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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를 심는 공동체” 마태복음 13:31, 32 (1/7/2018)

새해를 맞아 두 자녀를 둔 부모에게 어느 분이 물었습니다.
“아이들 잘 있어요?”
“둘 다 잘 있어요.”
“몇 살이 되죠?”
“의사는 세 살이고 변호사는 다섯 살이예요.”
한 자녀는 의사로 다른 자녀는 변호사로 키우고 싶은 모양입니다. 새해가 되면서 각각 세 살과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이 두 자녀는 후에 어떻게 되어갔을까요?

안토니 드 멜로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지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George Bernard Shaw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Life isn’t about finding yourself. Life is about creating yourself.”
“인생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부모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자주 들어가는 웹싸이트에 새해를 맞이해서 주는 멧세지로 이 글이 소개되어져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멋진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이 맞는 말일까요? 오늘 신년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주님도 이와 같은 내용의 말씀을 주실까요?

기록적인 추위 가운데 새해를 맞이했는데 1월이지만 벌써 봄이 기대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따뜻하게 하실 말씀을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오늘 신년 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난 주 송년 주일에 주신 말씀에 연이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의 말씀이었는데 오늘은 겨자씨 비유의 말씀입니다. 31절 말씀입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주님은 참 재미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도 천국에 대한 비유였는데, 지난 주에는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곧 사람이 주체였습니다.
비유를 풀이할 때는 늘 연사와 청중의 관계를 염두에 두시고 생각하면 훨씬 더 실감나게 말씀이 와 닿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오늘 본문 바로 전에 주님은 천국을 좋은 씨를 뿌린 사람에 비유하셨었습니다. 청중은 모두 공감하였을 것입니다. 계속 주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천국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청중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니 천국을 사람으로 비유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사람이 아닌 피조물 그것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에 비유할까?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줄 압니다. 청중의 마음을 잘 알아채신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깨달은 사람은 무릎을 칩니다.
“아, 이래서 겨자씨에 비유했구나.”

저희 집 피아노 위에는 겨자씨가 담긴 작은 병이 있습니다. 오래전 어느 교우님으로 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사실은 어느 교우님의 아버님께서 보스톤에 와 계실 때는 늘 저희 교회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오래전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겨자씨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다녀 오시더니 저에게 작은 병에 담긴 겨자씨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를 보여주실 겸 아주 작은 병에 겨자씨를 담아서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겨자씨를 피아노 위에 늘 놓아 두었었습니다.
금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피아노 위에 있던 겨자씨 병을 책상 위에 놓았습니다. 자주 겨자씨를 보았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정말로 작습니다. 이 작은 씨가 나중에 커져서 나무가 된다고 생각하면 감격스럽습니다. 감동이 절로 됩니다. 겨자씨가 나무로 보입니다. 주님은 겨자씨 안에서 나무를 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도 저처럼 겨자씨 안에 있는 나무를 보시고 겨자씨를 천국에 비유하셨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천천히 음미하면 다른 무엇이 보입니다. 다시 봉독해 드릴까요?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싹이 난 후 자라서 풀보다 커집니다. 나무가 됩니다. 많은 가지를 냅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주님은 겨자씨 안에 담겨져 있는 과정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풀도 아니요, 나무도 아니요 과정입니다.

만일 천국이 결과라면 주님께서는 달리 천국을 표현하셨을 것입니다. 곧 “천국은 작은 씨에서 나온 겨자나무 같으니” 라고 표현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천국은 겨자씨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이 겨자씨가 나무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겨자씨 안에 있는 앞으로 놀랍게 펼쳐질 과정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들이 자주 쓰는 말이 있죠. Productivity. 생산성. 천국은 생산성이 아닙니다. 천국은 과정입니다. Process입니다. 과정 자체가 천국입니다. 주님은 겨자씨 안에 펼쳐질 과정이 바로 천국의 모습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Productivity는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과정을 보는 자들에게는 감동이 찾아 옵니다.
늘 뉴우스에서 들먹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GDP(Gross Domestic Product). GDP는 국가의 힘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천국은 GDP로 정의 내려지지 않습니다.
처음 소개해드린 의사와 변호사 자녀 이야기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는 현대 사회를 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과를 중요시 여깁니다. GDP만 올라가면 됩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수를 쓰던 의사와 변호사가 되면 됩니다.
한편 George Bernard Shaw의 말도 듣기에는 그럴싸 하지만 의사와 변호사 자녀 교육과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인생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는 인본주의로 향하는 지름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어떻게 보면 인본주의가 더 매력적입니다. 스스로를 만들어 갈수 있으니 말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정만을 지켜 보면서 감동해야 하니 좀 소극적인 느낌입니다. 그래서 Bernard Shaw같은 사람들이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두커니 천국의 구경꾼일까요? 31절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천국은 그냥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심겨진 겨자씨입니다. 그냥 심겨진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입니다.
교우님들 중에 밭을 가꾸시는 분들 계실줄 압니다. 밭을 가꾸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곧 수고와 땀을 흘려 가꾼 밭에 심겨진 겨자씨가 바로 천국과 같다는 것입니다. 비로서 밭에 심겨질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과정은 활개를 피기 시작합니다.

말씀드린대로 아직도 오래전에 받은 겨자씨가 있는데 병에 담겨져 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보니 참으로 애처롭게 느껴졌습니다. 겨자씨 안에 과정은 담겨져 있는데 그 과정이 활개를 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제가 마음을 먹고 심는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밭을 가꿔야 합니다. 밭을 가꾸기 위해서는 흙을 만져야 합니다.
흙, 흙을 라틴어로는 humus라고 합니다. 이 humus에서 humility곧 겸손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밭은 흙으로 이루어졌죠.
이처럼 밭과 겸손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흙을 만지지 않고는 겨자씨를 심을수 없습니다. 겸손해 지지 않고는 겨자씨를 심을수 없습니다. 허리를 굽혀 흙을 만지지 않고는 심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밭을 가꾼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밭을 늘 겸손으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겸손으로 단장한 우리들의 밭에 겨자씨가 심겨질 때 놀라운 천국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겨자씨 안에 펼쳐질 천국의 과정의 구경꾼이 아닙니다. 겨자씨 안에 있는 천국이 펼쳐지려면 겨자씨는 우리들 밭에 심겨져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놀랍게 펼쳐지는 천국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에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6. 25 전쟁에서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 유공자였던 자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반갑지 않은 이름이었습니다. ‘병신의 아들’이라 놀리는 친구들 때문이었습니다. 가난은 그림자처럼 그를 둘러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술의 힘을 빌려 말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후에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학교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습니다.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을 찾았는데 국가 유공자 의료복지카드를 내밀자 간호사들의 반응이 싸늘했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들었고 몇몇 병원을 돌았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이 사회가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얼마나 냉랭하고 비정한 곳인지 잘 알게 됐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받아 줄 다른 병원을 찾던 중 그는 자기 삶을 바꿀 의사를 만나게 됩니다. 어린 학생이 내민 의료복지카드를 보고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의사는 진료비도 받지 않고 정성껏 치료하곤, 마음을 담아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그 한마디가 어린 학생의 삶을 결정합니다.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
아픈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살자’
그의 삶의 원칙도 그 때 탄생됩니다.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
아주 의과대학교 이국종 교수입니다.
이국종 교수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더 훌륭한 사람은 어린 이국종이 내민 의료복지카드를 보며,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라고 말한 의사입니다. 그 의사는 하찮은 어린 아이 안에 있는 놀라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과정이라는 천국을 보았습니다. 결국 이국종이라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은 것입니다. 겸손히….

교우 여러분,
올해 겸손히 보이지 않는 겨자씨를 우리들의 밭에 심으십시다. 겸손히 흙을 만지십시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가꿔 나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올해 저희 교회 표어를 ‘겨자씨를 심는 공동체’라고 정했습니다. 겨자씨를 심되 함께 심자는 것입니다. 함께 겸손히 허리를 굽히고 흙을 만지자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일에 솔선수범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겸손히 대하십니다.
겸손한 한 의사가 한 사람을 바꿔 놓았는데 우리가 함께 겸손히 흙을 만지면 얼마나 놀라운 일을 보게 될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가 허리를 굽힐 때마다 겨자씨는 심겨지는 것입니다. 천국의 과정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허리 굽힘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따뜻한 천국은 임하는 것입니다.

한편 천국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이죠?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저는 겨자씨를 보면서 새로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겨자씨가 아주 작은데 어느 정도 작으냐 하면 새들도 무시할만큼 작습니다. 겨자씨 하나 하나 주어 먹기에는 너무 에너지가 많이들만큼 작습니다. 그러니 새들이 무시할수밖에…. 그런데 이 겨자씨가 나무가 되면 후에 누가 와서 쉰다구요?
공중의 새들이 와서 쉬는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은 겨자씨가 너무 작아서 무시했었습니다. 자기가 무시한 줄도 모르고 그 가지에 둥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따뜻한 천국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로마가 한 때 오랫동안 전 세계의 최강국이었음을 잘 아실줄 압니다. 서강대 교수 한동일 신부님은 그 이유를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를 넓혀 갔는데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 중 우수한 인재들을 사회 전반에 기용했고 이들을 로마 제국의 경영, 경제, 군사 분야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을 기용할수 있었던 사회적 틀이 바로 라틴어에서 비롯 되었다고 합니다. 라틴어는 수평성을 전제로한 언어라는 것입니다.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의 구분이 없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갑과 을의 관계가 없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 누구도 등용시킬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Pax Romana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면 한글은 갑과 을의 관계가 뚜렷한 언어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주는 장점도 많이 있습니다. 부모 공경 등이 좋은 점입니다. 그러나 잘 못 사용하면 단점도 그만큼 큽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 말을 사용하면서 겸손히 겨자씨를 심을줄 안다면 이 보다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해도 함께 한국말로 새해 인사를 하십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아울러 함께 겸손히 겨자씨를 심으십시다.
오늘 가장 추운 날 신년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겸손히 겨자씨를 심을 때 이미 봄은 찾아올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주변에서 새싹이 돗듯이 파랗게 자라나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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