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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린도후서 4:7-12 (03/18/2018)

어느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도시 한가운데로 강이 흐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아침마다 다리를 건너 시장에 가고 일터로 갔습니다. 그 다리가 낡고 오래됐기 때문에 새로 선출된 시장이 그 옆에 튼튼한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시장은 새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통행량을 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일을 맡은 감독관은 통행하는 사람들 숫자를 세는 일을 도와줄 조수를 물색하다가 한 청년을 소개받았습니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청년은 말이 적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일에 적임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감독관과 청년은 다리의 양쪽 끝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수레와 자전거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정확한 통계를 위해 서로의 숫자를 맞춰 보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센 모든 숫자가 일치했으나 사람 수의 경우에는 언제나 한 명의 차이가 났습니다. 이들은 한 달 동안 통행량을 조사했는데, 날마다 감독관이 계산한 것보다 청년이 센 숫자가 한 명 부족했습니다.
한 명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의문이 든 감독관은 청년에게 매일 정확히 한 명의 숫자가 부족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청년은 눈을 반짝이며 말합니다. 아침마다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성이 그 다리를 건너 일터로 간다고…. 그녀는 자기가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숫자’에 포함시킬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성을 짝사랑하다 보니 숫자로 넣을수 없었던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fiction이라는게 아쉽습니다. 그런데 말이 fiction이지 세상에 근거 없는 fiction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소설가와 여친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도 재연됩니다. 사도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의 관계가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신학자들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최소한 세 차례 편지를 썼고 어떻게 보면 네 차례 썼다고도 생각합니다. 현재 성경에 남아 있는 것은 전후서 곧 두 개의 편지이지만 고린도전후서의 내용을 보면 최소한 한 두 편지는 더 썼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물론 더 많이 썼을수도 있구요.
이처럼 편지를 여러 차례 쓴 것만 가지고도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짝사랑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 절을 보면 사도바울의 짝사랑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짝사랑도 이만 저만한 짝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은 참회의 기도와 절제 및 구제의 삶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절기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사람을 더 이상 숫자로 보지 않고 특별한 관계 안에서 보고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모습이 바로 사도바울의 모습입니다.
이제 사순절이 두 주간 남아 있는데 남은 기간 주님을 더욱 닮아 특별한 관계 안에서 이웃을 만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축복을 받게 되는지 본문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두 단어가 눈에 띄입니다. 보배와 질그릇입니다. 사도바울은 보배를 가졌다고 확신합니다. 아울러 자신을 질그릇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보배는 보석함에 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보배가 가당치도 않게 자기와 같은 질그릇에 보관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겸손한 표현입니다. 하여튼 이 보배가 무엇인지 감은 오는데 정확히 ‘이 보배’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 봐야겠습니다. 문맥상 바로 전 귀절에 나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좀 복잡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경험을 가지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줄 압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으로 가다가 빛을 받았습니다. 그 빛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당신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을 받았는데 바로 그 빛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빛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빛이 바로 보배 중에 보배입니다. 이 보배가 자기와 같은 질그릇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청년의 이야기로 빗대어 보면 사도바울이 왜 이 빛을 보배라고 표현하는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년이 짝사랑한 아가씨가 어느 날 청년의 눈빛을 알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러면 그 눈빛이 보배처럼 생각되지 않았을까요? 숫자로 가득찬 세상에 자기를 숫자로 보지 않는 눈빛을 만났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아가씨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계속 고백합니다. 7절 하반절 말씀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아가씨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그 무엇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배가 질그릇에 담기기까지는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배후에 작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능력이 어떤 능력인지는 몰라도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힘, 내지 숫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능력’하면 보이는 만져지는 그 무엇으로 본능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의 개념과는 먼 것 같습니다.
이렇게 결론지어 봅니다. 보배가 질그릇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 바로 심히 큰 능력입니다. 보배가 질그릇에 담겨져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능력은 관계 형성이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능력자이시기 때문에 숫자나 또 다른 힘이 필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관계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원종수 목사님이라고 의사이자 목사이신 분이 계십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2년 선배였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선가 clinic을 운영하셨는데, 꽤 많은 환자들이 찾아 오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clinic하나를 더 차리고 싶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들리는 음성은, “나는 너와의 관계를 원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clinic을 두개 세개 네개 차리는데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깊은 관계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 목사님과 관계를 원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원 목사님이 클리닉을 열어서 환자를 볼 때는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까지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동안 닦은 지식과 경험으로 충분합니다. 사실 원 목사님은 저와 기독학생회도 함께 해서 좀 아는 분인데 1등으로 졸업한 분입니다. 그의 실력은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그 실력으로 진료는 잘 하실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전혀 기여를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 임하여야 합니다. 아니 이미 임했습니다. 심히 큰 능력 가운데 있으니 이 시간을 돈을 더 버는데 사용하지 말고 함께 그 시간을 즐기자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이 큰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 임하고 있는, 곧 보배가 담겨진 질그릇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모두 원종수 목사님과 비슷할까요? 8, 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보면 좀 실망스럽습니다. 보배가 질그릇에 담겨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일들이 생겨야 하는데 정반대입니다. 도리어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좀 당황스럽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당연지사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숫자가 기준이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숫자 계산을 잘 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세상입니다. 연봉이 많은 사람이 성공했다고 생각을 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처음 소개해드린 청년처럼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사실 fiction이니 재미있게 읽었지 나의 고용인이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당장 해고입니다. 숫자가 우상인 세상에서 반대로 살 때 당연히 박해를 받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길 때 도리어 우겨쌈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비교도 안 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의 소유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자들입니다. 그 결과 예수의 생명이 또한 그들 안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생명이 믿는 자들로 인해 온 세상에 드러나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으로 인해서 이 모든 것을 견디고 이깁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도바울은 계속 고백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0절과 11절은 거의 반복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이렇게 반복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육체를 통해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우리 죽을 육체를 통해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 말고 가능하지 않습니다.
결국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시는 하나님께서 예수의 생명을 죽을 육체에 담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사도바울은 이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이웃과 생명의 관계를 맺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웃을 더 이상 숫자로 보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 가운데서 이웃과 생명의 관계를 누리는 축복된 남은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만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능력은 숫자가 아닌 것을 알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거라사인이라는 지방에 이르러서 무덤 사이에 살던 귀신들린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이 자기를 그 지방에서 보내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주님께 대신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그 귀신의 소원대로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랬더니 돼지 이천 마리가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숫자가 중요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천 마리의 돼지도 바다에 빠뜨리십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영국의 유명한 무신론자 버트란트 러셀이 있습니다. 이 분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는데 당신이 무신론자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돼지 이천 마리를 죽이는 자를 하나님으로 받아드릴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숫자의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러셀이 숫자의 노예가 되었을까요? 불행히도 기독교의 진리를 맛 보지 못해서일까요?
오늘까지 세계 역사 가운데 복음 전파에 가장 큰 방해자들은 모두 기독교를 접한 자들입니다. ‘신은 죽었다’를 선언한 니체를 위시해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무신록적 책을 펴낸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버트란드 러셀의 이야기만 소개해 드립니다.
러셀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네 살 때 아버지마저 잃습니다. 그 후 엄격한 기독교 신자인 할머니가 그를 맡아 양육합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에게 생각의 자유를 전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가 질문을 하면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제 정신이야?” “중요한 문제가 이니야” “뭔가 문제야?” “신경 쓰지 마.”
형 랭크처럼 대 놓고 반항하지 못한 러셀은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은 채 시인 셀리를 반항의 모델로 우상시했고 급기야 18세가 되자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로 그는 21세기의 가장 완강한 무신론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러셀이 무신론자가 된 이유는 도리어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되 예수의 생명을 할머니에게서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할머니는 명목상 신자이고 도리어 전형적인 숫자의 노예로 사시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집니다. 결과적으로 사망이 손자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회는 복받은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은 러셀의 할머니와는 정반대의 놀라운 고백을 한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도바울은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길 원했습니다. 곧 그들도 보배가 담긴 질그릇임을 알게 하기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값을 치뤄야 했습니다. 한 가지 길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몸에 채워갑니다. 사도바울은 절망에 가까운 우겨쌈을 답답함을 박해를 당합니다. 그 때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바울의 죽어가는 몸에서 예수의 생명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무신론자 러셀을 만들어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기준으로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남은 사순절 세상 기준으로 살았던 우리들의 모습을 주님께 내려 놓으며 참회의 기도를 올리십시다. 숫자의 노예가 되어서 주머니를 열지 못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회개하며 구제의 축복에 동참하십시다. 세상적 성공의 도구로만 사용했던 우리들의 육체를 쳐서 이웃을 위한 아름다운 질그릇이 되게 하는 절제의 삶을 사십시다. 우리들의 약한 몸을 통하여 예수의 생명이 이웃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부활의 이야기가 우리 가운데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최근 한두번 소개해드렸던 서강대 교수였던 한 동일 신부님이 계신데 신부님은 종종 알제리에 있는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곤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편지에는 많은 고난과 절망의 이야기가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친구의 편지를 읽으면서 도리어 새로운 영양제가 된다고 합니다. 한 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나는 더 이상 목이 마르지 않다!’

절망에 늘 지쳐 있었다.
그러다가 그 절망에 눌려 희망의 끈마저 내려놓고 싶을 때면
신은 어김없이 사탕을 주었다.
오래가지는 않지만 사탕은 충분히 맛있었다.
…………………
드리워진 낚싯대에 고기는 잡히지 않고
견디고 견디는 지리한 시간만이
한여름의 사막 위를 오아시스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습관처럼 나는 조금은 느슨하게
그러나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른다.
…………………
절망의 공세가 무서울수록 신은 숨겨둔 내 마음속의 가난함을 열어주어 절망과 친구가 된 내 삶을 축하해준다.
내가 힘들수록 신은 가까이 있고
난 이제 절망을 귀한 친구처럼 받들어 모신다.
해는 찬란하고 바람은 시원하며
가난하지만 부자인 사지 멀쩡한 나는 더 이상 목이 마르지 않다!
신을 보채지 않으며 절망을 멀리 하지 않으며 사막을 또 걷는다!

아무나 이런 시를 쓸수 있을까요? 아무나 절망을 멀리 하지 않고 사막을 또 걸을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체험하며 주님의 눈길을 느끼는 자들은 이런 시를 쓸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들은 이웃에게 희망을 주게 됩니다. 이웃 안에 있는 보배를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이야기에서 생명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사순절의 남은 시간이 되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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