는 순간입니다. 갑옷을 벗고 돌을 집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저는 이렇게 확신합니다.
다윗은 갑옷을 귀찮은듯 내팽개치면서 돌을 하나 손에 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충분하다.”
물론 다윗은 돌 다섯개를 집어 들었습니다. 자기 주머니에 들어 갈수 있는 만큼 넣다 보니 다섯개가 된 것입니다. “충분하다” 외치면서 돌을 하나 하나 넣다 보니 다섯개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넣을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돌을 다섯개를 넣은 후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걸어가면서 외칩니다. 46, 47절 말씀입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아무나 이렇게 외칠수 있을까요? 돌 하나를 손에 들고 “충분하다” 외칠수 있는 사람의 입에서만 나오는 고백이 아닐까요?
말씀드린대로 저는 프랑스를 방문하기 전에 한국을 두 주간 다녀 왔습니다. 한국 가면 여러 서점을 다니면서 책을 구입합니다. 아마 장신대를 방문한 날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잠시 장신대 서점에 들려서 이 책 저 책을 살펴 보는데 한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목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충분하다.”
제목만 보고는 살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자가 누구인가 살펴 보았습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시인인데 ‘시단의 모짜르트’라고 불리우는 시인이었습니다. 무엇 보다도 쉽게 결정할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1996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습니다.
저는 그 시집을 구입한 후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 제목이 저의 마음을 끌었는가? 쉽게 해답을 찾을수 있었습니다. 늘 주변에서 들리는 외침으로 제 마음이 아파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제 마음에서 들리는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그 외침은 바로, “부족하다” “없다” “좁다.”
이런 외침들을 들으면서 살다가 “충분하다”를 들으니 제 마음이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손이 저절로 책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집에는 약 30개의 시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책 제목이 ‘충분하다’이니 시 중에 분명 ‘충분하다’라는 제목의 시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목차를 보았습니다.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대개 시인들은 가장 유명한 시의 제목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지 않습니까? 이상하다 생각하고 포기하고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시 하나씩 읽어 내려 갔습니다.
어느 날 ‘손’이라는 제목의 시를 읽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시입니다.
“우리의 손가락 다섯개, 그 각각의 끝에 있는
스물일곱 개의 뼈,
서른다섯 개의 근육,
약 2천 개의 신경세포들
<나의 투쟁>이나
<곰돌이 푸우의 오두막집>을 집필하기엔
이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친다
ㅡ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은 의학적인 지식도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손의 뼈의 숫자 근육의 숫자 신경 세포의 숫자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통 지식인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노래합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친다.”
많은 지식인들은 어떻게 노래합니까?
“이것 가지고는 어림없이 부족하다.”
왜 지식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을 때만 부족하다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찾기에 급급합니다. 늘 부족하다고 외치면서….
그러나 시인은 모든 사람들과 똑 같은 자기의 갸냘픈 손을 보면서 노래한 것입니다.
“충분하다.”
시인의 축복을 받은 그 손은 시인을 위해 아름다운 시를 펼쳐 갑니다. 노벨상의 영광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요? 모든 것의 시작은, “충분하다.”
교우 여러분,
오늘이 6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벌써 1년의 절반이 역사 속으로 잠겨 들어 갔습니다. 지난 반 년간 어떤 노래를 부르면서 지내셨습니까?
“부족하다.”(?)
남은 6개월 우리들의 노래 가사를 바꾸십시다.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적의 돌멩이들로 변할 것입니다. “충분하다” 노래를 부르며 가족들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인물로 보일 것입니다. “충분하다” 노래를 부르며 교우들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성인들로 보일 것입니다. “충분하다” 노래를 부르며 이웃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일등 마을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반면 “충분하다”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어떤 사람이 되어 갈까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당연히 돌이 하나 씩 들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끝나면 돌을 던질 태세였습니다.
다행히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하는 말씀에 모두 돌을 놓고 물러 갑니다. 그들의 삶 속에 “충분하다”의 노래가 없기에 그들의 손에 있는 돌은 남을 죽이는 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례식을 맞이 하여 성만찬에 동참하였고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오늘 저희 손으로 빵과 잔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빵과 잔을 주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은 모든 분들이 불러야 할 노래는 바로 “충분하다.”
왜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받으면서 “충분하다” 노래를 부를수 있을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시면서 하늘에서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