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1-6) 10/01/2017

지난 주 월요일 곧 9월25일은 미국 역사상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60년전에 9명의 흑인 학생들이 백인 학교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파송한 만 명의 군대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학교에 등교한 날입니다. 동영상을 먼저 보겠습니다.

정확히는 1954년에 대법원에서 인종차별은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겨우 학교에서 흑인들을 받기로 하지만 그것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처음에는 Arkansas 주지사가 군인을 동원해서 흑인 학생들을 학교에 등교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연방군인 천 명을 보내서 흑인 9명의 학생으로 하여금 등교를 돕게 한 것입니다.
이 일이 불과 60년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60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우리는 어쩌면 좋은 시절에 미국에 와서 살고 공부도 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그리고 이 모든 게 5, 6십년전에 수고하신 분들 덕분이 아닐까요? 구체적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미국 대통령만 잘 뽑으면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니 전세계에 평화가 오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미 대통령으로 인해서 평화가 온다는 데는 별로 기대를 거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희망을 두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럼 사도바울은 누구에게 희망을 두었을까요?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각자의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 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소위 말하는 difference maker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difference maker가 되려면 어떠해야 할까요? 2, 3절 말씀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는 것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부르심치고는 좀 조촐해 보이지 않나요? 우리를 온 세계를 크게 변화시키는 일에 불러 주시지 고작 하나 되게 하는 일 좀 실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에게는 이처럼 큰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가 하나가 되면 온 세계의 변화는 저절로 뒤따라 온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온 세계를 변화시키는 하나됨의 시작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죠? 제일 먼저 겸손과 온유를 언급합니다. 겸손과 온유가 위대한 인류를 하나 되게 하는 일의 시작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겸손과 온유를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겸손은 스스로 깨어지는 것입니다. 작아지는 것입니다. 한편 온유는 이웃을 껴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웃이 어떤 잘못을 해도 오래 참음 가운데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온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나오지 않을까요?

오래 전에 저희 교회 원자력을 전공하신 분에게 아주 귀한 것을 배웠습니다. 핵폭탄은 분자가 깨어지면서 생기는 에너지로 만든 것인 반면 수소 폭탄은 깨어진 것들이 하나가 될 때 생기는 에너지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핵폭탄 위력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핵폭탄은 무언가 깨어질 때 위력이 나타납니다. 저는 겸손의 힘은 바로 핵폭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겸손해질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핵폭탄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핵폭탄 보다 몇 배나 더 센 폭탄이 수소 폭탄인데 수소 폭탄은 깨어진 것이 합쳐질 때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곧 깨어진 것이 하나가 될 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겸손과 온유는 double, triple의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어질 때 겸손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반면 겸손히 이웃과 하나가 될 때 겸손의 위력보다 훨씬 더 큰 온유함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바로 이를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 온 세계의 변화는 저절로 뒤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편 사도바울이 이런 놀라운 깨달음을 갖게 된 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감옥 속에서 깊은 영적 체험을 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이 감옥 안에서 깨달은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질서 내지 우주적 창조의 제목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 제목은 바로 ‘하나됨’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됨을 향하여 멋지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라는 것을 감옥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바로 이 하나됨을 매일 매일 체험하는 것이고 최고의 하나됨을 향하여 끝없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가 되는 것이니 하나가 될 때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됨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식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물론 세례를 베풀고 받는 것도 하나됨을 향한 아름다운 예식입니다. 사실 5절 말씀이 “세례도 하나요”로 마쳐졌는데 여기에 하나를 더 붙인다면, “성만찬도 하나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니 성만찬은 당연히 하나입니다. 아니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갑니다. 그 결과 우리가 알게 모르게 수소폭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전 세계인들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날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역사를 향하여 멋진 아름다운 수소폭탄이 터지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 되는 것은 생각보다는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몇번 말씀드린대로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시 가장 큰 갈등을 빚게 된 것이 아이러니칼하게도 바로 성만찬이었습니다. 하나 되게 하는 축제가 도리어 갈등을 빚게 되었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쩔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마틴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는데 그 후 신학자들이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마틴루터의 뒤를 이어 스위스에 쯔빙글리라는 종교개혁자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두 종교개혁자들의 성만찬에 대해 해석이 달랐습니다. 마틴 루터는 놀랍게도 성찬에 대해 자기와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쯔빙글리는 마귀의 사주를 받은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두 분의 화합의 필요성을 느낀 헤센의 제후 필립은 두 사람이 화해하도록 회담을 주선합니다. 양쪽에서 50여명이 모였습니다. 루터는 쯔빙글리에게 이단이 아님을 증명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하나 하나 심문하듯 질문했고 쯔빙글리는 성실하게 답변했습니다. 루터는 쯔빙글리의 답변을 통해 자신이 상당 부분 잘못 알고 있음을 깨닫고 당황합니다. 교리적으로 쯔빙글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15개의 조항 중에 14개 조항에 합의했고 단 하나, 15번 째 항목인 성찬론에서 견해 차이를 보였습니다.
두 분의 차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루터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 우리가 먹고 마실 때 예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해석했고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상징일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비본질적인 문제를 놓고 두 종교개혁자들은 이틀 동안 논쟁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두 사람이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영주는 이튿날 아침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때 쯔빙글리는 눈물을 흘리며 루터에게 다가가 형제로서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비록 비본질적인 성찬론의 해석이 다르더라도 15개 항중에서 14개의 본질적 항목에서 일치를 보았으니 성도의 사귐을 가질수 있지 않느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쯔빙글리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루터는 결연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형제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처럼 하나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제 아무리 우리들의 갈라짐으로 세상에 핵폭탄이 매일 수십개씩 터져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실 로이드 존스라는 영국의 목회자는 마틴 루터의 성만찬에 대한 실수는 상상할수 없는 피해를 개신교에 가져 왔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근거에서 그 것을 주장하는지는 알수 없지만 저는 십분 거기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가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쯔빙글리의 겸손과 온유한 마음입니다. 마틴 루터로 인해서 나쁜 핵폭탄이 터졌지만 만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또한 쯔빙글리의 겸손과 온유를 보셨습니다. 훨씬 더 놀라운 위력으로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셨을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좋은 핵폭탄이요 좋은 수소 폭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외에는 쯔빙글리에 대해서 잘 모르실줄 압니다. 반면 마틴 루터에 대해서는 다 잘 아실줄 압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는 마틴 루터나 쯔빙글리나 똑 같은 한 인간들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마틴 루터의 잘 못이 훨씬 커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명의 쯔빙글리의 온유함을 더 크게 보시고도 남으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서두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우리들 보기에는 대통령이 하나됨을 깨는 것이 세상을 깨는 것처럼 더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대통령이나 우리나 모두 한 인간입니다. 대통령이 하나됨을 깨어도 무명의 한 사람의 온유가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하나됨을 깬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이웃과 하나가 되는 작은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은 하나됨이 대통령의 잘못을 이기고도 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계속 좋은 수소폭탄을 만들어내십니다.

지난주에는 루이빌 총회에서 열리는 저희 교단 남선교회 총회에 주강사가 되어서 참석하였습니다. 목요일 아침 6시반에 집을 떠나서 일단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좀 늦게 떠났습니다. 당연히 시카고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시카고 공항이 넓어서 셔틀버스를 타고 다음 비행기 게이트로 가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셔틀버스가 늦게 오는 바람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어 갔습니다. 이미 게이트는 닫혀 있었습니다.
세 시간을 더 기다린 후 다른 비행기를 타고 루이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녁시간에는 도착을 해서 제 강의를 잘 마쳤습니다. 하루 종일 시달린 후 강의를 마쳐서 꽤 피곤했습니다.
그래도 다음 날 강의 준비를 위해 방에서 준비를 한 후 취침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피곤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제 강의가 11:30분으로 되어 있어서 호텔에서 좀 쉬고 있다가 그 시간에 맞추어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 가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많은 분들의 얼굴을 보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아침 예배와 웤샵도 다 참석하였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들과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저는 미 대통령처럼 천 명의 군인을 동원시킬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스스로는 동원시킬수 있습니다. 하나됨을 지키는 일에…. 그 때 하나님께서 좋은 수소 폭탄의 위력을 당신께서 필요하신 곳에 사용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이와 같은 작은 하나됨의 삶을 사는 분들이 세상 곳곳에 숨어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는 오고 가는 온 세대의 크리스챤과 하나가 되는 축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매사추세츠주에 앰허스트라는 작은 마을에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시인이 살았습니다. 디킨슨은 시를 쓰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평생을 집에 은둔했습니다. 작품을 거의 발표하지도 않는 비사회적인 시골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시를 쓸 때마다 자신이 세상의 모든 시인들과 함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인들을 ‘영혼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 혹은 ‘책꽂이에 있는 동족’이라 여겼습니다. 따라서 시를 쓸 때 그녀는 전혀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사후에 시가 발견되어 그녀는 19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인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시를 쓸 때 위대한 시를 쓸수 있었는데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한 모든 분들을 ‘영혼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 여기고 살아 간다면 정말로 세계 평화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는 자들이 되지 않을까요?

주님의 거룩한 성만찬에 참여하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작은 일로부터 이웃과 하나 되기를 힘쓰십시다. 이 일에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만유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This entry was posted in 설교 원고.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105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1-6) 10/01/2017 webmaster 2017.10.02
104 “너 있는 곳에서” (창세기 13:1-18) 09/24/2017 webmaster 2017.09.25
103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22-27) 09/17/2017 webmaster 2017.09.18
102 “바울과 디모데” 사도행전 16:1-10 (09/03/2017) webmaster 2017.09.06
101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13 (08/27/2017) webmaster 2017.08.28
100 “큰 일을 행하셨다” (시편 126편 1-6절) 08/13/2017 webmaster 2017.08.14
99 “사랑으로 정의를 세우는 자들” (출애굽기 23장 1-13절) 08/06/2017 webmaster 2017.08.07
98 “노인의 지혜” (예레미야 애가 3:19-29) 07/30/2017 webmaster 2017.07.31
97 “세계를 향한 교회” (사도행전 11:19-26, 131:1-3) webmaster 2017.07.24
96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시편 137:1-9) 07/09/2017 webmaster 2017.07.10
< Prev ... 1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8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