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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을 행하셨다” (시편 126편 1-6절) 08/13/2017

 

사샤의 나이가 열한 살 때의 일입니다. 아침에 등교해서 책상 앞에 다가간 그녀는, 지난밤에 누군가 자기 책상에 못된 장난을 쳐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책상에 쓰인 나쁜 말들은 금방 지워졌고 장난질한 학생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그 낙서는 거짓이라고 말하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낙서는 40년이 넘도록 그녀의 뇌리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습니다.

“사샤는 못 생겼음. 누구도 그 애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음.”

어린 사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낙서를 사실로 믿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자신을 칭찬하는 친구들을 멀리하고 사람을 만나는 직업은 거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기 보다 그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완고한 생각은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왜 이처럼 사샤는 고통스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누구의 잘못인가요? 낙서를 한 친구…? 아니면…?

 

오늘 시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후 성전을 회복하고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시인의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무엇이 놀라운 고백인지 의아해 하실줄 압니다. 제가 조금 각색해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내용은 같습니다. 제가 각색을 한 것은 ‘시온의 포로’ 대신에 ‘바벨론의 포로’로 대치한 것입니다. 내용은 같아 보이지만 숨은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시인은 강한 self identity를 가지고 시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온의 포로’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시온’의 원어적 뜻은 fortification 곧 한국어로는 ‘요새’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150번 가량 나오는데 많은 경우 예루살렘 성을 일컸습니다. 곧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요새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래 사용되다가 결국은 시온성 하면 예루살렘 성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온의 포로’라는 말은 좀 어색합니다. 어떻게 요새가 포로가 됩니까? 호랑이가 고양이 덫에 걸립니까?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시인은 스스로 특별한 포로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포로이지만 포로는 포로입니다. 그래서 해방을 맞이 했을 때 꿈꾸는 것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호랑이가 고양이 덫에서 풀려난 것을 좋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좋아하고 있을까요? 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해방을 맞이한 시온의 포로 특별한 포로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웃음도 그냥 웃음이 아닌 특별한 웃음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늘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오늘까지 건재하는 이유는 아마 오늘의 시인과 같은 self identity를 갖고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긍심이 강한 유대인들의 특징 중 세 가지를 꼽는다면, 교육, 음악, 유머를 들수 있습니다.

요즘 학계에서 유대인들의 위치를 잘 아실줄 압니다. 음악계에서도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유머입니다. 웃을줄 아는 민족입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멸종시키려는 때에 전 세계적으로 유대인은 환영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도 유대인들의 이민을 제한했고 이 당시 팔레스타인이 영국 통치하에 있었는데 유대인 이민에 대해서 문을 굳게 닫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유대인 가족이 국경에서 독일의 출입국 관리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가장이 관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그러자 관리는 자기 옆에 놓여있는 지구본을 돌리면서,

“이 나라에서는 이민을 억제하고 있으니까 안 되고, 또 여기는 사막이니까…” 하면서 여러 나라를 차례차례로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가족의 어린이가 말합니다.

“아저씨, 이것 말고 다른 지구는 없어요?”

 

그들은 웃을줄 아는 민족이었습니다. 웃음이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 시절을 시온의 포로가 되어 살게 했던 것입니다. 하여튼 시온의 포로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웃을줄 알았기에 해방후 함박 웃음을 멈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2절 후반부를 다시 봉독해 드리면,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그들의 웃음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웃음에서 찬양으로…, 이것이 시온의 포로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만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얼마나 특별한 민족이었냐 하면, 온 세계가 함께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문맥을 보면 두 그룹이 찬양을 주거니 받거니 화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민족은 찬양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이에 온 세계가 화답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시온의 포로의 해방은 온 세계의 축제가 된 것입니다. 정말 이웃이 함께 축제를 벌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은 그렇게 받아드리고 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호랑이가 덫에서 풀려 났으니 자기를 잠시 고양이 덫에 가두어 놓았던 자들에게 복수를 감행해야 하나요?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시인의 눈은 자기들의 원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포로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로 돌려집니다. 이제는 그들이 세상의 주인공 됨을 보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실수로 고양이 덫에 잠시 걸렸었는데 뭐 복수할게 있겠습니까? 불쌍한 구양이들을 좇아가 복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반면 시인은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포로로 남아 있는 자들이 많이 있음을…. 사실 그는 온 세상과 함께 하는 찬양으로 시를 끝낼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직도 포로가 되어 있는 자들로 마음을 돌립니다. 그들을 주인공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특별한 시온의 포로들과 평범한 포로들의 차이입니다.

처음에는 특별한 시온의 포로들과 평범한 포로들이 구분이 잘 되지 않습니다. 평범한 포로들도 해방이 되면 꿈꾸는 것 같고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찬양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끝을 냅니다. 그러나 시온의 포로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해방이 안 된 포로들을 자기들의 삶에 주인공으로 초대합니다.

 

어린 왕자를 지은 생떽쥐베리에 대해서 잘 아실줄 압니다. 원래 직업은 비행기 조정사인데 그는 자서전적 소설을 통해 자신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번은 아프리카 리비아 사막에 비행기가 추락했습니다. 사막을 하염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밤에는 낙하산 천을 찢어 모래 위에 깔아 놓았다가 새벽에 이슬을 짜서 목을 축입니다. 그리고 계속 걸어 갑니다. 걸을수록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찾아 옵니다. 하지만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라디오 앞에 앉아 이지러진 얼굴로 절망에 잠겨 기다릴 아내의 얼굴과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친구들의 얼굴이었습니다. 그 때 섬광처럼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조난자들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 내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

그 생각이 결국 구원의 서곡이었다고 합니다. 참 구원은 이웃을 구원하려고 할 때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구하려 할 때 스스로를 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시온의 포로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그런데 남방 시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남쪽지방을 네게브라고 하는데 그 곳의 시내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비가 오면 하루 아침에 큰 강이 되곤 합니다. 곧 ‘남방 시내들 같이’라는 표현은 하루 아침에 큰 일을 이루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처음 소개해 드린 사샤의 이야기를 드린다면 그녀가 평생 고통 가운데 살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낙서 때문이 아닙니다. 낙서를 한 친구 때문이 아닙니다. 이유는 사샤 본인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시온의 포로’라는 멋진 표현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샤에게도 40년 동안 여러 번 기회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생떽쥐베리처럼…. 스스로 시온의 포로라는 표현을 할수 있는 기회를, 그러나 그런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닐까요? 가장 큰 이유는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복수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이웃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사샤가 어느날 시온의 포로가 되어 이웃을 위한 고백을 하였더라면 더 이상 옛 모습의 사샤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것입니다. 참 자유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계속해서 시인은 진정으로 해방된 자들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5, 6절 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진정한 해방을 맛 본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해방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매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사샤를 위해서…, 온 인류의 해방을 위해서….

교우 여러분,

3절로 우리들의 삶을 마치게 하지 마십시다. 6절까지 가십시다. 사샤를 위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감사하게도 우리보다 이 길을 먼저 훌륭하게 가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분으로 저는 안중근 의사를 꼽고 싶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얼마전부터 처조카가 한국에서 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이는 11살입니다. 제가 금주 설교 준비를 위해서 안중근 자서전을 읽었기에 저녁 식사를 하면서 물어 봤습니다.

“안중근이 누군지 아니?”

자기 형과 바로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손으로 총 시늉을 내면서 형 머리를 향하여,

“피융~~~.”

나쁜 일본 사람을 저격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냈던 것입니다. 저도 사실 그것보다 약간 더 아는 정도였는데 이번에 자서전을 읽으면서 안중근 의사를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새롭게 느꼈는데, 첫번째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물론 저는 천주교 신자인줄은 알았지만 독실한 신자임은 새롭게 알았습니다.

그가 저격을 하면 체포될줄도 알았고 사형당할줄도 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용맹한 행동을 할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천국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인사는 늘 “천국에서 만나자”였습니다.

 

한편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가 일본을 미워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본 천황은 동양평화를 추구하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이토가 천황의 뜻을 거역하고 동양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토만 사라지면 동양 평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증거가 두 가지가 있는데 그는 뤼순 감옥소 안에서 일본 교도관들과 아주 친하게 지냅니다. 많은 일본 교도관들이 안 의사를 존경하게 됩니다.

이 보다 더 큰 증거가 있는데 안 의사는 사형이 선고된 후에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사형 당하기 전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동양 평화론’이라는 책을 쓰고 사형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재판관은 허락합니다. 그러나 어떤 연고인지 동양 평화론을 시작은 하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사형 당합니다. 그가 일본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음은 그의 유언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부탁을 남깁니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

 

오늘 8.15광복절 기념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광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양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난다면, 오늘의 말씀과 비교하면 우리의 예배는 평범한 포로들의 예배 곧 오늘 말씀 3절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진정한 광복절 기념 예배로 초대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아직 포로로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릴 때 우리들의 예배는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숨겨져 있는 복수심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우연히 남산쪽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남산 도서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약속이 없던 날이라 잘 됬다 하고는 기념관에 들어 가 봤습니다.

아주 잘 만들어져 있어서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 안에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들이 실제 모양으로 만들어 놓아져 있었습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안 중근 의사가 4명의 일본군을 석방해 주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 자녀들이 많이 방문하였는데 정말 한국의 어린이들이 안 의사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지 않겠나 생각하면서 한국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안 의사가 4명의 일본군인들을 석방시키려 할 때 많은 군인들이 반대했습니다. 어떤 군인은 불만을 품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많은 어린이들이 안 의사의 모습을 봅니다. 동양 평화를 위해서 몸바치는 모습을…. 오늘 본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지금도 안 의사가 뿌린 눈물은 계속 거두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일은 오늘 광복 기념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축복 광복의 축복을 기뻐해야 합니다. 축제를 벌여야 합니다. 온 이웃과 더불어…. 그러나 여기서 마친다면 평범한 포로 해방일 뿐입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특별한 해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특별한 해방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덧 복수심의 포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특별한 해방을 기뻐하는 자들은 이웃의 해방을 위해 울며 씨를 뿌리러 나아갑니다.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 올 것입니다.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시온의 포로들을 통해 하나님은 크신 일을 행하십니다. 이에 시인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온 세계가 화답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큰 일을 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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