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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신비” 마태복음 13:31-33 (06/23/2019)

 

콜롬버스가 스페인에서 신 대륙을 찾아 항해를 떠날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유롭의 끝 Gibraltar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 지브랄타 해협에는 다음과 같은 스페인 격언이 적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Ne Plus Ultra’ ‘저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지브랄타 해협 기둥에 써 놓았는데, 감히 저 바다 너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고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합니다. 이에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이 격언을 수정하라고 지시합니다. 문장의 첫 단어 ‘Ne’를 지웁니다. ‘Plus Ultra.’ ‘저 너머에는 많은 것이 있다.’

후에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이 말을 인용해서 새로운 해석을 합니다. ‘Plus Ultra’는 단지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고 이 세상 우리가 사는 곳 안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것이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케네디가 훌륭한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에게는 ‘Plus Ultra’를 볼줄 아는 지혜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케네디가 이런 지혜를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는 이런 지혜를 가질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유는 Plus Ultra는 천국의 한 가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님은 두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비유에는 ‘Plus Ultra’가 일어나는 두 가지 장소가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곧 두 가지 Plus Ultra의 사건을 주님은 소개하시고 계십니다. 31, 32절 말씀입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작년도 저희 교회 표어가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겨자씨를 심는 공동체,’ 이 말씀을 상고하며 작년 1년 동안 열심히 겨자씨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작은 씨가 뿌려지려면 얼마큼의 땅이 필요할까요?

 

겨자씨 설교를 할 때마다 오래 전에 받은 겨자씨 병을 보게 됩니다. 설교 준비하는 책상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놓여 있습니다. 이번 주 설교 준비하면서도 한번 보았습니다. 작은 병 안에 아직도 담겨져 있습니다.

이유는 아직 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겨자씨는 많은 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씨앗이니 작은 틈만 있으면 됩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틈 안에 ‘Plus Ultra’가 담겨 있음을 알려주시는 놀라운 비유입니다. 겨자씨가 제 아무리 위대한 DNA를 갖고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 겨자씨는 작은 틈을 필요로 합니다. 그 때 겨자씨의 위대함을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은 틈도 위대한 것이 아닐까요?

 

저항 시인으로 알려진 김지하 시인이 ‘틈’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김지하

 

아파트 사이사이

빈 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

 

사람은

 

새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시인은 사람도 ‘틈’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도 ‘Plus Ultra’가 아닐까요? 곧 자기 안에 있는 틈을 사랑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비좁은 틈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을 통해 Plus Ultra의 축복이 펼쳐질줄 압니다. 그 곳에 겨자씨의 천국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겨자씨와 같이 위대한 DNA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한 삶의 틈을 소중히 여긴다면 하나님 나라의 신비한 축복을 누리게 될줄 압니다.

 

그런데 이 틈은 꼭 장소만이 아니라고 봅니다. 시간의 틈도 생각할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시간의 틈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제와 내일 사이에 끼여 있는 오늘이라는 틈에 살고 있습니다. 이 오늘이라는 틈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이라는 틈에 살면서 겨자씨를 심을 때 Plus Ultra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편 감사하게도 ‘Plus Ultra’가 이루어지는 곳은 틈 말고 또 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주님은 천국을 그려 주는데 겨자씨를 통해 보여주시더니 다음으로는 누룩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누룩 없는 빵을 무교병이라고 하고 누룩을 넣은 빵을 유교병이라고 하죠. 당연히 유교병이 맛이 있습니다. 맛있는 빵이 되려면 누룩을 넣어야 합니다.

겨자씨가 필요한 곳은 틈새입니다. 반면 누룩이 누룩의 힘을 발휘하려면 필요한 것은 반죽 곧 깜깜한 밀가루 반죽 안입니다.

곧 누룩의 비유가 주는 교훈은 깜깜한 곳 안에 ‘Plus Ultra’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 안에 놀라운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틈새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틈새가 없는 깜깜한 곳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때 누룩은 제 세상을 만납니다.

 

사실 많은 분들은 어둠의 공포를 갖고 있습니다. 어두운 곳 안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 어두움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지만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밀가루 반죽을 온전히 부풀게 합니다. 겨자씨는 틈새에서 싹이 나지만 누룩은 깜깜한 가운데 보이지 않게 온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어둠은 곧 완전을 향하는 길입니다.

 

어두움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친구가 자기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해 준다고 하기에 받아 보았습니다. MRI를 전신을 찍어 주었는데, 담당 선생님이 혹시 폐쇄 공포증이 있지는 않냐고 묻더니 정 좁고 깜깜한 데에서 못 견디겠으면 공기 주머니 같은 것을 주면서 이것을 누르면 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들어가서 1, 2 분 지났는데 좀 답답해 졌지만, 다행히 고비를 넘기고 약 30분 간 좁은 공간에 잘 들어가 있다가 나왔습니다.

감사하게도 특별히 문제가 없다는 결과도 받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도저히 못 참아서 주머니를 누르고 나오신 분도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은 얼마나 찜찜하겠습니까? 돈은 돈대로 들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과는 보지 못하고….

 

사실 MRI를 찍는다는 것은 좁은 틈 사이에 들어가서 정해진 시간을 꼼짝 없이 있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까지 잘 마치고 나오면 여러모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누룩의 비유는 MRI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MRI는 병이 있다 없다만 밝히는 것입니다.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Plus Ultra가 일어나면 안 되겠죠. 없던 병이 많이 생기는 일이 생기면 당연히 안 되겠죠. 물론 병이 없다고 밝혀지면 잠시 천국을 맛 봅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습니다.

반면 누룩이 어두움을 만났을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없던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Plus Ultra’가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됩니다. 누룩은 보이지 않게 일하니 말입니다.

 

저희 교회와도 관계가 있으신 김진수 장로님이 계십니다. 저희 교회가 국내 선교를 위해서 두 번 그 분 회사에서 만든 차가 버섯이나 고사리등을 가지고 바자회를 열곤 했습니다.

그 분의 자서전을 얼마 전 읽어 보았는데, 간단히 말씀드리면 미국에 와서 콤퓨터 회사를 차리고 크게 성공을 하신 분인데, 당신의 재산으로 foundation을 만들어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시고 계십니다.

요즘은 캐나다 원주민들을 선교하시는데 버섯등을 재배하는 회사를 차리셨습니다. 또 돈을 벌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원주민들의 생활터전을 닦아 주면서 전도하려는 목적으로 회사를 차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원주민들을 위해서 사업을 하시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자기 가족 중에 알콜 중독자가 있었고, 자살한 사람이 있었고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곧 알콜 중독, 자살, 저학력은 장로님 가정의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바로 원주민들이 실제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장로님이 만난 원주민들과 비슷한 환경에서 당신이 자랐고, 그러기에 원주민들도 자기들을 이해해주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가지는 뼈 아픈 삶의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두움 안에서 장로님은 ‘Plus Ultra’를 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장로님 가정의 어두움은 이제는 장로님의 섬김의 삶으로 인해서 누룩이 되어져서 원주민들 사이에 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누룩의 신비입니다. 어두움은 죽음 같지만 거기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어두움은 죽음 같지만 이웃을 만나면 축복의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합니까? 과거에 거쳐야 했던 인생의 터널의 시간은 이웃을 위한 누룩이 될수 있습니다. 물론 현재 거치고 있는 터널의 시간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현재 거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터널을 통해 주님께서 새로운 축복을 우리 주위에 늘 옮겨다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삶은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겪는 어두움으로 인해 도리어 온전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Plus Ultra의 세상이 되어 갑니다. 우리의 어두운 아픔들을 거룩한 누룩으로 여긴다면…. 그러니 우리는 어떤 꿈을 가져야 할까요?

 

한편 김 장로님의 자서전에 재미있는 글이 나옵니다. 제목은 ‘큰 꿈을 꾸지 말자.’

‘캐나다 원주민들을 위한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큰 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큰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분의 꿈을 나의 일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이 무엇이겠습니까? 온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틈과 어두움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곧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틈과 어두움을 ‘Plus Ultra’의 도구로 바꾸시는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도 각자만이 아는 틈과 어둠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은 우리들의 틈과 어둠을 통해서 천국를 펼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Plus Ultra’가 꽃피는 곳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영원한 세계로 향하는 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어두움이 가득찬 이 곳은 천국의 한복판이 되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틈과 어두움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틈과 어둠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꿈을 이루실 것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말씀을 거둡니다.

틈새와 어두움을 좋아하는 동물이 바로 생쥐일줄 압니다.

Simon Dell이라는 사진사가 집 뒷마당에 사는 생쥐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근처에 고양이가 서성거리는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Simon은 생쥐를 위해서 예쁜 집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집 주위에는 fence를 쳐서 고양이가 접근하지 못하게 합니다.

처음 집을 지어주니 들어와 사는 것을 보았는데, 그래서 또 하나를 더 지었더니 친구들을 불러 와서 또 지어 주고 그래서 세 집을 지어 줍니다.

Simon씨가 밖에 서 있으면 가까이 오지는 않지만 얼굴을 살짝 살짝 내민다고 합니다.

생쥐에게서도 ‘Plus Ultra’를 보았던 것입니다. 누가 압니까 앞으로 이 분이 생쥐로 인해서 어떤 대박이 터질지….

 

사실 생쥐의 특징이 무엇입니가? 틈과 어두움 가운데서 할 것 다하고 사는게 아닙니까? 아니 재미있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월트 디즈니는 Mickey Mouse를 만들어 낸 것이겠구요.

그러니 우리들의 틈과 어두움을 사랑하십시다. ‘Plus Ultra’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생쥐처럼 틈과 어두움 속에서 기차게 재미있게사십시다. 총각 처녀들은 연애도 하시고, 친구와 어울리시고, 삼세대가 어우러지는 즐거움을 누리십시다. 주님께서 먼저 틈과 어두움 속에서 재미있게 사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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