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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기쁨”- 로마서 8:18-25 (2017. 12. 10. 대강절 둘째 주일)

Sermon 121017-로마서 8:18-25- “기다림의 기쁨”

(screen 1) ‘여인과 커피 팟’, 세잔느

세잔느의 ‘여인과 커피팟’이라는 그림을 소개해 드립니다. 저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사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보시는 분에 따라 다 다를수 밖에 없는줄 압니다만, 그래도 제목이 ‘여인과 커피 팟’이니 아무래도 여인이던가 커피 팟이 되어야 할줄 압니다.

제가 요즘 취미 중에 하나로 유튜브로 그림을 감상하곤 합니다. 지난주에는 세잔느에 대한 강의를 한 동영상을 보았었습니다. 가까운 데 있는 the Museum of Fine Arts에서 초청 강사를 모시고 한 강연이었습니다. 강사는 최근에 세잔느에 대한 책을 쓴 분이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는데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세잔느의 그림을 보면 모든 사물이 잘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조화가 잘 될뿐더러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 느껴진다는 질문이었습니다. 강사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보여준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설명하시길, 제목은 여인과 커피팟이지만 가장 중요한 사물은 여인도 아니고 커피팟도 아니고 여인과 커피팟 사이에 있는 teaspoon이라는 것입니다. Teaspoon을 담은 병도 아니고 그 병에 담긴 teaspoon이라는 것입니다.

(screen 2)

계속 설명하기를, 세잔느의 특징은 작은 사물 하나 하나에 최대의 관심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여인과 커피팟을 위해서 teaspoon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teaspoon만으로도 놀라운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곧 세잔느의 그림에서 사물들이 서로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이유는 세잔느의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른 화가들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물체에도 놀라운 세계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에 가장 중요한 물체는 teaspoon이라고 연사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생각이 난 것은 주님께서 그 당시 관심 밖에 있었던 한 아이를 당신이 모든 사람들 앞에 내 세우시면서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곧 주님도 teaspoon과 같은 어린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물로 보신 것이 아닐까요?

오늘 대강절 두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대강절 Wreath에 두 개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저희들의 눈은 모두 두번째 촛불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두번째 촛불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요?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두번째 촛불을 바라 보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멧세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실 사도바울은 두 가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현재 처하고 있는 고난입니다. 또 하나는 장차 나타날 영광입니다.

 

세잔느가 특별한 눈을 갖고 있었기에 보잘 것 없는 teaspoon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바울은 더 특별한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광보다는 고난을 보는 눈이 더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난 보다는 영광을 더 잘 보았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사도바울의 이 말씀을 들으며  로마 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저희들의 눈에는 영광이 보이지 않는데요. 사방에 고난만 보이는데요.”

너무도 솔직한 표현이죠. 그리고 이 마음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고난은 너무나 잘 보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지난주에 NCKPC정책위원회에 다녀 왔습니다. 정책위원회에 주어진 임무는 NCKPC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회의를 다 마치고 보스톤으로 돌아 올 때의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미래의 영광 보다는 현재의 어려움이 더 많이 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저도 영광 보다는 고난을 더 가깝게 보는 눈을 가진 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럼 바울과 우리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바울처럼 영광을 보지 못할까요? 19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사도바울과 우리들의 차이는 피조물을 보는 눈의 차이입니다. 사도바울은 영광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눈을 피조물로 돌리고 있습니다. 사방에 깔려 있는 피조물을 먼저 제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피조물들도 무엇인가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을 잘 아실줄 압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그 말을 듣자 마자 코웃음 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외침은 달랐습니다.

“나는 고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오늘 teaspoon이야기를 드렸는데 살짝 물체를 바꿔보겠습니다. 제 앞에 마이크가 있습니다. 이 마이크는 누구를 위해 존재합니까? 저를 위해 존재합니다. 물론 이 마이크를 통해 듣고 계시는 많은 분들을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마이크가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고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마이크는 지난 1주일 내내 이 마이크를 사용할 하나님의 아들들을 고대했던 것입니다. 정말 피조물들은 대단합니다.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보스톤으로 돌아 왔는데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돌아 온 저와 교우님들을 이 마이크는 촛불과 함께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처럼 피조물을 보기 시작하면 금방 드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피조물들은 불쌍합니다. 애처롭습니다. 고대할만한 분을 고대하지 영광보다는 고난에 더 매어 있는 우리들을 고대하다니…. 이를 사도바울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고대할만한 자격이 없는 인간들을 고대하는 피조물들은 마치 허무함에 굴복하듯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 피조물들을 허무에 굴복하게 하실까요? 왜 한심한 인간들을 고대하게 해서 고통을 주시나요? 피조물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것을 사랑하시지 않으시나요? 21절 말씀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피조물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어떻게 사랑하시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동참케 하도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이 피조물들이 이 놀라운 영광의 자유에 이르려면 사람들을 고대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게 될지라도….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피조물의 반응은 어떤가요? “하나님, 우리 피조물들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고대하게 하십니까?” 하면서 반항하나요?

잠시 인간들에게 실망을 하지만 결코 인간들에 대한 존경과 고대를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피조물들은 허무함 가운데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의 위대함이 아닐까요?

제가 좋아하는 꽃 중에 하나가 나팔꽃입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와 이웃집 사이에 있는 fence에 빨간 나팔꽃이 피곤 합니다. 내년에 저희 집에 심고 싶어서 얼마전에 씨앗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 저희 처조카는 파란 나팔꽃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저희 집 근처를 산책하는데 파란 나팔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파란 나팔꽃 씨앗도 받아 왔습니다. 제 책상 위에 컾 안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 컵을 볼 때마다 나팔꽃의 위대함을 느낍니다. 아무리 인간들의 모습이 한심스러워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을 존경합니다. 고대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어디에 심겨지든 멋지게 자라서 활짝 꽃 피울 것입니다.

이 피조물들의 위대함을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사도바울은 위대한 피조물들의 탄식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허무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고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격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그의 탄식과 감격은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23절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피조물을 바르게 보는 바울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있는 탄식을 느낍니다. 탄식은 피조물에게서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때문에 세상이 망했다고 알게 되면 얼마나 절망을 느끼겠습니까? 운동 선수들이 게임에서 자기 때문에 게임에서 졌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비참해집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잠시 탄식하지만 그 탄식은 곧바로 변합니다. 인간들은 허무함에 지지 않습니다. 절망의 탄식을 거부합니다. 거룩한 탄식을 선택합니다. 어서 속히 양자가 될 것을 기다리는 거룩한 탄식 말입니다.

사실 피조물들도 위대합니다. 사람들의 잘 못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허무에 빠졌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인간들을 고대한다는 것은 정말로 위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피조물도 위대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더욱 위대한 것입니다. 자기들로 인해 허무에 빠지는 피조물로 인해서 좌절하지 않고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고대하는 거룩한 탄식의 주인공들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나팔꽃도 위대합니다. 그러나 나팔꽃의 탄식을 들으면서 절망하지 않고 거룩한 탄식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말로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 두번째 대강절 촛불을 바라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대강절은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던 피조물의 탄식을 새롭게 듣는 절기입니다. 아울러 피조물의 탄식을 들으면서 거룩한 탄식에 동참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왜 우리는 피조물의 탄식을 듣지 못했던지를…. 그렇다면 우리도 거룩한 탄식에 동참할텐데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도바울은 무엇인가 고대하는 우리 모두에게 귀한 멧세지를 전해 줍니다. 소망은 보이는 것을 바라는게 아님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가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듣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는게 아닐까요? 우리는 보이는 소망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닌지요?

한 달 전인가 경주에 지진이 나서 한국민들을 많이 당황케 했습니다. 그 와중에 흥미롭다고 할까요 재미있다고 할까요, 하여튼 저에게는 참 소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즘 한국에 입시열이 과해서 많은 교회나 절 요즘은 성당까지 수능전 100 일 기도회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진이 나서 수능이 한 주 연기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도회가 100일에서 107일 기도회가 되었습니다. 지진 덕에 7일 더 기도회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회를 더 오래 하게 되서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실수도 있겠죠.

거기에 더한 것은 기도회에 제일 앞 자리에 나오려고 새벽 같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소식까지 접했습니다.

물론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기도해야 하죠. 친지들에게도 중보 기도 부탁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적으로는 참 소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참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소망과 보이지 않는 소망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한 사람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은 차지하지 못하는 소망입니다. 마치 수능고사에서 한 학생이 잘 보면 상대적으로 다른 학생은 뒤쳐지게 되는 것처럼….

반면 보이지 않는 소망은 한 사람이 차지하면 할수록 이웃도 덩달아 차지하게 되는 소망입니다. 모두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가 주어지는 길이 열립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를 차지할 때 온 피조물들이 함께 차지하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는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피조물의 탄식을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탄식 소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를 기다리기에 터져나오는 탄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를 사모하는 자들 곧 참 소망을 가진 자들은 피조물의 탄식을 듣게 됩니다. 제 아무리 작은 물체라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의 외침 소리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고대합니다. 그래서 나는 존재합니다.”

어제 온 첫 눈으로 온 세상은 아름답게 채색되어졌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모든 눈들은 각기 특유한 아름다운 무늬를 갖고 있습니다. 창세 이후에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아름다운 무늬를 갖고 땅으로 내려 옵니다. 그 아름다운 무늬와 함께 눈들은 외칩니다.

“고대합니다. 그래서 나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중 많은 눈들은 내려 오자마자 사라집니다. 그나마 나무나 잔듸에 내리는 눈들은 오래 그 아름다움을 간직합니다. 길가에 떨어지거나 주차장에 떨어지는 눈들은 떨어지는 순간 허무하게도 그 아름다움을 잃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냥 사라지나요? 탄식 소리와 함께 사라집니다.

“고대합니다. 그래서 나는 존재했습니다.”

무엇을 고대했나요? 보이지 않는 소망을 안고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대하였습니다. 그들로 인해서만이 영광의 자유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곧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대강절 묵상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이였을 때 아버지는 대장간에서 일하였다고 합니다. 매일 일을 마치고는 함께 일하는 친구와 함께 아버지는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 오곤 하셨다고 합니다. 늦은 오후에 저자의 두 형제는 아버지가 걸어오실 길가에 서서 멀리서 기다리곤 했다고 합니다. 둘 이서는 누가 더 먼저 아버지를 보는지 경쟁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청바지에 푸른색 웃도리를 입은 아버지를 보면 먼저 “아버지다. 아버지가 쓰시는 모자와 런치 박스가 보여.” 소리를 치곤했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기다림은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쁨은 자녀들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기쁨으로 기다린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정확히 찾아 왔듯이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주님은 찾아 오십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이 이루워집니다.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오십니다. 기쁨으로 기다리십시다. 온 세상 피조물과 함께 고백하면서,

“나는 기다립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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