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희망의 씨앗”, 마가복음 4:1-9 (08/26/2018)

“희망의 씨앗”
이영길 담임목사
본문: 마가복음 4:1-9

지난 주 수양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기억하실줄 압니다. 다음 시를 강사님께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첫 연만 다시 소개해 드립니다. 이문재 시인의 ‘나무’입니다.

나무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이민 신학자들은 변두리를 강조하는 글이나 시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강사님이 이 시를 소개해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는 이번에 처음 접해 보았는데, 이 시를 보면서 나무 끝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는 생각을 하면서 쉽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꽃나무를 생각하면서 모두 끝의 소중함에 공감하셨을줄 압니다. 이유는 꽃이 끝에서 피기 때문에…. 그러면 이문재 시인도 저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시를 써나가고 있을까요? 처음 세 줄만 다시 소개해 드리면,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우듬지는 나무가지 끝을 말합니다. 세번째 줄을 다시 읽어 가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시인은 나와는 다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의 시작을 실뿌리를 먼저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잔가지 끝이 두 번째 끝이었습니다. 시인은 실뿌리 곧 뿌리의 소중함을 절감하면서 이 시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다시 읽으면서 왜 저는 먼저 꽃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이유는 쉽게 생각이 났습니다. 늘 나무 끝에 보이는 꽃을 보면서 감탄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끝의 소중함을 느껴 보곤 했던 것입니다. 반면 반대편 끝 곧 실뿌리는 보이지 않으니 뿌리는 나무의 끝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잘 아시는 주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나무의 어느 끝을 더 소중히 여기실까요? 3, 4절 말씀입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주님은 길 가에 떨어진 씨들을 제일 먼저 언급하십니다. 아마 시인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린 이유는 간단합니다. 뿌리가 자랄수 없는 곳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5, 6절 말씀입니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주님은 명백히 밝히십니다. 뿌리도 중요하고 싹도 중요합니다. 둘 다 나무의 끝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뿌리라는 것입니다. 싹이 나왔지만 뿌리가 잘 자라지 못 해서 햇볕을 쬐자마자 말라 버렸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지 뭐니 뭐니 해도 뿌리지, 뿌리가 잘 심겨져야 나무가 잘 자라지…. 그동안 우리는 뿌리의 소중함 보다는 나무줄기의 끝 곧 꽃과 열매가 맺히는 우듬지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었어….” 청중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주님은 갑자기 반전시키십니다. 늘 나무의 끝 곧 꽃과 열매를 소중히 여기던 청중들의 생각을 뿌리의 소중함으로 바꾸어 놓으시더니 또 뒷통수를 치십니다. 뿌리가 소중하지만 나무 줄기가 자라지 않으면 꽃이 피지 못 하고 열매가 맺히지 못함을 보여 주십니다.
청중은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지만 어떡합니까? 당연지사이지요. 뿌리도 소중하지만 나무 줄기가 자라지 못하면 뿌리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리둥절해 있는데 주님은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좋은 땅의 정의는 단순히 뿌리만 잘 자라는 땅이 아님을 느끼게 합니다. 곧 가지도 잘 자라는 곳이 좋은 땅입니다. 사실 세번째 떨어진 곳은 땅은 비옥하지만 가시덤불도 그 비옥한 땅을 함께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곧 뿌리는 아무리 잘 뻗어나가도 가시덤불이 있다면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좋은 땅의 개념을 한번 더 바꾸신 것입니다. 땅도 비옥하지만 햇빛을 혼자서 독차지할수 있는 곳이 좋은 땅입니다. 이 때 어떤 일이 일어나지요? 삼십 배 육 십배 백 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숫자에 대한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바보가 누가 더 큰 숫자를 말하나 내기를 했습니다. 한 바보가 말합니다.
“7.”
두 번째 바보가 한참 생각하더니,
“졌다.”
7보다 더 큰 숫자가 생각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지금 청중들과 숫자 게임을 하고 계십니다.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지면 처음 30배 결실이 맺힐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늘 가난에 찌들려 살고 있던 청중들에게는 듣기만 해도 신납니다. “와우, 30배.”
그런데 잠시 후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60배를 말씀하십니다. 청중은 더욱 놀랍니다. “30배도 대단한 숫자인데 60배라니….” 그러면서 재리에 밝다고 자처하는 청중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90배라고 하겠네.” 청중은 기대하며 듣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0배, 60배…, 100배.”
청중은 깜짝 놀랍니다. 자기들은 그래도 가난하긴 하지만 숫자 개념은 잘 되있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30, 60 다음으로는 90을 예상했는데 주님은 생각 밖의 숫자를 말씀합니다.
“100배.”

정말로 삼십 배 육십배 백 배의 표현은 놀라운 표현입니다. 사실 삼십, 육십 하면 그 다음으로 모두 구십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백이십, 백오십…. 그런데 주님은 삼십 육십 구십 하시지 않고 백으로 넘어 갑니다. 백으로 넘어 갔으니 그 다음 숫자는 아무도 예측할수가 없습니다. 200이 될수도 있고 천 오백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사람들의 계산과 생각을 넘은 세계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내용의 말씀입니까?
곧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아무도 예측할수 없는 놀라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상상할수 없었던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어느 끝이 더 중요하다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부분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께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30배 60배 그리고 90배가 아니라 백배로 이어지는 놀라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듣는 모두는 이 놀라운 세계를 소유하였을까요? 9절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들었지만 소유한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한 이야기를 먼저 들려 드리겠습니다. 2008년도 노벨화학상 수상을 받은 일본의 시모무라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원자폭탄이 시내에 투하되었습니다. 변두리에 있어서 죽음은 피했지만, 낙진을 맞아 방사선에 오염되어서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청년기를 우울하게 보내게 됩니다. 하루는 어두운 물속에서 떠다니는 초록색을 띤 해파리를 보고 매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후 그 원인을 밝혀 보려고 해양생물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을 바쳐 해파리에서 형광 단백질을 분리하여 구조를 밝혀 냅니다.
삶에 소망이 없었던 그는 작은 해파리의 아름다움을 보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인류에 크게 공헌하게 됩니다. 노벨화학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을 그는 소유하길 원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도 매한 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십 육십 백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세계를 듣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stop했습니다. 그 세계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세계로 접어 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면 삼십 육십 백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세계를 차지하려고 하는 이들에게만 주님은 이 놀라운 세계를 차지하는 길을 소개해 주십니다. 4:20절 말씀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말씀을 듣고 받을 때 좋은 땅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는 자가 서 있는 곳은 깊은 땅 옥토로 변합니다. 이들이 서 있는 곳에는 수많은 가시 덤불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아울러 이들에게는 매력적인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힘이요 매력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말씀을 듣고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들을 귀가 없었을까요? 그들의 마음은 늘 30, 60, 90이로 이어지는 세상을 동경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거면 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30, 60, 90의 세상은 바로 인간이 만들어 가는 세상인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간 거창한 세상에서 그 법칙대로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30, 60, 100으로 이어지는 더 위대한 세상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재미있게 듣기만 하면 족한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눈에서 펼쳐지는 30, 60, 90의 세상에서 잘 사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입니다.

지난번 강사님으로 오신 김호남 목사님을 모시고 Plymouth를 방문했습니다. 보스톤뿐 아니라 미국을 처음 오신 분이시니 당연히 Plymouth에 Pilgrim들이 첫 발을 디딘 곳을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에 모시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9/11 Memorial 이 있는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Plymouth가 9/11과 무슨 깊은 관계가 있는가 궁금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가 보진 못 했고 대신 후에 웹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타운에 한 사람의 희생자가 있었는데 어느 독지가가 자기의 가게 앞에 세우기 시작했고 이를 알고 타운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세운 것입니다.
(스크린)
그런데 참 아이러니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첫 발을 디딘 곳에 9/11메모리얼이 세워졌다니…. 물론 이런 역사적 상처를 기리는 것은 소중합니다. 제가 아이러니칼하게 느낀 것은 필그림들이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신앙을 지키면서 살았는데 그 결과가 이제는 9/11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좀 쉽게 말씀드리면 9/11 때 무너진 맨하탄의 twin tower를 세우기 위해서 그들이 이 곳에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 것입니다.
Twin tower는 30배 60배 90배의 인간이 만든 축복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어느덧 가시덤불에 쓰러져 간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축복의 세계 보다 더 무서운 가시덤불의 세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가시덤불과는 상대도 안되는 위대한 세계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는 30배 60배 100배의 위대한 힘이 거합니다. 이 힘을 가시덤불이 견딜수 없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열매를 끝없이 맺게 됩니다. 이 위대한 세계에 주님은 우리를 늘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30, 60, 100으로 이어지는 신비한 세계를 나타내 보이시길 원하십니다. 해파리 보다 더 매력적인 빛의 세계를 발하게 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빛을 발할수 있게 된다고요…?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말씀을 듣고 받을 때 이런 신비한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깨달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듣고 받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나는 그동안 말씀을 배운대로 깨달은 대로 행했는데 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보지 못하고 있죠?”
만일 그렇다면 분명한 것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뿌리가 깊게 내려져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뿌리로 자라고 있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줄 압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받을 때 곧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달은 말씀대로 행할 때 양념을 쳐야 합니다. 어떤 양념이냐구요?
30배 60배 100배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뿌리는 자라고 있음을 믿는 것이 바로 양념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공부하고 행하다 보면 뿌리는 땅속 깊게 뻗어 갑니다. 어디까지…? 땅 깊은 곳을 파 들어 가면 뜨거운 용암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뿌리는 뜨거운 용암까지 내려 갑니다. 아니 용암을 뚫고 내려 갑니다. 지구의 중심 한 가운데까지….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용광로와 같은 시련을 잘 이겨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뿌리는 땅 깊은 곳까지 뚫고 내려 갔습니다. 용암을 뚫고 지구 한 중심까지 뚫고 내려 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삶은 늘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의 시작은 말씀을 듣고 받음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받을 때 30배 60배 100배의 신비한 세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 때 더욱더 뿌리는 깊게 내려 갑니다. 용암을 뚫고 지구의 중심에 까지….

교우 여러분,
혼자 성경을 읽을 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0, 60, 100이라는 숫자를…. 소그룹 성경공부나 구역 성경공부를 할 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0, 60, 100. 깨달은 말씀을 행할 때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0배 60배 100배.
우리들의 뿌리는 지구 중심까지 다다를 것이고 우리를 괴롭혔던 가시덤불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30, 60, 90의 법칙으로 운영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사는 자들은 능히 이 세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는 30, 60, 100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수양회 강사님께서 소개하신 시로 설교를 시작하였으니 강사님과 관련된 이야기로 마치려고 합니다. 어떤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보스톤에서 지구 중심을 뚫고 반대편으로 나간다면 어디가 될까 궁금하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이번 강사님이 호주 시드니에서 오셨는데 시드니가 아닐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조금 후 어떤 분이 말씀하길, 방금 찾아 보았는데 호주의 서남부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시드니는 동남부에 있습니다만 같은 호주이니 보스톤과 시드니가 지구 중심으로 연결된 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보스톤에서 30, 60, 100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듣고 받는다면 우리의 뿌리는 지구 중심까지 내려 갈 것입니다. 반대로 씨드니에서 그렇게 생각하며 말씀을 받는다면 또 지구 중심까지 내려 갈 것입니다. 결국 지구 중심에서 두 뿌리가 만나지 않을까요? 그 때 온 우주는 30, 60, 100의 놀라운 세계가 되지 않을까요?

그날을 기대하면서 말씀을 듣고 받으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This entry was posted in 설교 원고.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145 “기적의 사람들” 베드로전서 2:1-5 (10/13/2018) webmaster 2018.10.15
144 “아론의 싹난 지팡이” 민수기 17:1-11 (10/07/2018) webmaster 2018.10.08
143 “가이사와 목자들” 누가복음 2:1-20 (09/30/2018) webmaster 2018.10.01
142 “삶의 축제” 로마서 12:14, 15 (09/23/2018) webmaster 2018.09.24
141 “아름다운 세상” 열왕기하 4:42-44 (09/16/2018) webmaster 2018.09.17
140 “한 아이가 있어…” 요한복음 6:1-5 (09/02/2018) webmaster 2018.09.05
139 “희망의 씨앗”, 마가복음 4:1-9 (08/26/2018) webmaster 2018.08.27
138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6-15 (08/12/2018) webmaster 2018.08.17
137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사야 60:1-9 08/05/2018 webmaster 2018.08.06
136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누가복음 10:25-37 (07/29/2018) webmaster 2018.08.01
< Prev ... 1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8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