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개구리가 평생을 한 우물 안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거기 다른 개구리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 어디서 왔니?”
“바다에서. 거기가 내가 사는 데야.”
“그 바다란 게 어떻게 생겼니? 이 우물만큼 크니?”
바다 개구리가 웃습니다.
“비교도 안 돼.”
우물 개구리는 자기 손님이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척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평생 알게 된 모든 거짓말쟁이 중에서 이 친구가 가장 큰 거짓말쟁이인게 분명해…, 또 가장 뻔뻔스럽고!”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라는 것을 믿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우물안 개구리는 누구일까요…? 자기가 사는 세상 이외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웃을 도리어 거짓말쟁이라고 비웃는 사람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누구가 우물안 개구리인지 어떻게 하면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참 세상을 보면서 사는 멋진 개구리가 되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우물안도 아니고 우물가도 아닙니다.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사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임하였습니다. 성령 강림과 함께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 자기들의 방언으로 설교를 듣습니다. 모두 놀랍니다. 이는 성령 강림과 함께 새 시대가 임한 것을 알리는 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입니다.
이에 새 술에 취했다고 하니 베드로가 일어나서 외칩니다. 15, 16절 말씀입니다.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제 삼 시는 요즘식으로 하면 오전 9시입니다. 오전 9시부터 술취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술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술취해 보이는 이유를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베드로는 성령 강림의 현상으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 나고 있음을 요엘서를 통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 강림과 함께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엘은 성령 강림이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고 예언을 합니다. 모든 육체를 세분하여 설명하는데 3 세대에 걸쳐서 성령 강림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합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자녀들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어린이들이라고 해석해도 무관하다고 봅니다. 이처럼 성령 강림은 이미 수백년전부터 3세대안에 일어나는 사건임을 선지자 요엘이 선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곧 새 시대를 알리는 성령 강림은 세 세대를 통해 임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새 시대 세 세대’로 정했습니다.
저희 교회 가족이 되신지 얼마 되신 분들은 뭔가 떠오르는 게 있을줄 압니다. “삼 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 저희 교회 비전 선언문 중 첫번째 입니다. 성령 강림 주일은 3 주 전에 지켰는데 오늘 제가 이 본문 말씀으로 설교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안식월을 마치면서 동북대회 총회 겸 목회자 연장 교육에 참석하였습니다. 강사님으로부터 큰 도전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씨애틀 형제교회를 담임하시는 권준 목사님이신데 권 목사님은 일년에 두 차례 귀 교회의 mission statement에 대해서 설교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mission statement가 아니고 비전선언문이 있음을 잘 아실줄 압니다. 주보 뒷면 아래 네 가지 비전 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권 목사님은 1년에 두 차례 mission statement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내용은 거의 같게 하신다고 합니다. 권 목사님이 목회를 잘 하시고 계신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분명히 매년 같은 설교를 mission statement를 가지고 두 차례 하셔서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23년째 목회를 하고 있는데 아직 한 번도 같은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안식월을 마치면서 4주에 걸쳐서 Vision statement를 가지고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먼저 4 가지 비전을 볼까요.
- 3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
- 세계를 향한 교회
- 한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교회
- 사랑으로 정의를 이 땅에 세워가는 교회
물론 이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앞으로 4번에 걸쳐서 저희 교회의 비전을 하나씩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번째 비전인 ‘3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창세기 23:1절에 보면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숫자 127을 생각하면서 메로즈라는 수녀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백 살의 사라는 스무 살 때처럼 아름다웠고, 스무 살의 사라는 일곱 살 때처럼 죄가 없었다.”
사라는 나이가 100세인 노인이지만 마음은 20세 처녀와 같이 젊었고 7세의 어린이처럼 순수했다는 것입니다.
127 이것이 삼 세대 교회의 숫자이고 우리 교회의 숫자가 아닐까요? 우리 교회는 100세의 어르신들과 20세의 젊은이들과 7세의 어린이들이 함께 배워 가는 축복된 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런 교회가 될까요?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든 교회는 3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 말씀을 조금 수정해서 봉독해 드리면,
“너희의 어린이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러면 여기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실줄 압니다. 늙은이들이 꿈을 꾼다는 것이 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꿈은 젊은이나 아이들과 더 어울립니다. 환상도 젊은이 보다는 늙은이들에게 어울리고요. 물론 어린이들이 예언한다는 것도 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이 잘 못 되었나요? 요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구 시대에는 어린이들이 감히 예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구시대에는 어린이들은 사람 숫자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새 시대의 도래와 함께 어린이들이 성령으로 인해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꿈의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 환상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어린이들의 예언을 통해서 신비한 넓은 세계가 펼쳐집니다. 젊은이들의 환상의 세계는 바다 보다 더 넓게 우주 처럼 신비하게 펼쳐집니다. 노인들은 바다와 같은 넓은 꿈의 사람들이 되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새 시대의 모습입니다.
곧 새 시대를 맞이 하여 성령께서는 삼 세대를 통해서 우리의 지각을 넘어 신비하게 교회를 세우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처럼 당신의 뜻대로 임하시고 일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우선 삼 세대가 모두 각자가 신비한 바다와 같은 세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가 신비한 바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멈추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세대도 신비한 바다와 같은 세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3 세대가 함께 배워 갈 때만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새 시대를 위한 위대한 삼 세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 우리는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를 하였습니다. 왜 많은 분들이 수고를 하셨겠습니까? 어린이들에게만 주어진 바다와 같은 신비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피터 드러커는 그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부모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접할 수 있었다. 내게 그 경험은 실질적인 교육이 되었다. 학교는 아주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주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에 재미를 못 붙인 피터가 어떻게 그렇게 세계적인 학자가 될수 있었겠습니까? 어린 시절 부모님은 어른들의 파티에 피터를 항상 자리를 같이 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월요일은 정치의 밤, 수요일은 의학과 정신분석의 밤을 주제로 모였는데 피터는 그 자리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부모가 피터 안에 있는 놀라운 세계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 결과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간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혜도 부모로 인해서 일깨워지는데 하물며 믿음의 자녀들이 교회를 통해 믿음의 지혜를 얻을 때 어떠한 자녀들이 될까요…?
한편 지난 주간에는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지만 지난 주일 1부 예배 후에는 집사회 후원으로 상록회 야유회가 있었습니다. 왜 집사님들이 수고를 하셨겠습니까? 어르신들에게만 주어진 바다와 같은 신비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민 신부가 ‘주름을 지우지 마라’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노인들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노인의 느린 동작에는 하나님이 창조사업을 모두 마치고 나서 쉬신 안식의 평온함이 서려 있다. 쉼이 있기에 노년은 창조적이다. 노인의 잔잔한 숨결에서 나는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젊은이가 때때로 파괴적인 것은 쉼이 없기 때문이다. 쉬기 위해, 창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노인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제민 신부는 노인의 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청춘이 자신을 위한 꿈을 꾼다면 노인은 젊은이를 위한 꿈을 꾼다. 다시 젊어지는 꿈이 아니라 젊은이가 늙음에 순응하며 늙음에 감사하게 하는 꿈이다. 젊은이가 늙음을 인생이 도달해야 할 목표로 삼고 살게 하는 꿈이다. 젊은이가 자기를 희생하고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기를 꿈꾼다. 노인의 꿈은 깨달음의 꿈이다. 노인이 자기의 꿈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젊은이는 노인의 잠든 눈에서 그 꿈을 읽어야 한다. 노인은 젊은이에게 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처럼 어린이들을 통해서 바다와 같은 넓은 미래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노인들은 넓은 꿈을 후대를 위하여 펼치고 계십니다. 젊은이들은 “Wow” 감격의 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생활합니다. 이것이 새 시대 세 세대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러할 때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이 땅 위에 임하지 않을까요? 삼 세대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거둡니다.
안진 화가의 그림 ‘착해지는 마법’이라는 그림입니다. ‘지유’라는 딸이 있는데 요즘 작업실에서 아이의 그림 위에 당신 스타일의 옷을 입혀 완성해 가는 작업들에 심취해 있다고 하면서 이 그림을 소개합니다. 아이가 무심히 그려 놓은 것에 조화를 찾아 맞춰가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본인의 그림은 기술적인 욕심이 자꾸 생기는 반면에 무심히 그려내는 아이의 그림으로 새롭게 그림을 배우는 중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기교와 아이의 서투름이 함께 공존할 때 색다른 감정을 건드린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하는 작업이 즐겁다. 아이도 조금 더 자라면 학습된 선과 색채와 의식적인 표현이 화면을 지배할 것이다. 그때가 오기 전에 원시림 같은 아이의 마음을 작품 속에 즐거이 담아내고 싶다.”
이 그림을 마쳐 가면서 지유와 나눈 대화를 소개합니다.
“지유야, 엄마는 이 그림을 보면 마음이 착해지는 것 같아. 이건 제목을 ‘착한 꽃밭’이라고 지을까?”
“어 그래? 착해졌어? 그럼 ‘착해지는 마법’이라고 해.”
지유의 생각대로 이 그림의 이름은 ‘착해지는 마법’이 됩니다. 지유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안진의 화가는 아이와 함께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화가로서 완성이 되어 갑니다. 하물며 삼 세대가 함께 작품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아이들의 예언과 젊은이들의 환상 노인들의 꿈이 어우러질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 삼 세대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 세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바다와 같은 삼 세대가 하나가 되었을 때 주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 놀라운 축복에 동참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