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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축제” 로마서 12:14, 15 (09/23/2018)

 

드라마 <허준>, <이산>, <동이>를 많은 분들이 잘 아실줄 압니다. 그 드라마들의 메인 연주와 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한 송솔나무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여름에 수영장에 가고 싶다고 하면,

시내 최고급 호텔에 가서 식사를 하고, 수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누구와 싸우는 소리가 났고, 부모님은 무조건 전화를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나서, 빚쟁이들이 아버지를 찾는 전화였고, 누나와 송솔이는 학교로 찾아 올지도 몰라서, 그들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안으시며 “하나님, 이 아이를 잘 보호해 주십시요”라고 눈물로 기도하셨고, 어머니와 송솔이, 누나는 다음 날로, 미국 이모네로 갑자기 떠났습니다.

1988년 2월 추운 겨울날, 가족은 미국 JFK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를 데리러 온 이모부는 낡고 작은 차에 짐을 실었고, 우리는 좁은 골목을 지나 아주 허름한 2층짜리 다세대 주택 앞에서 섰고, 그곳에서 11명이 1년을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전교 1등을 하던 누나는 바로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늘 꼴찌만 하던 송솔은  ABC도 몰랐기에 원래는 6학년에 올라가야 하는 나이에 4학년으로 몇달 뒤 들어갔습니다. 무턱대고 아무 반이나 들어갔는데,  6학년 반으로 잘못 들어갔고, 그날부터, 끔직한 학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식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피아노를 하는 누나가 줄리어드 프리칼리지에 합격해야 했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인지라 교회에서 연습을 하다가, 피아노 줄이 늘어났다며 쫒겨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두 번이나 떨어졌고, 세번째에야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는동안, 그의 악몽 같은 학교생활은 더해만 갔습니다.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리고, 운동도 못하는 동양 아이인, 그 아이를 늘 괴롭혔고, 쉬는 시간이면 한대씩 툭툭 치고 지나갔습니다. 1달러 25센트의 점심 급식비를 아끼려 어머니는 도시락을 매일 싸주셨는데, 아이들은 우유를 도시락에 붓기도 했고, 너무 맞아서, 귀가 찢어져 피가 나거나, 사물함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비난과 놀림을 피할 곳은, 오직 화장실이었습니다. 하루는 변기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나님께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내가 미국에 와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요 ? 누나는 똑똑하게 만들어 주셔서, 엄마의 사랑을 받게 하시면서, 왜 저는 키도 작고, 운동도, 공부도 못해서, 맨날 엄마에게 야단만 맞게 하시는 거냐구요 !!!”

그는 울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어떤 분이 처음으로 자기에게 오시는게 느껴졌습니다.

“얘야~ 내가 여기 있잖아 ~~

늘 너와 함께 하고 있잖아~~

내가 너랑 친구해주면 되잖니 ?!”

그 음성이 들리는데, 너무 서러워서, 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내 이름도 부르지 않아요. 누나의 동생이라고만 해요…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 실수로 태어난 거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단다 ~

나는 네 머리카락까지 세는,

너의 하나님이란다 ~~

내가 널 만들었단다 ~~~”

송솔은 환청인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친구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무작정 믿고, 의지하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심장이 뜨거워지면서, 마음 속 무언가 단단한 반석 같은 게,

만들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플루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국에서 몇 달 배운 게 전부였는데, 미국에서 들으니 너무 반가워, 그 소리를 따라 밴드부실에 갔습니다.

선생님은 송솔을 보고, 플룻을 한번 불어보라고 하셨고, 그는 한국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와 나비야 정도만 겨우 불었는데, 불현듯 한번도 불어보지 않은 애국가의 멜로디가 생각이 났고, 그리고 불었습니다.

송솔도 선생님도 놀랐습니다. 선생님은 그 플루트를 주시면서, 밴드부에 매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날부터, 정말 열심히 불었습니다.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게 기뻤고, 무엇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줄리어드 프리스쿨 시험을 치고 싶어요”

어머니와 누나는 황당해하면서, “아무나 줄리어드를 가는 줄 아느냐 ? 레슨비가 얼마나 비싼데, 우리 형편에는 불가능하다”며 혼을 내셨습니다.

정식 레슨 없이, 시험 기회는 단 한번만 준다는 조건으로, 겨우 허락을 받은 그 아이는 정말, 열심히 연습을 했고, 시험 보는 날, 어머니는 일을 하셔야 했기에, 혼자서 뉴저지에서 맨하튼까지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한편 쟁쟁한 아이들의 옷차림과 악기, 부모님들의 보살핌에 기가 죽었고, 어차피 떨어질거라고 생각하면서, 제스처까지 해가며, 최선을 다하여 연주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들이 박수를 치면서 웃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5분도 되기 전에 끝났는데, 전곡을 다 연주했고, 한 교수님이 낡고 싸구려 악기를 보시며, 빙긋이 웃었습니다.

일주일 뒤, 줄리어드에서 온 우편물을 먼저 잡아든 누나는 비웃으며,

“야, 불합격 통지가 어떻게 일주일만에 오니 ?  창피하지도 않니 ?  이제 엄마 속 좀 그만 썩이고,  또 시험 치겠다는 소리 절대 하지마 !”

경험이 많은 누나는, 줄리어드에 붙으면 한 달이나 두 달 후에 연락이 오고, 떨어지면 2주일 뒤에 연락이 온다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떨어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들렸습니다. 혹시 아버지한테 온 편지를 보고 우시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송솔을 갑자기 송솔을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

“얘야, 네가 줄리어드에 붙었어. 그것도 장학금을 받고~”

그렇게 13세에, 줄리어드 프리스쿨에 들어갔습니다.

 

그후 그는 세계적인 플루리스트로서, 부와 명예를 다 누릴 수 있음에도, 가장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연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연주자가 되어 갑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는 처음 말씀드린대로 드라마 <허준>, <이산>, <동이>의 메인 연주와 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한 영혼의 연주자가 되어 갑니다.

 

송솔나무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분이 왜 많은 분들의 영혼을 울리는 연주자이며 작곡자가 되어 갔는지 이해가 되실줄 압니다. 송솔나무 집사님의 삶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음악이 창출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그의 삶이 그토록 아름답고 멋지게 되었을까요? 삶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유대문학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좋아 하신다. 그래서 세상을 만드셨다.”

아주 깊은 통찰력이 담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만든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 안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는 당신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꿔나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지금도 혼자서 외치십니다.

“보기에 좋구나….”

 

이 유대문학의 정신을 사도바울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기뻐하시길 원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로마서 12장에 있는 말씀인데 사도바울은 11장까지 기독교의 교리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리의 가르침을 마친 후 12장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곧 하나님의 입에서 “좋구나” “대단하구나”라는 함성이 터지게 되는 길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2장을 통해 여러가지를 언급하고 있지만 오늘은 두 가지만 나누고자 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할 때 두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생겨 납니다. 먼저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잘 아시는 순교하는 스데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데반이 주님을 증거하니 사람들이 돌로 칩니다. 이에 스데반이 두 마디를 외치며 주님 품에 안깁니다.

“주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는 그 자체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수 없는 최고의 아름다움입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외치셨을 것입니다.

“대단하구나.”

 

한편 이 스데반의 기도를 누가 받았었죠? 스데반을 돌로 칠 때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저자 사도바울입니다.

스데반의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는 그 축복의 열매가 사도바울인 것입니다. 곧 스데반의 이야기도 아름답지만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 후 사도바울로 인해서 펼쳐 진 것입니다. 신약성경중 13권은 사도바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곧 박해하는 자를 축복함을 통해서 두 명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꽃이 피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요즘 크리스챤이기에 박해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런 곳은 많이 있지만 우리가 사는 미국이나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박해받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한 길입니다. 한편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박해를 통해서 생기는 이야기도 좋아 하시지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을 통한 이야기도 그에 못지 않게 그리워하시지 않을까요?

박해 가운데서는 주님의 명령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은 더 찾기 어려울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놀라운 축복의 세계가 아니 삶의 축제에 동참케 되지 않을까요?

 

가을이 문턱에 다가왔습니다. 잔듸밭을 가꾸시는 분들은 잘 아실줄 압니다. 잔듸씨는 봄에도 뿌리지만 가을에도 뿌립니다. 지금이 잔듸씨를 뿌리는 적시입니다.

가을에 씨를 뿌리면 좋은 점이 많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가을은 아직 땅이 얼어 있지 않기 때문에 뿌려진 씨가 뿌리를 든든히 내린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까지…. 봄이 되면 그 뿌리의 힘을 빌어서 힘차게 새싹이 돋아 나온다고 합니다.

물론 잔듸 말고도 가을에 뿌리거나 심는 식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겨자씨를 심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겨자씨는 1년 내내 뿌리는 씨입니다. 씨는 어떤 땅에서도 자랍니다. 심겨지지 않아서 못 자라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바로 겨자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의 씨를 심으십시다. 우리가 어디에 있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 언젠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 가을과 겨울 어떤 씨를 뿌릴까요?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지난주에 저에게 자기가 쓴 수필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얼마전 그 친구에게 보내준 수필집에서 나온 이야기를 설교시 사용했다면서 감사하다는 글을 보냈습니다. 아울러 증명하기 위해서 저희 교회 웹싸이트에 나온 설교원문 페이지를 보냈습니다.

친구는 설교원고만 본 것이 아니고 저희 교회 웹싸이트를 구석 구석 살펴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다음과 같은 멧세지를 보냈습니다.

“저번에 보내준 교회 홈페이지를 둘러보고 아주 놀랐어. 내 생각보다 교회가 훨씬 크고 많은 좋은 일을하고 있던데. 존경스러워! 이 큰 조직을 잘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내가 수필집 몇권을 가지고 이야기할 상대분이 아닌데. 하여튼 잘하고 있어 반갑고 고맙네….”

 

종종 친구의 멧세지를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사실 이 친구는 지난 8월 서울의대 교수를 정년 은퇴한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수필집을 많이 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칭찬할줄 아는 친구입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줄 아는 자입니다. 그는 삶이 축제임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삶의 축제는 좋은 일로만 항상 가득찬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할 때 아름다운 이야기가 창출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 때 또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창출됩니다.

 

장샤오형이라는 중국 학자가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연전연승을 기록하던 한 운동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순간의 실수로 아깝게 메달권에서 멀어졌습니다. 본국에 돌아온 후 공항에서 다른 선수들이 메달과 꽃다발을 흔들며 기자의 인터뷰에 답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깊은 모멸감과 패배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때 한 공항 직원이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넸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 나는 이것 받을 수 없어요. 나는 패배자인걸요.”

그러자 직원이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도 열심히 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했잖아요. 그러니 승리한 사람과 똑같이 대접받을 자격이 있답니다. 고개를 드세요. 패배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중요한 것은 다가올 미래이니까요.”

그녀는 울컥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직원의 손을 꼭 붙잡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실패한 운동선수에게 꽃다발을 주는 이야기 말입니다. 메달을 딴 선수 손에 주어진 꽃다발 보다 실패한 선수 손에 주어진 꽃다발이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후에 이 선수가 어떤 멋진 삶을 살았을지는 상상에 맡깁니다.

 

그런데 사실 더 꽃다발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아예 선수권대회에 출전도 못한 선수들이 아닐까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지 않을까요?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아닐까요? 그러기에 우리는 매일 같이 아주 쉽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갈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로에게 마음의 꽃다발을 줌을 통해서….

그럴 때 우리는 어느덧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보시면서 너무 좋아하시지 않으실까요? 홀로 세상을 정말로 잘 만드셨다고 생각하시면서 부끄러운듯 얼굴에 홍조를 띄우지 않으실까요?

 

박해를 하는 자들을 축복하는 것 위대합니다. 아울러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도 위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축제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언제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 하셨습니까? 언제 여러분보다 잘 되는 분을 보고 즐거워 하셨습니까? 언제 우는 자와 함께 우셨습니까? 여러분보다 잘 안 되는 분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까?

그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축제의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뉴잉글랜드가 나은 자연주의자  헨리 소로우는 말합니다.

“나는 씨앗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 당신에게 씨앗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놀라운 기적을 기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마음도 이와 같지 않으실까요? 우리 모두에게는 씨앗이 있습니다. 기대하십시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 보다 잘 되는 자들과 더불어 즐거워 하고, 잘 안 되어 보이는 분들에게 희망을 줄 때마다 겨자씨는 뿌려집니다. 내년 봄에 활짝 피어나지 않을까요?

그 때 하나님은 외치실 것입니다.

“좋구나. 대단하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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