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먼저 짧은 시와 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에 소개해 드렸던 폴란드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쉼보르스카의 ‘그런 사람들이 있다’라는 시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보다 능숙하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내면과 주변을 말끔히 정돈하고,
모든 사안에 대해 해결책과 모범 답안을 알고 있는 사람들.
누가 누구와 연관되어 있고, 누가 누구와 한편인지,
목적은 무엇이고, 어디로 향하는지 단번에 파악한다.
오로지 진실에만 인증 도장을 찍고,
불필요한 사실들은 문서세단기 속으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은
지정된 서류철에 넣어 별도로 분류한다.
단 1초의 낭비도 없이
딱 필요한 만큼만 생각에 잠긴다.
왜냐하면 그 불필요한 1초 뒤에 의혹이 스며드는 걸 알기에.
존재의 의무에서 해방되는 순간,
그들은 지정된 출구를 통해
자신의 터전에서 퇴장한다.
나는 이따금 그들을 질투한다.
-다행히 순간적인 감정이긴 하지만.
사실 저는 이 시를 읽자마자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1초의 낭비도 없이 필요한 것만 챙기면서 사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 어쩌면 많은 보스토니안들도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왜 시인 쉼브로스카가 ‘그런 사람들이 있다’라는 시를 썼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 시가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서 많은 한국인들이 읽게 되었을까요?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자꾸 가득 채워져 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럼, 이런 ‘그렇고 그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다음은 ‘그런 사람’이 아닌 ‘안 그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발리 섬의 전설입니다.
“외딴 산속 한 마을에, 노인을 제물로 바친 다음 먹어 버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노인이라곤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고, 대대로 내려오던 관습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주민들은 그들이 다 모일 수 있는 큰 집을 짓기로 하고 나무를 베어 냈습니다. 그런데 통나무 아래위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들보를 거꾸로 세우면 집이 무너져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젊은이가 더 이상 노인을 잡아먹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해결책을 내놓겠다고 제안하자 다들 흔쾌히 약속했습니다. 젊은이는 오랫동안 숨겨 놓았던 자기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통나무의 아래위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의 제목을 붙인다면 저는 바로 ‘노인의 지혜’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26-28절 세 절을 보면 이 제목이 어울리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노인의 지혜를 느낄수 있습니다. 노인의 지혜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사실 예레미야가 몇 살에 이 책을 썼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레미야가 50년간 예언자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가 되기 전에 곧 20살에 예언자로 불리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최소한 60이 넘은 나이에 이 애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적게 잡은 것이고 70 아니면 그 이상 되었을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왜 노인들의 시를 꼭 읽어야 합니까?” 애가서를 자세히 살피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질줄 압니다.
원어 성경으로 보면 내용은 두 말할 나위 없고 형식을 보면 정말로 기가 막힌 시임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우리 한글로는 잘 알수 가 없는데 원래 원어로 보면 입이 딱 벌어지게 하는 시입니다. 아크로스틱 시라고 하는데, 우리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삼행시와 비슷한 형식으로 썼습니다. 예를 들어 ‘상록회’로 삼행시를 쓴다면, 첫줄은 ‘상’ 으로 그 다음 줄은 ‘록’으로 마지막 줄은 ‘회’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도 비슷하게 쓰고 있는데, 사실 그보다 훨씬 어려운 시를 쓰고 있습니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19-21절은 모두 G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 세 절은 H로 그 다음 세 절은 I로 그 다음 세 절은 J로 시작합니다. 이를 acrostic 시라고 합니다.
זְכָר-עָנְיִי וּמְרוּדִי, לַעֲנָה וָרֹאשׁ. | 19 |
זָכוֹר תִּזְכּוֹר, ותשיח (וְתָשׁוֹחַ) עָלַי נַפְשִׁי. | 20 |
זֹאת אָשִׁיב אֶל-לִבִּי, עַל-כֵּן אוֹחִיל. {ס | 21 |
스크린으로 19-21절을 원어로 보실까요?
히브리어로는 ‘자인’인데 영어로 G라고 생각해도 좋을줄 압니다. 세 절 모두 같은 G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노인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모두 G로 시작하지만 한글로 번역을 한 것을 보면 내용이 너무도 smooth하게 넘어 갑니다. 봉독해 드릴까요?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음은.”
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세 절로 연결되는 것은 더 기가 막힙니다. 22-24절은 매절이 H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한 마디로 이러한 형식으로 이러한 내용의 시를 읽고나면 모든 젊은이들은 입이 딱 벌어질수 밖에 없을줄 압니다. 아무나 이런 시를 쓸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늙어 본 사람만이 쓸수 있는 시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어느 목사님의 어머니께서 종종 하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다.”
그러면 내용을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첫 세절부터 기가 막힌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21절만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시인의 마음에 담아 두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입니다. 이것들을 마음에 담아 두었는데 도리어 신비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느날 보니 소망이 싹 터 오르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경험입니다. 계속 기가막힌 고백을 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아침마다 소망이 싹터 오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니 시인은 고초와 재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요?
사실 제가 제일 좋아 하는 성경 귀절을 들라고 하면 저는 이 귀절을 들고 싶습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언젠가 소개해 드린 안진의 화가가 있습니다. 이 분은 꽃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분입니다. 늘 꽃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좀 변화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곧바로 떠올린 것이 벌레였습니다.
그런데 안진의 화가는 여섯 살무렵부터 벌레로 인한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꿈에서 갑자기 바퀴벌레 같은 검은 벌레들이 나타나 온몸을 덮어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뱀 보다 벌레를 더 무서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전시를 위해 벌레를 그리면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꽃잎과 나뭇잎으로 진드깃과의 벌레를 표현해 보았더니, 그 벌레가 앙증맞기도 하고 심지어 예뻐 보이기 시작합니다. 벌레가 풀을 만나 풀벌레가 되니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난과 고초가 소망이 되는 노인의 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오래 살아 노인이 되면 결국 인생 중에 좋은 일과 궂은 일을 많이 겪게 됩니다. 사실 솔직히 표현하면 좋은 일보다 궂은 일을 훨씬 더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훌륭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노경에 이르러서 궂은 일들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신비한 소망이 태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수많았던 고통의 시간들이 소망의 꽃밭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들의 입에서 노인의 지혜가 쏟아져 나옵니다.
예레미야가 이런 놀라운 시를 쓸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받은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는 매도 많이 맞았고 감옥에도 갇혔었으며 진흙 구덩이에도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묵상합니다. 묵상 가운데 놀라운 것을 경험합니다. 소망을 느낍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이 합니다. 우리처럼 ‘그런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시를 읽으면서 새롭게 삶의 용기를 얻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현대에 이르러 실제로 예레미야와 같은 경험을 하신 대표적인 인물로 저는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을 들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 만델라에게 물었습니다.
“감옥에서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뎌 내셨습니까?”
“나는 견딘게 아니라오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사실 그래서 그런지 만델라는 27년간의 감옥 생활은 긴 holiday였다고 말합니다. 아무나 이런 말을 할수 있을까요…? 물론 처음부터 holiday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감옥에서 쉽게 빠져나갈수 없다는 것을 알 때 그에게는 노인의 지혜가 생겼습니다. 27년간의 하루 하루를 소망의 꽃으로 가꾸어 나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인종차별을 이겨내고 대통령까지 되신 것이 아닐까요…?
결국 ‘그런 사람들’을 이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갈 필요가 있을까요? 바로 우리 곁에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상록회 어르신들이 우리들의 만델라가 아닐까요? 이들은 오늘도 삶을 통하여 믿음의 후배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종종 시간을 내서 상록회 어르신들의 이 음성을 들으십시다.
그럴 시간이 없다구요? Derek Sivers라는 사업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임을 알려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자기의 경험을 글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친구와 자전거 타기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 … 도로 끝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가 전속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게 제 운동 습관이었어요. 그때마다 타이머로 시간을 재면 늘 43분이 걸렸죠.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저전거 도로를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줄어들었어요. 전속력으로 달릴 생각을 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느낌이 먼저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렇게 생각했죠. ‘너무 빨리 달리지 말고, 그렇다고 아주 느리게는 아니더라도 그냥 좀 느긋하게 달려보자.’
그날 똑같은 도로를 달리는 동안 몸을 똑바로 세우고 평소보다 주위를 더 많이 둘러보았습니다. 바다 쪽을 바라보니 돌고래들이 점프하는 모습이 보였죠. 반환점 부근에서는 펠리컨 한 마리가 제 머리 위를 날아다녔습니다. 위를 쳐다버며 ‘와, 펠리칸이네!’하고 감탄하는 순간 그놈이 제 입에 똥을 싸더군요.
어쨌든 중요한 건 아주 멋진 시간을 보냈다는 겁니다. 정말 순수하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지도 않았고 숨을 씩씩 몰아쉬지도 않았죠. 그리고 완전히 돌아와 자전거를 멈추고는 평소처럼 타이머를 들여다보니, 45분이 막 지나 있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45분밖에 걸리지 않았을까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됐어요. 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43분이 아니라 45분…. 이 2분 차이에서 깨달음을 얻은 저는 인생에 접근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가 사업에 성공한 작은 이유가 이 글 안에 담겨져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가 시간을 내서 노인의 지혜에 귀를 기울였다면 얼마나 더 놀라운 삶을 살수 있었을까요?
노인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사실 설교 서두에 저도 쉼보르스카 시인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고백을 하였지만 그래도 저는 ‘안 그런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유는, 요즘은 방학기간에 들어가 있지만 9월부터는 또 수요 여성 공부를 시작합니다. 많은 노인의 지혜를 소유한 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참석하시는 분들 중 절반 정도가 상록회원이십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웁니다. 그래서 저는 ‘안 그런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교우 여러분,
2분의 시간을 내어 노인의 지혜에 귀 기울이십시다. 노인의 지혜를 소유한 예레미야는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