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이야기를 들으시고 어느 나라 이야기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한 분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웃지 않는 거리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요. 젊은 사람도 아이도 나이든 사람도 모두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 말을 듣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써 내려갑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사람들이 웃음소리를 내는 모습이 요즘은 줄어들었다는 것을 언젠가 자각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높은 소리 같은 것을 거의 듣지 못한다. 나이가 지긋한 어느 보육교사는 “이전과 비교해서 아이들 목소리가 작아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사회 전체에서 감정 관리가 진행되고, 이것이 우리 생활에도 침투했을 것이다. 그리되면 사람 목소리는 작아지고 낮아진다. 문득 생각해보니 어느샌가 큰 소리와 높은 목소리로 웃으면 주위로부터 눈총을 받는 세상이 됐다.
웃음소리 대신 조용하고 무거운 공기가 세상에 가득 차 있다. 조용한 것뿐만 아니라 불만과 안절부절, 그리고 감춰진 침묵과 무표정을 만나는 것도 늘었다.”
자, 어느 나라 이야기일까요? 한 문단만 더 읽어 드립니다.
“아이들의 미래가 마음에 걸린다. 사회의 공기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성장에는 어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연대가 충분하고, 웃음이 있는 삶이 주위에 있으면 아이는 점점 스스로 큰다. 용감하게도 상냥하게도 현명하게도 된다. 만약 가족이 웃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주위에서 도움을 준다. 그런 관계가 필요하다. 지금 삶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어른이 증가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살아가기 위한 공기가 희박해진 것과 똑같은 사태이다.”
자, 어느 나라 이야기인지 감을 잡으셨을줄 압니다. 한국…?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이 도쿄를 걸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동교육에 평생을 바친 일본인 저자 오자와 마키코 씨가 쓴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오늘이 9월 첫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저희 교회로는 다음주가 정식 진급주일이지만 학교에서는 지난주 아니면 금주에 저희 자녀들은 새 학년으로 진급하게 됩니다.
저는 이 분의 글을 읽고 한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3, 4년전까지 함께 신앙생활하시다가 멀리 이주하신 분이 저희 교회에 다시 오셨다면, 어떤 인상을 받을까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앞을 내다 보는 것입니다. 최근에 타 지역으로 이주하신 분이 3, 4년 후에 다시 오셨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으면 좋겠습니까?
아이들을 위한 더 풍성하고 신선한 공기가 가득찬 교회가 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교회가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의 두 번째 세계 선교 여행중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참고적으로 사도바울은 세 차례 선교 여행을 떠났는데 모두 출발지는 파송 교회가 있는 안디옥이었습니다. 곧 안디옥 교회가 사도바울을 파송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오늘의 이야기는 2차 선교 여행 이야기인데,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교회인 안디옥에 돌아 왔습니다. 소위 말해서 안식년을 가진 것 같습니다. 쉼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던지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을 합니다. 1차 선교 여행지를 둘러 보면서 새롭게 믿음의 식구가 된 교우들을 응원을 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1차 선교 여행 지도를 보겠습니다.
안디옥에서 시작해서 구브로라는 섬을 지나 소아시아로 들어가서 루스드라를 거쳐 더베까지 간 후 돌아옵니다. 돌아 올 때는 구브로 섬을 거치지 않고 돌아 옵니다. 그리고는 안식년을 가진 것입니다.
안식후 다시 안디옥에서 시작해서 같은 경로를 거쳐서 도시를 방문하기로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하는데 바울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났던 마가가 밤빌리아에서 슬쩍 샜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래서 심하게 다투고 이참에 둘이 갈라집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바울은 실라는 데리고 각기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선교사들이 다투었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놓아 두실수 밖에 없으셨던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을까요?
하여튼 그 후 바나바는 1차 선교 여행지를 마가와 함께 갑니다. 곧 지도에 보이는 것처럼 안디옥에서 구브로 섬을 거쳐서 소아시아로….
한편 바울은 같은 길을 갈수가 없었습니다. 다투었으니…. 그러면 바울은 어떤 길로 실라와 함께 가야 할까요? 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더베와 루스드라는 1차 선교 여행 지도를 보면 바울이 선교한 마지막 두 도시입니다. 곧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에 거쳤던 도시를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2차 선교 여행 지도를 보겠습니다.
바나바는 바다를 건너 구브로 섬 쪽으로 먼저 갔을텐데, 바울은 육로로 갑니다. 1차 선교여행지를 거꾸로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다투도록 내버려 두신 이유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1, 2절을 봉독해 드립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왜 하나님께서 다투게 놓아 두셨을까요? 결론적으로는 마가 대신 디모데를 바울과 동행하게 하시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그 외에도 두 사람을 비교해 보면 이유 몇 가지를 쉽게 생각해 낼수 있습니다.
먼저 마가는 바나바의 사촌입니다. 사촌이라는 뜻은 바나바 아니면 바울과도 나이가 비슷한 성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1세라는 것입니다. 또 바나바의 사촌이라는 것은 십중팔구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곧 나이가 꾀 된 유대인입니다. 반면 디모데는 젊은 청년입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 어머니만 유대인입니다. 사실 실라도 큰 힘이 되고 있지만 실라도 마가처럼 1세입니다. 바울은 쉽게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젊고 유대인이자 헬라인인 디모데 안에 장래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옆에 두면서 위대한 지도자로 키울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역자로 삼습니다. 한편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요? 4, 5절 말씀입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사도바울은 당연히 디모데와 함께 선교 여행을 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디모데와 함께 하니 더 선교가 잘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에 있었던 일은 뒤로 하고 앞으로 디모데와 실라와 더불어 펼쳐질 놀라운 복음의 역사에 대한 기대를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기 시작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그런데 웬일인지 어느 때부터 선교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바나바와 갈라진 것이 잘 못 된 것이었었나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것은 지나간 일이고…, 원래 계획은 1차 여행을 거꾸로 해서 다녀 보려고 했는데 뭔가 더 이상 계획대로 할수 없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소아시아를 빙 돌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1, 2차 선교 여행지도를 보시겠습니다.
빨간색이 1차 선교 여행이고 파란 색이 2차 선교 여행입니다. 많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소아시아 거의 끝인 드로아에 이르렀습니다. 밤에 바울이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자기들은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마게도냐는 헬라인들의 지방입니다. 헬라 문화의 원조라고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선교를 한 단계 높이신 것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마게도냐 지방으로 곧 그 유명한 그리스 문화가 번성하고 있는 땅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1차 선교 여행지를 돌아 보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으셨습니다. 소아시아를 넘어 마게도냐로…! 그야말로 세계를 향한 선교를 하도록 하나님은 간섭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앞에 사도바울의 계획은 물거품처럼 사라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위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 누구였겠습니까? 마가였을까요? 아닙니다. 마가와 비슷한 실라도 아니었습니다. 디모데였습니다. 젊은 청년이면서 헬라인 아버지를 둔 그리고 유대인 어머니를 둔 디모데였습니다. 왜? 마게도냐는 헬라문화가 시작된 곳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사도바울의 계획을 무산시켰습니다. 결국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물론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야 하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은 바울에게 크레딧을 주고 싶습니다. 디모데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디모데를 선택하게 하셨을줄 압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연스럽게 디모데를 선택합니다. 사실 디모데를 선택할 때까지도 마게도냐로 건너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디모데처럼 헬라문화를 잘 아는 젊은 청년을 후계자로 삼길 원했던 것입니다.
곧 디모데를 선교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미래를 위해서 큰 일꾼이 되게 하려고 함께 사역하길 원했다고 봅니다. 훌륭한 일꾼이 되려면 믿음의 선배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것을 바랬을 것입니다.
일본어로 ‘배움’이 ‘마나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마나비는 일본어로 ‘모방’인 ‘마내비’와 같은 어원이라고 합니다. 모방이 곧 배움이라는 뜻입니다. 모방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아야 합니다. 같이 있어야 합니다.
한글로 ‘배우다’를 어느 분은 재미있게 해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엄마의 배에 아기가 잉태하듯이 우리들의 삶의 배에 씨앗이 심겨져서 커 가는 것에서 ‘배우다’가 나왔다고 합니다. 아주 의미 있게 들었습니다.
어떤 것이 우리들의 삶의 배에 씨앗으로 심겨지겠습니까? 가까이서 보고 들은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옆에서 보고 듣고 배우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만 이런 지혜를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이런 지혜를 가졌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와를 택해서 항상 같이 있게 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세워서 같이 있게 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도 12제자를 세우신 이유를 마가복음 3:14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재미있는 것은 전도케 하시려고 12 제자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있게 하시고’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도바울은 헬라 문화권에 속한 청년 디모데를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 선교여행에 동참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보다 더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사도바울보다 더 급하신 것 같습니다. 생각지 못 했던 곳으로 내 몰아 가십니다. 마게도냐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마게도냐로 함께 보냄을 통해서 디모데가 바울에게 잘 훈련을 받게 하는 것만이 목표였을까요?
요즘 토요 아침 기도회에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강해하고 있는데 데살로니가 전서가 이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줍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3:2절을 보면,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 지방에서 빌립보 다음으로 두번째 방문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핍박으로 인해서 이 교회를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 이 교회가 걱정이 되서 방문하고 싶었는데 바울과 실라는 방문하지 못하고 대신 디모데가 다녀 옵니다.
주석가는 아마 디모데만 방문할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2세이기에 갈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단순히 바울과 함께 함으로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사역에 아니 하나님의 선교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는 1세와 2세가 함께 하는 사역을 원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관계를 갖고 있는 바울과 디모데를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미 맡기신 것입니다. 그들을 마게도냐라는 험한 선교지에 보내신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배울뿐 아니라 이미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휴스톤에 큰 재해가 닥쳤는데 저희 교단 교회 중에 휴스톤 중앙 장로 교회라고 큰 교회가 많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교회적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지만 그나마 괜찮은 건물을 이웃을 위한 shelter로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와서 그 일을 돕고 있겠습니까? 영어권 2세 청년들이 돕고 있었습니다. 2세들이 그 일을 더 쉽게 잘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교회를 위해서 새로운 마게도냐를 예비해 두시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마게도냐를 위해 섬길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누구를 사용하실까요? 1세와 2세 3세가 한 마음이 되어서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는 아름다운 관계를 누리는 자들을 사용하지 않으실까요?
교우 여러분,
새롭게 진급하는 자녀들을 위해 최고의 배움의 환경을 조성해 가십시다. 구역 모임을 통하여 선교를 통하여 쉐마의 밤을 통하여 여러가지 모임과 행사를 통하여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늘 공급해 주십시다. 언젠가 우리들에게도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해 잠시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엘리야는 불의 선지자로서 아합왕과 거짓 선지자들과의 싸움에서 불이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 내려와 승리를 했던 선지자입니다.
엘리야의 제자가 엘리사인데 엘리사는 엘리야의 배나 되는 영감을 받게 됩니다.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승천하게 되는데 엘리야가 떠나기 전에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구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엘리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곧 우리 자녀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드리면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우리 보다 갑절의 영력을 더 하소서.”
우리들의 영력이 100이면 자녀들은 200이 되고 500이면 1000 이 되고, 반면 10이면 20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의 영력이 자랄수록 자녀들은 배가 되니 말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자녀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사도바울을 보는 디모데의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디모데와 같은 우리 자녀들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1세와 2세 3세가 함께 배우며 가르치며 생활하십시다. 그 때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마게도냐가 보일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