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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적은 소유” 시편 37:16-26 (02/18/2018)

 

옛날에 ‘은별’이라는 여관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시설을 편리하게 하고 서비스를 친절하게 하고 가격을 조절하는 등 애를 썼지만 수지를 맞추기가 힘들었습니다. 마침내 자포자기한 그는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난 현자가 말합니다.

“아주 간단하다네. 여관의 이름을 바꾸게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은별이라는 이름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데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다네. 여관 이름을 ‘다섯 종’으로 바꾸고 종 여섯 개를 입구에 매달게나.”

“종 여섯 개요? 말도 안 됩니다. ‘다섯 종’이라고 간판에 써 놓고, 왜 여섯 개의 종을 답니까? 도리어 저를 미련한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리지 않을까요?”

“한번 해 보게나.” 현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여관 주인은 현자가 시키는 대로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을 지나던 여행자들이 모두 자기만 그것을 발견했다고 믿으며, 종이 다섯 개가 아니라 여섯 개라는 것을 지적해 주기 위해서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일단 들어와서는 서비스가 융숭한 데 마음이 움직여 그 여관에 머물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관 주인은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안토니 드 멜로라는 수도사가 지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가 막힌 지혜가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은별’이라는 전통적으로 잘 알려진 이름일 때에는 손님이 찾아 오지 않았는데 도리어 ‘다섯 종’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종 여섯 개를 달았더니 손님이 들어 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 더 많이 달아 놓은 것을 지적해주려고…. 자기가 처음 본 것인냥….

 

현자는 정말로 지혜롭습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삶의 특성을 이용해서 사업의 지혜를 알려 주었으니 말입니다. 이웃의 잘못을 밝히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특성을 현자는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이 현자의 지혜가 기독교적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일까? 이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일단 저는 이렇게 보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회색지대가 있습니다.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일수도 있고 인간적인 지혜일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를줄 압니다.

우리가 사는 삶은 이처럼 복잡합니다. 선과 악 그리고 회색지대가 엉켜져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경우 사람의 허영심을 이용하는 사업이 어쩌면 돈을 더 잘 벌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모든 사업체들은 허영심을 불러 일으키는 그럴싸한 광고를 해야 하고 많은 돈을 거기에 투자하고 있지 않습니까? 최고의 CF모델료를 내면서….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우리가 숨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올해도 사순절은 찾아 왔습니다. 사순절을 잘 지키면 이처럼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 무엇이 선이고 악이고 회색지대인지 더 선명하게 보이게 되지 않을까요?

 

사순절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광야 생활하신 것을 기념하면서, 아울러 이스라엘 민족의 40년 광야 생활을 생각하면서, 주일을 뺀 40일을 지키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에 전통적으로 세 가지를 행합니다. 참회의 기도, 절제, 그리고 구제입니다. 이 세 가지를 바로 행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을 더 잘 깨닫고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 멋진 한 해를 주님께 바치게 될줄 압니다.

참회에 대해서는 지난 주 말씀드렸습니다. 상한 심령의 제사를 주님께서 기뻐 받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상한 심령의 제사를 드리는 자들은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고 그러기에 어디를 가든 그 곳이 성소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참회의 축복을 받으십시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우리가 있는 곳이 주님의 성소가 되어 있는 축복을 누리십시다. 한편 이런 복잡한 세상에 살지만 참회의 기도를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16절 말씀입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의인의 적은 소유가 얼마나 값진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계속 몇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소유가 아무리 많아도 무엇합니까? 팔이 부러지면 사용도 못합니다. 반면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십니다. 그래서 적은 소유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한 사람은 악하게 돈을 벌어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콤퓨터를 샀습니다. 그런데 팔이 부러졌습니다. 반면 소유가 적어 가장 저렴한 콤퓨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콤퓨터로 좋은 일을 많이 합니다. 어느 콤퓨터가 행복할까요? 누가 복있는 사람일까요? 그뿐 아닙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온전한 자와 의인은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날을 세고 계시고 그들의 기업을 영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일들은 영원히 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렴한 콤퓨터로 한 일들을 영원히 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19, 20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나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언젠가 큰 어려움이 올 때 의인들은 도리어 빛이 나고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 같지만, 독일 나치들이 운영한 유대인 수용소에서 많은 좋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용소에는 물론 음식이 늘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음식을 병들어 지쳐있는 동료 유대인에게 주곤 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내용은 의로운 삶의 결과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복을 받을수 있을까요? 21절 말씀입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악인은 남의 것을 갚지 않습니다. 반면 의인은 자기 것으로 남에게 베풀고 줍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쉽게 의인과 악인을 구별할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사순절을 맞이하여 구제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인의 축복을 나누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니 의인된 삶이 무엇인지 새삼 돌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 자주 저희 집 근처에 있는 카톨릭 책방에 들립니다. 사실 사순절을 개신교에서 강조하게 된 것은 오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오랫동안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순절 자료를 만들어냅니다.

지난주에는 참회의 기도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그 곳 책방에서 산 책으로 큰 도움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금주에도 구제에 대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책방을 찾아가 봤습니다. 사실 참회에 대한 자료를 찾는다고 했을 때는 수녀가 너무 많은 책을 가져다 줘서 그 중 한 두 권을 고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구제에 관한 책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콤퓨터로 들어 가 보더니 한 책이 있는데 절품이라고 하고는 다른 책은 못 찾겠다고 하면서 겨우 자료집과 같은 책 하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의를 봐서 안 살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값이 저렴해서 내용은 기대하지 않고 살수 있었습니다.

저는 카톨릭의 현실을 한 눈에 보는듯 했습니다. 돈 안드는 참회에 대해서는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니 책도 많이 만들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제에 대해서는 책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참회함으로 의인이 되길 바라지만 의인의 적은 소유를 이웃에게 베푸는데는 관심이 없는 현실을 이번에 느낄수 있었습니다. 참회함으로 의인이 되길 원하지만 정장 의인된 축복에는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의 결과는 어떨까요? 22절 말씀입니다.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의인들은 땅을 차지합니다. 악인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면 왜 의인은 땅을 차지할까요? 나눠준다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닮았으니 곧 의인입니다. 그런데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 의인이 땅을 차지할수밖에….

그런데 지난주에도 인디언들의 이야기를 나눴지만 인디언들은 땅을 소유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땅은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땅에서 나온 소산물을 즐긴 사람들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 말씀도 생각해 보면 의인들은 땅을 소유한다기 보다는 땅을 즐긴다는 것으로 생각하든가 땅에서 나오는 것들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함이 좋을듯 합니다. 왜?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반면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마음껏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시간이 있을 때는 집 옆에 있는 작은 산을 오르곤 합니다. 그런데 독감이 걸렸을 때는 한 주 내지 두 세 주를 못 올라갑니다. 그 때 정말 산에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절감하곤 합니다. 이처럼 땅을 밟는 것이 축복이 아닐까요?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23, 2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길을 끝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 같지만 엎드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붙드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25절 말씀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의인은 평생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의인 자신뿐 아니라 자손까지…. 왜 이런 축복을 누릴까요? 26절 말씀입니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본받아 종일토록 은혜를 베푸는 자들은 그들의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적은 소유지만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고 있습니까? 믿으세요. 여러분의 자손이 망나니 같아도 복을 받을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뜻일까요?

 

 로마 제국이 거의 1,500년간 땅 위에 건재하였었는데, 로마 제국이 시작될 때 주위에 있는 작은 나라와 동맹을 맺었다고 합니다. 동맹의 주제가 바로 ‘Do ut Des.’

일방적으로 한 나라가 유리하고 다른 나라가 불리한 것이 아니고 서로 상호 똑 같이 유리한 조건을 토대로 로마는 이웃 나라들과 상호 조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이웃 나라에게 받을 것은 받고 댓가로 로마시민권을 준다든지 그에 합당한 혜택을 주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정책이 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발전시켰고 ‘Pax Romana’가 되게 했다고 서강대 교수이신 한동일 신부님이 피력합니다.

Give and take’의 정신으로 살아도 이렇게 국가가 부강해 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1500년을 지탱할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모습을 세 가지로 구분하게 합니다. 먼저 ‘take and take’ 악인의 모습니다. 이들은 팔이 부러져서 가진 것을 전혀 사용하지 못합니다. 두번째로는 ‘give and take’ 회색지대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로마는 이를 실천하여 1500년 동안이나 건재하였습니다. 세번째로는 ‘give and give’ 의인의 모습입니다. 자손이 복을 받되 영원한 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Give and give and give의 모습이 바로 종일토록 은혜를 베푸는 의인의 모습입니다.

의인의 모습은 이해가 되는데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종일토록 은혜를 어떻게 베푼단 말일까?

 

사실 인류 역사 가운데 종일 은혜를 베풀고 또 베푸신 분은 ‘give and give and give를 끝없이 하신 분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의인이 될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종일토록 은혜를 베푸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베푸는 자들을 통해 당신의 복을 내리십니다.

곧 주님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하는 분들의 섬김으로 인해 주님의 온전한 축복이 온 세상에 베풀어집니다.

 

St. Catherine of Siena라는 성녀가 있습니다. 이 분이 Saint가 될수 있었던 작은 습관이 있습니다. 음식을 만들 때는 주님을 위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식탁에 음식을 차릴 때는 사도들을 위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차렸다고 합니다.

이 작은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다 보니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는 신비한 체험을 하면서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하며 사는 축복을 누렸다고 합니다.

이웃을 주님으로 사도로 대하며 사는 삶이 바로 은혜를 베푸는 삶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늘 주님을 실제로 만나며 살게 되지 않을까요? 이러한 삶이 바로 종일토록 은혜를 베푸는 삶이 아닐까요?

 

한편 이들은 필요할 때는 주님의 이름으로 받을 때는 받습니다. 줄 때는 적은 소유를 주님의 이름으로 줍니다. 적은 소유를 나눌 때나 받을 때나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기에 의인의 적은 소유가 파워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얼굴을 대하듯이 적은 소유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적은 소유가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구제’ 하면 금방 생각나는 기관이 있습니다. ‘World Vision’입니다. 물론 저희 교회에 많은 분들이 Compassion사역에 동참하시는 줄 압니다. World Vision이 한국 전쟁으로 시작되었다고 알고 계실줄 압니다만 사실 그 전에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1948년 World Vision의 창시자인 Bob Pierce 목사님이 중국에 가서 전도 집회를 하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바로 전에 어느 학교에 가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한 학생이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집에 가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니 아버지가 마구 때리면서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학생은 학교 담당자에게 가서 사정을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다음날 울고 있는 학생을 안고 Pierce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사정을 다 듣더니 선생님에게 학생을 키울수 없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화가 난 목소리로 이미 6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있다고 하면서 말합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할수 있느냐 입니다.”

목사님은 급히 주머니에 있는 돈 전부를 꺼냅니다. 단 5불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주고는 미국에 가서 다시 모금 운동을 해서 보내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목사님은 미국으로 떠납니다.

사실 목사님도 겨우 여비를 만들어서 중국에 선교 여행을 갔었던 것입니다. 이제 남은 5불 마저 다 내어주고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를 위한 모금을 시작합니다. 때를 같이 해서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이 때 World Vision이 만들어집니다. 실제로는 한국 전쟁 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난한 한 목사님으로 인해….

이제는 100개 국가에 3만명의 전임 사역자를 두고 전 세계를 섬기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단 돈 5불로 인해 시작한 것입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영원한 역사를 펼쳐 가게 한 것입니다.

피어스 목사님이 ‘Give and take’의 마음으로 5불을 베풀었을까요? ‘Give and give’의 마음으로 베풀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듯이….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즘은 ‘take and take’의 문화가 가득 찬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give and take’도 옛날 로마시대 이야기입니다. 우리한 때 사순절을 통하여 ‘give and give and give’의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베푸십시다. 자손의 축복을 넘어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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